메뉴 건너뛰기

씨크릿독트린

조회 수 820 추천 수 0 댓글 0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씨크릿 독트린 강의록

 

런던 H.P.B 롯지

 

 

 

런던의 블라바츠키 롯지에서 1889년 1월 10일부터 6월 20일까지 H.P.B를 중심으로 「씨크릿 독트린」상권 「쟌의 서」의 스탠저와 주석에 관해 매주 질의응답식으로 강의적 의론이 행해졌습니다. 스탠저Ⅰ에서 IV까지 포함되어 있는 1월 10일부터 3월 14일까지의 속기록은 H.P.B 자신이 모두 직접 기술하여, 1890년 3월과 1891년 1월로 2부로 나누어 「신지학협회 블라바츠키 롯지의 강의록」이라는 표제로 출판되었습니다. 남은 스탠저의 속기록은 행방불명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씨크릿 독트린」을 이해하는데는 출판된 강의록만으로도 대단히 귀중한 참고재료이므로, 이 책에 같이 붙여두도록 한 것입니다. 원문은 「H.P. 블라바츠키문집」 10권 301~406p에 있습니다. (역자)

 

런던, 랜스다운 로드 17번지에서의 집회

1889년 1월 10일 오후 8시 30분. 의장 Mr. T.B. Harbottle

 

주 제 : 씨크릿 독트린 1권의 스탠저​

 

 

스탠저 I.

 

Sloka (1). 영원한 어버이 (공간)은 언제나 눈에 보이지 않는 그녀의 옷에 싸여져서, 7개의 영원(永遠) 동안에, 또 다시 깊은 잠에 들어갔었다

문) 추상적인 공간은 프로엠 안에 설명되어 있는데 다음과 같다.

 

. . . 그들은 절대 통일체는 “무한”으로 바뀌어질 수 없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무한”이란 어떤 끝이 없는 연장과 그런 어떤 것의 지속을 전제로 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유일의 전(全, ALL)」은 우리의 존재의 터전인 지구상의, 즉 우리들 존재계에서 「유일의 전(全, ALL)」이 단지 멘탈(정신적)적 물질적 표현을 하고 있는 공간과 같은 지각의 대상도 아니고 주체도 아니다. 만약 영원무한의 전(全, ALL), 즉 편재하는 통일체가 영원 속에서 존재하고 있는 것이 아니고, 주기적인 현현을 통하여 다양한 우주 혹은 여러 가지의 인격이 된다고 생각 할 수가 있는 것이라면, 그 통일체는 유일한 것이 아닐 것이다.

“순수공간은 저항하지도 못하고, 운동하지도 못한다”고 말한 존 로크의 생각은 바른 것이 아니다. 공간이란 “무궁한 허공(limitless void)”도 아니고 “조건화된 충실(conditioned fulness)”도 아니다. 그러나 양쪽 모두이다.

절대적 추상의 세계에서는 영원히 감지할 수 없는 신이고, 유한의 인간 마음에서만 공허(空虛)이다. 또 마야적(현상)인식의 세계에서는 그것이 가시적이든 비가시적이든 간에 질료가 충만한 공간이자 만물의 절대적 용기(容器)이다. 따라서 이것이야말로 절대적 전(全, ALL)이다.

크리스트교의 사도가 “신의 안에 살고 움직이고 존재하도다”라고 말한 것이나 “우주는 브라흐마 안에서 살고 브라흐마에서 생성되며 브라흐마로 회귀하도다”라고 힌두교의 리쉬가 말한 것은 아무런 차이가 없다. 현현되지 않는 우주 브라흐마(중성)는 곧 잠재상태에 있는 미현현된 우주이다. 그리고 현현된 브라흐마는 정통종교에서의 상징적 교의에서는 남성-여성(male-female)으로 되어있는 “로고스(logos)”이다. 말하자면, 비전을 전수 받은 사도 성 바울의 신과 리쉬(스승)의 신은 보이지 않는 공간과 보이는 공간 모두이다.

공간은 비교의 상징학에서는 “일곱 개의 피부를 가진 영원한 어머니-아버지”라고 표현된다. 공간은 미분화상태에서 분화한 층에 이르기까지 일곱 층의 표면으로 구성되어 있다.

“우주가 존재하던 존재하지 않던 간에, 과거에도 있었고, 현재에도 있으며, 미래에도 있을 것은 무엇이겠는가?”라고 비교의 센쟈르어 문답집에서 묻는다. 그 답은 “공간”이다.

 

문) 영원의 어버이가 되는 공간은 왜 여성이라 말하는 것인가요?

 

답) 언제나 여성이라고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앞서의 인용문에서는, 공간은 “영원의 어머니-아버지”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공간을 여성이라고 말하는 경우, 파라브라훔(Parabrahm)을 정의하는 것은 불가능한 것이지만, 적어도 생각을 이르게 할 수가 있는 시초의 무언가에 대하여 이야기를 한다고 하면, 그것을 여성원칙으로 하지 않으면 안되기 때문입니다.

모든 우주발생론에서 시초의 분화는 여성적이라고 보게 되었습니다. 파라브라훔을 감추고, 베일을 덮어씌우는 것은 물라푸라크리티이고, 아인-소푸에서 최초로 발산하는 것은 세피라(Sephira)인 것이며, 헤시오드에서는 에로스의 이전에 카오스에서 나오는 가이아입니다.([신통기] 201p-246p) 이것은 모두 뒤에서 반복해 언급되어지고, 보다 덜 추상적인 물질적 창조과정이 언급됩니다. 가령, 이브가 아담의 갈비뼈로 창조된 증거에 관한 것과 같은 이야기입니다. 시초에 오게되는 것은 대모신이나 여신들입니다. 시초의 발산은 때묻지 않은 어머니로 되고, 그의 어머니에서 모든 신들, 즉 인격화되어 여러 창조력이 생겨난 것입니다. 우리들은 중성 [it]라고 말하는 언어를 쓸 수가 없으므로, 남성이나 여성 용어를 쓰지 않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것은 엄밀히 말해서, 중성의 [it]에는 어떤 것이건 나올 수가 없으며, 방사나 발산도 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문) 이 시초의 발산은 이집트의 네트(Neïth)와 같은 것입니까?

 

답) 실제로는 네트를 넘어선 것이지만, 어떤 점에서는 또는 저급의 면에서는 네트입니다.

 

문) 그렇다면 IT 그것들은 “7개의 피부를 가진 영원한 어머니-아버지”는 아닌 것입니까?

답) 그렇습니다. IT이란 힌두철학에서는 파라브라훔 즉 브라흐마를 넘어선 것이고, 지금 서구철학이 “불가지자”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들이 말하는 공간이란, 중성의 브라흐마의 여성적 측면을 가리킵니다. 분화의 시초의 날개가 버둥거릴 때는, 주관적인 것들은 발산해 혹은 객관적인 것들에 음(陰)처럼 떨어져 들어가서, 옛날 대모신이라고 말하던 것이 되어집니다. 대모신에서, 동시에 자식과 아버지가 되는 로고스가 나옵니다. 자식이나 아버지도 미현현일 것이며, 한편에는 가능성(Potentiality)인 것이고, 다른 편은 잠재적 가능력(potency) 만반타라. 전자와 모든 우주 발생론에서의 “자식” 이라 말하고 있는 현현하는 로고스와 혼동을 해서는 안됩니다.

 

문) 절대적 IT의 최초의 분화는 언제나 여성적인 것입니까?

 

답) 비유로 해서 여성적일 뿐입니다. 엄밀히 말해 철학에서는 중성입니다. 그러나 인간의 개념으로서는 먼저 여성으로 나타냅니다. 이러한 개념이란 것이 훗날에 있어 어느 정도 물질화 되어버리고 마는 것인가는 그의 체계를 만들어낸 민족 혹은 국민의 영성의 정도에 따른 것입니다. 한 예를 들면, 탈무드학자들의 카발라에서는 그것은 아인-소푸라고 부르며, 무종, 무궁한, 무한(늘 부정적인 “무”가 붙어 있다)이라 말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절대적인 원칙은 “그”라고 말합니다! 무한의 광의 이런 부정적이고, 무궁한의 원에서부터 시초의 세피라 즉, 왕관이 발산해서 탈무드 학자들은, 그것을 “토라(Torah)" 즉 “법”이라고 말하며, 그것은 아인-소푸의 처라고 설명을 합니다 이것은 영적인 것의 극단적 인격화인 것입니다.

 

문) 인도철학에서도 똑같은 경우가 있습니까?

 

답) 인도철학은 정반대입니다. 인도의 우주발생론을 보면 파라브라훔은 전혀 말하지를 않고, 물라프라크리티에 대해서만 말하고 있습니다. 물라프라크리티는 보이지 않는 우주 안에 있는 파라브라훔의 옷의 안감이고 모습입니다. 물라프라크리티는 자연 즉 물질의 뿌리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파라브라훔은 뿌리라고는 말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만물의 “뿌리없는 뿌리”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물라프라크리티 즉 “불가지자”의 베일에서 시작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여기서 또 시초의 것은 대모신으로, 질료의 제1계에 있어서의 주관적인 뿌리의 반영을 보게됩니다. 다음에는 대모신에서 혹은 대모신의 안에 있는 미현현의 로고스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미현현의 로고스는 동시에 대모신의 자식이며, 남편이고, “숨어있는 아버지”라고 말을 합니다. 여기에서 시초의 현현하는 로고스 즉, 영과 자식이 나와서, 그의 실질부터 7인의 로고스들이 발산합니다. 7인의 로고스들의 총합체는 하나의 집단적인 힘이 되어 눈에 보이는 우주의 건축가가 됩니다. 로고스들은 유태인이 말하는 “엘로힘”인 것입니다.

 

문) 앞에서 말한 “공간” 즉 미지의 신, 베다에서 “그것” 이라고 말하는 것의 어느 면이, 여기서 “영원의 어버이” 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까?

 

답) 베단타파의 물라프라크리티나 불교의 수바바트, 말하자면, 우리들이 지금까지 이야기해온 분화해 있지만 미분화인 것이기도 한, 그의 양성적(兩性的)이란 무엇입니까? 그의 시초와 원질에 있어서는 그것은 순수한 추상물이지만, 때가 흘러가는 동안 프라크리티로 변질되면, 비로소 분화를 해내는 것입니다. 만약 인간의 원질에 대해 말하게되면, 그것은 부티에 상응해 아트마는 파라브라훔, 마나스는 마하트에 상응한다 할 것입니다.

 

문) 그러면, 공간에서의 7개의 층이란 것은 무엇입니까? 프로엠 에서 “7개의 피부를 가지는 어머니, 아버지”에 관해서 쓰여 있습니다만,

 

답) 플라톤과 헤르메스 트리스메지스투스는 그것을 신성한 생각이라고 보았고, 아리스토텔레스는 이 “어머니-아버지”를 물질의 “결여(Privation)”라고 보았습니다. 그것은 영계에서 시작하여 사이킥계를 거쳐 물질계에 이르기까지의 존재의 7세계로 될 것들입니다. 생각의 7개의 세계나 의식의 7개의 상태는, 이것들의 세계에 상응하는 것입니다. 이것들의 7개조의 모두에는 7가지 “피부”에 의해 상징되는 것입니다.

 

문) 그것들은 성스러운 마인드의 속에 성스러운 생각인 것입니까? 그러나 성스러운 마인드는 아직 존재해 있지 않습니다.

 

답) 분화가 시작되기 전에 신성한 마인드는 존재하고 있습니다. 존재하지 않을 리가 없는 것입니다. 그것은 신성한 개념작용이라고 말하고 있으며, 잠재적 가능성으로서는 영원인 것이고, 잠재적 가능력(힘)으로서는 주기적으로 현현해서, 마하트, 아니마 문디, 즉 보편적인 혼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잘 유념해 두지 않으면 안될 것은, 그것에 어떤 명칭을 붙여서도 이것들의 개념의 하나 하나에는 가장 형이상학적인 면이나, 가장 물질적인 면이나, 중간적인 면도 있다는 것입니다.

 

문) “늘 눈에 보이지 않는 옷”이라고 하는 언어는 어떤 뜻입니까?

 

답) 동양철학의 어떤 비유에서도 그러하지만, 이것은 물론 하나의 가정인 것입니다. 아마, 그것은 크룩스 교수가 탐구하고 있는 가정적 “원초물질(protyle)”이겠지만, 그것은 이 지구상, 즉 이 세계에서는 결단코 발견할 수는 없습니다. 그것은 비분화의 질료, 말하자면 영적 물질인 것입니다.

 

문) 그것은 “라야(Laya)”라고 말하는 것입니까?

 

답) “옷”과 모든 것들은 라야 상태에 있는 것입니다. 그 상태에서, 또는 그 꼴 속에서 원초질료는 분화를 시작해 우주 및 그 안의 모두를 태어(생겨)나게 합니다.

 

문) “눈에 보이지 않는 옷” 이라고 말하는 것은, 그것이 의식의 어떠한 분화에 있어서도, 객관적인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까?

 

답) 만약 그의 진화 단계에서 유한한 의식이 가능했다고 한다면, 그의 의식에 있어서는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말하는 편이 좋을 것입니다. 로고스에 있어서 조차, 물라프라크리티는 베일로 절대자를 덮고 감싸고 있는 옷이 됩니다. 로고스조차 절대자를 인식해 낼 수 없다고, 베단타파는 말했습니다.

 

문) 물라프라크리티(Mulaprakriti)란 말은 적절한 용어입니까?

 

답) 베단타파의 물라프라크리티는 베다의 아디티(Aditi)입니다. 베단타 철학이란 문자 그대로, “모든 지식의 극치, 혹은 총합”이라는 뜻입니다. 인도철학에는 여섯(六)파가 있지만, 그것들을 엄밀하게 분석하면, 원질적으로는 완전히 일치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기본적인 곳에서는, 여섯 파는 완전히 일치하지만 대단히 많은 명칭이 있고, 지엽적인 끝머리에서의 문제나 세세한 장식적인 표현이나 복잡한 묘사, 예를 들면 어떤 발산물은 그것 자체의 아버지가 되고, 아버지는 자신의 딸에서 태어난다고 말하는 곳이 많이 있음으로, 마치 정글 속에 들어가는 것 같이 헤매게 되고 맙니다. 비교적인 입장에서 힌두인에게 무슨 말을 걸어 보십시오, 그는 반박하려고 생각한다면 자신의 독특한 체계에서 그것을 반박할 수가 있습니다. 여섯 파는 각각, 그들 자체의 의견과 용어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의논을 하고 있는 경우에서는, 한파의 용어만을 쓰지 않으면, 오해를 받는 위험이 매우 많습니다.

 

문) 그러면, 다른 철학파는 똑같은 용어를 완전히 틀린 뜻으로 쓰고 있는 것입니까? 예로부터 비교철학과 상카야 철학에서는 전혀 다른 뜻을 가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답) 바로 그러합니다. 그리고 비쉬누 푸라나에서는 또 그것과는 상당히 차이가 있는 뜻으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비쉬누 푸라나는 일곱 개의 프라크리티가 마하트에서 발산한다고 말하며, 그 마하트를 마하 붓디(Maha-Buddhi)라고 말합니다. 그렇지만, 기본적으로는 그 생각은 같지만, 용어는 각파들에 의하여 틀리고, 그의 진정한 뜻은 인격화의 미로 속에서 잃어버리고만 것입니다. 만약 가능하다면, 우리들 자신의 용어체계를 만들어 내는 편이 좋을는지 모릅니다. 단지 서구의 언어, 특히 영어는 철학용어가 적어서 그렇게 하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것입니다.

 

문) 라야 상태를 표현하는데, “원질(Protyle)”이라고 말하는 용어를 쓸 수는 없습니까?

 

답) 쓸 수가 없습니다. 크룩스 교수가 말하는 프로타일은 아마 가장 물질적인 세계에 있어서 동질의 물질을 나타내기 위해 쓰고 있지만, “영원의 어버이”의 “옷”에 의해 상징화된 질료는, 아래에서 위로, 혹은 바깥에서 안으로 헤아려 보면, 물질의 일곱 번째의 세계에 있습니다. 이것은 가장 아래쪽, 말하자면 가장 바깥의 물질적인 세계에서는 라야는 결코 발견할 수 없는 것입니다.

 

문) 그래서, 7세계 각각에는, 그의 세계에 있어서 비교적으로 균질적(均質的)인 물질이 있는 것입니까?

 

답) 그렇습니다. 그러나, 그와 같은 물질은, 그것과 똑같은 인식계에 있는 사람만이 동질인 것입니다. 그래서 근대과학에서 프로타일을 발견했을 때도, 그것은 지금의 우리들의 경우와 똑같이 동질인 것입니다. 그 동질성의 환영은 길게는 자칫하면 제6근본인종 때까지 계속할지도 모릅니다. 왜냐하면, 인류는 언제나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변화하고 있습니다. 영적으로도 변화를 하면 좋겠지만, 좌우간 각 근본인종 그리고 각 아인종마다 차츰 스스로를 완성시켜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문) 과학자가 써온 용어를 다른 뜻으로 쓰는 것은 큰 잘못이 아니겠습니까? 지난날, 원형질(protoplasm)에는 프로타일과 거의 같은 뜻이 있었지만, 지금은 그 뜻이 적어졌습니다.

 

답) 그와 같은 것이 된다면 확실히 틀린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의 사상가들이 말하는 힐레(Hyle)는 확실하게 이 세상의 물질에는 해당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그 용어를 칼데아의 우주발생론에서 취했습니다. 칼데아의 우주발생론에서 그 용어는 아주 형이상학적인 뜻으로 쓰였습니다.

 

문) 그렇지만, 유물론자들은 우리들이 말하는 물라프라크리티와 거의 같은 개념을 나타내기 위해 힐레라고 말하는 용어를 썼습니다.

 

답) 그럴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루인스 교수와 그의 사상체계인 물질 이상주의(Hylo-idealism)를 굳게 믿고 있는 소수의 제자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그들의 체계에서는 힐레의 형이상학적인 뜻은 완전히 없어져서 무시되고 있습니다.

 

문) 그렇다면 라야(Laya)라고 말하는 것이 가장 좋을 것 같군요?

 

답) 그렇지도 않습니다. “라야”는 특정한 어떤 것이나 어떤 계 혹은 다른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상태나 상황을 의미합니다. 그것은 산스크리트어로, 분화되지 않고 변화하지 않은 상태, 즉 모든 분화를 멈춘 영점(zero point)의 어떤 개념을 표현합니다.

 

문) 시초의 분화는 제7계의 물질에 속하는 것이므로, 크룩스 교수의 프로타일도 제7계의 물질이라고 생각해야 되지 않습니까?

답) 크룩스 박사의 이상적 프로타일은 그가 “영점”이라고 말하고 있는 상태에 있는 물질입니다.

 

문) 바꾸어 말한다면, 이 계의 라야점 입니까?

 

답) 크룩스 교수는 다른 계를 연구하고 있는 것인지 그의 존재를 인정할 것인지, 전혀 명확하지 않습니다. 그의 연구 대상은 프로타일 원자이지만, 누구도 그 원자를 보거나 발견한 사람은 없습니다. 때문에, 그의 존재는 과학의 새로운 작업가설에 불과합니다. 대체 원자란 실제에 있어 무엇이겠습니까?

 

문) 그것은 있어야 할 것들의 편의상의 정의이며, 혹은 분자를 나누기 위한 편리한 언어입니다.

 

답) 그러나, 과학자들은 이미 있다고 말하고 있는 70여개의 원소(저자저작 시기 참고)와 같이, 원자는 단순한 편의상의 용어가 아니라는 결론에 이르고 있었습니다. 고대인의 4대 원소나 5대 원소는 많은 조소를 받아왔지만, 지금 크룩스 교수는 엄밀히 말해서 화학원소라고 말하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결론에 이르렀습니다. 사실상 원자가 발견되기는커녕, 단일 분자조차도 하나같이 발견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문) 이 문제에 관해서 처음 말을 한 플라톤은 그것을 원자론이라고 말한 것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답) 진정 그렇습니다. 그러나 W.헤밀턴 경이 지적한대로, 그의 용어는 근대과학의 여러 파에 오용 당하고 있습니다. 과학은 형이상학을 웃음거리로 하면서도, 원자라고 말하는 순수한 형이상학적인 용어를 물리학에 응용하고, 그 결과, 현재 “이론”은 말하자면 “자명의 리”의 권리를 차츰차츰 빼앗아 가기 시작했습니다.

 

문) 7개의 영원이란 무엇입니까? 프랄라야에서는 시간을 의식할 수 있는 자는 아무도 없다는데, 어떻게 해서 그와 같이 나누어지는 것이 있을 수가 있습니까?

 

답) 근대의 천문학자는 자신의 고대의 동료보다 “천(天)의 법칙”을 더 잘 알고 있다고 할 수가 없습니다. 만약 근대천문학자에게 “십이궁을 각각의 철에 따라 끌어낼 수가 있는지”, 혹은 “천공을 펼친 그”와 함께 있었던가? 라고 물어보면, 역시 그는 욥과 똑같이 슬프게도 부정하는 답을 할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욥의 책」37-38절) 그럼에도 불과하고, 그는 부끄럼도 없이 태양과 달과 지구의 연령을 추측하고, 의식을 가진 인간이나 갖지 않은 인간에게나 한 사람도 없었던 때로부터 지질학적인 시대를 “계산”합니다. 추측을 한다고 하는 권리를 왜 고대인에게도 주지 않습니까?

 

문) 그러면 왜, “7개의 영원”이라고 말하는 언어를 쓰는 것입니까?

 

답) 7개의 영원이란 언어는 유사라고 말하는 불변의 법칙 때문에 쓰여지고 있습니다. 만반타라가 7기로 나누어지는 것과 똑같이 프랄라야도 그러합니다. 낮은 12시간으로 되어 있는 것처럼, 밤도 그러합니다. 우리들은 밤 동안은 잠을 자고 있으며, 때(시간)를 의식하지 않게 된다고 해서 시간이 안 간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프랄라야는 만반타라의 “낮”에 계속되는 “밤”입니다. 누구도 그곳에는 없으며, 의식은 다른 것들과 함께 잠에 빠져 있습니다. 그러나, 의식은 존재해 있으며, 만반타라 동안에는 충분히 활동을 합니다. 그리고, 유사의 법칙과 주기의 법칙은 불변하며, 그의 법칙은 양극에 똑같이 일을 하고 있는 것을 우리들은 잘 알고 있으므로, 왜 7개의 영원이라고 말하지 못할 것이 있습니까?

 

문) 그러면, 영원을 어떻게 해서 헤아릴 수가 있습니까?

 

답) 아마 그의 질문은 “영원”이라 말하는 언어가 일반에게 오해된 데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우리들 서구인은 우둔하게도 시작이나 끝이 없는 것들에 관해 추측을 하면서 고대인들도 똑같이 그렇게 생각을 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렇지만 고대인들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영원을 시작이나 끝이 없는 계속이라고 이해한 고대의 철학자는 없었습니다. 그리스의 아이온(Aeon)에도 칼데아의 네로세스(Neroses)에도 그와 같은 뜻은 없습니다. 실제로 그들은 그의 뜻을 정확히 전할만한 언어를 가지고 있지 않았습니다. 파라브라훔(Parabrahm)과 아인-소푸(Ain-Soph)와 아베스다(Avesta)의 제루아나-아케르네(Zeruana-Akerne)만이 그와 같은 뜻의 영원을 나타냈습니다. 모든 다른 기간들은 회귀년과 그 외에 막대한 주기에 기초되어있는 유한하고 천문학적인 것입니다. 성서에서 “영원”이라고 번역된 이엔(Aeon)이라는 언어는 단지 하나의 유한기간을 표시하고 있을 뿐 아니라, 일종의 천사 혹은 존재인 것도 뜻하고 있습니다.

 

문) 그러면 프랄라야에도 “큰 숨”이 있다고 말하면 바른 것이 되지 않습니까?

 

답) 물론 바른 것입니다. 왜냐하면 “큰 숨”은 끊임이 없는 것이며, 말하자면, 보편적인 영구운동이기 때문입니다.

 

문) 만약, 진정 그러하다면, 그것을 기간으로 나누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기간을 나누면, 절대적이고 완전한 “무”라고 말하는 개념이 없어지기 때문입니다. “큰 숨”은 많이 들이마시는 숨과 내뱉는 숨에 대하여 이야기 할 수는 있지만, 기간의 수를 말하는 것은 약간 모순인 것으로 생각됩니다.

 

답) 휴지(休止)의 절대성은 운동의 절대성과 대조되지 않으면, 절대적 휴지의 개념은 없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양쪽의 표현은 똑같이 바른 것입니다. 아주 옛적의 리쉬에 의해 쓰여진 프랄라야에 관한 장대한 시가 있습니다. 거기에는 프랄라야의 동안에 “큰 숨”의 운동은, 무의식의 큰 바다의 리듬적인 운동으로 부르고 있습니다.

 

문) 그러면, “이엔(Aeon)" 대신 “영원(eternity)"이라는 언어를 쓴다면 좀 곤란합니다.

 

답) 좀더 익숙한 언어가 있는데, 왜 그리스어를 써야 합니까? 특히 영원이라는 표현은 씨크릿 독트린에서 충분히 설명되어 있지 않습니까? 원한다면 당신은 그것을 상대적 영원, 즉 만반타라 영원과 프랄라야 영원이라고 부를 수도 있습니다.

 

문) 프랄라야와 만반타라의 관계는 수면과 각성의 관계와 완전히 유사한 것입니까?

 

답) 어떤 의미에서는 그렇습니다. 밤 동안에 우리들은 잠을 자고있어서 의식하지 않을지 모르지만, 우리들은 모두 인격으로서 존재하고 있으며, 개성으로서 있습(在)니다. 그러나 프랄라야의 동안에는 분화한 모든 것들의 구성단위는 현상우주에서 사라져서 유일의 원체에 흡수되거나 혹은 그 속으로 옮겨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실제에 있어서는 큰 차이가 있는 것입니다.

 

문) 수면(睡眠)은 “인생의 음지(陰地)”이라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만, 프랄라야에서도 우주 생명의 음지라고 말할 수가 있겠습니까?

 

답) 어느 의미에서는 그렇게 말해도 좋을 것입니다. 프랄라야는 눈으로 볼 수 있는 것이 눈으로 볼 수 없는 것에, 이질의 것이 동질의 것에 용해되는 것이고, 휴지(休止)의 때입니다. 우주적 물질조차도, 그가 불멸의 것이면서도 휴지의 때에는 그의 라야상태로 되돌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모든 것을 포함한 유일의 에센스의 절대성은 휴지의 활동 중에 똑같은 나타냄이라 하는 것입니다.

Sloke (2). 시간이란 것은 없었다. 계속의 무한한 품안에서 깊은 잠에 들어 있었기 때문이다.

 

문) 시간과 계속의 차이는 무엇입니까?

 

답) 계속은 있는(有)것 입니다. 계속에서는 시작이나 끝나는 것이 없습니다. 시작이나 끝이 없는 것을 어떻게 해서 시간이라고 부를 수 있습니까? 계속은 무시무종이겠지만, 시간은 유한입니다.

 

문) 요는 계속은 무한의 개념이고, 시간은 유한의 개념이라고 말하는 이치입니까?

 

답) 시간은 나눌 수가 있지만, 계속은 적어도 우리들의 철학에서는 나눌 수가 없습니다. 시간은 계속의 안에서 나눌 수가 있습니다. 당신이 말한 대로, 한쪽은 시공에 속한 것이지만, 다른 쪽은 양쪽을 넘어선 것입니다.

 

문) 시간은 지구의 운동에 의해서만 정의를 할 수가 있는 것입니까?

 

답) 우리의 개념 안에서도 시간을 정의할 수가 있습니다.

 

문) 오히려, 계속을 그와 같이 정의해야 하는 것 아닙니까?

 

답) 아닙니다. 시간입니다. 왜냐하면 계속은 나누거나 그 안에 경계를 짓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있어서의 계속은 상대적인 것이 아니라 절대적인 유일한 영원입니다.

 

문) 계속의 본질적인 개념은 존재라고 말해도 좋겠습니까?

 

답) 아닙니다. 존재에는 제한이 된 일정한 기간이 있지만, 계속에는 시작과 끝이 없으므로, 시간을 포함하는 완전한 추상입니다. 계속은 공간과 닮은 것입니다. 공간도 추상물이고, 역시 시작이나 끝이 없습니다. 그것이 구체화되어 한정된 것이 되면, 처음으로 나타난 상(표상)이 되어서, 어떤 것이 됩니다. 물론, 두 점의 사이의 거리는 공간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의 거리가 방대한 것이거나 극미한 것이거나, 그것은 언제나 공간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와 같은 한정은 모두 인간의 개념작용 속에서 만의 구분입니다. 실제로 공간이란 옛사람들이 유일의 눈에 보이지 않는 미지(지금사람들은 불가지)의 신이라 말하는 것입니다.

 

문) 그러면 시간과 공간은 추상적으로 하나이므로 같은 것입니까?

 

답) 두 개의 추상으로서 그것들은 하나일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계속과 추상적 공간에게만 해당되고, 시간과 공간에는 해당되지 않습니다.

 

문) 공간은 모든 것들의 현현의 객관적인 측면이고, 시간은 그의 주관적인 측면입니다. 실제, 그것은 무한자의 속성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말하자면 무한 자와 동일한 넓음을 가지는 것이기에 속성이라고 말하는 것은 너무 걸맞지 않는 용어일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시간과 공간은 우리들의 지성에서 나온 창조물에 불과하고, 우리들은 시공의 기둥으로서 사물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고 말하는 반론도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답) 그것은 우리들의 친구인, 물질-이상주의자들의 의논에 닮아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들은 현상적 우주에 관해서가 아니라, 원체적 우주에 관해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오컬트 문답서(씨크릿 독트린 참조)에서 다음과 같이 묻고 있습니다. “항상 존재하며, 존재하지 않는 것을 상상할 수 없는 것은 무엇인가?” 그 답은 공간입니다. 왜냐하면, 우주에는 그것에 관해서 생각하는 인간이 아무도 없어도, 그것을 지각하는 눈이 하나도 없어도, 그것을 의식할 수 있는 뇌가 하나도 없어도, 공간은 언제나 있으며 늘 있었고 앞으로도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들어내 버릴 수는 없습니다.

 

문) 그것은 우리들이 공간에 관해서 생각을 얻을 수가 없기 때문이겠지요?

 

답) 공간에 관해서 우리들이 생각하는 일은 이 문제에 아무런 관계가 없습니다. 공간을 제외하고서 무엇이든 생각을 해보십시오. 그렇게 되면, 그와 같은 개념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금방 알 수 있습니다. 다른 것들이 아무 것도 없는 곳에 공간은 있습니다. 우주는 하나의 절대적인 진공이든지 혹은 충만한 플레로마이든지 반드시 존재합니다.

 

문) 근대 철학자들은 공간과 시간은 속성에 불과하고, 우발적인 것들에 불과하다고 결론지어 왔습니다.

 

답) 만약, 그들의 결론이 무지와 환영의 결과가 아니고, 진정 과학의 성과였다면 그들은 바른 것이 됩니다. 붓다도 결론에서, 열반일지라도 하나의 마-야, 즉 환영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주 붓다의 말은 억측에서가 아니고, 지식에 근거한 것이었습니다.

 

문) 그러나, 무한자의 속성이란, 영원의 공간과 계속만인 것입니까?

 

답) 공간과 계속은 영원한 것이니 속성이라고는 말할 수 없습니다. 이러한 것은 무한자의 측면에 불과합니다. 또 만약 무한자라 말하고서 “절대적 원리”를 표시하려고 하는 것이라면, 그것에는 아무런 속성도 있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유한이면서 조건이 붙어있는 것에만, 다른 것들과 어떠한 관계를 가질 수가 있는 것입니다. 지금 말하는 것은 모두가 철학적으로는 잘못된 것입니다.

 

문) 연장(extension)이 없는 물질은 상상 할 수가 없으며, 또 어떤 연장도 반드시 무엇인가의 연장입니다. 보다 높은 세계에서도 그렇지 않겠습니까. 만약 그러하다면 절대공간을 채우고 있는 질료는 무엇이겠습니까? 그 질료는 절대공간과 동일합니까?

 

답) 만약 귀하의 “교육을 받은 지성”에게는 이세상의 물질과 틀린 물질을 상상하는 것이지만, 아마 그 정도의 교육을 받지 못했어도 더 영적인 감각에 민감한 지성이라면 상상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귀하가 그렇게 말한다해서, 우리들의 지상계에는 그러한 정도의 공간의 개념밖에 없다고 말한 것은 아닙니다. 이 지상계에서도 인간 외에 눈에 보이거나 또는 눈에 보이지 않는 창조물 모두에는 다양하고 다른 지성들이 있습니다. 말하자면 주관세계의 높은 존재나 낮은 존재에서부터 객관세계의 동물이나 가장 쓸모 없는 유기물에 이르기까지, 말하자면 “데바에서 코끼리까지, 4대 영에서 개미에 이르기까지” 지성은 다양한 많은 종에 있습니다. 그의 개념구성이나 인식계에 관한 한, 개미는 우리들이 가지고 있는 것처럼 우수한 지성을 가지고 있으며, 더 낳은 것도 있습니다. 우리들이 모두 알고 있는 바와 같이, 개미는 말로서는 표현을 하지 못하지만, 본능을 더 가미해서 아주 높은 추리력을 나타냅니다. 만약, 오컬티즘의 가르침을 믿는다면, 이처럼 이 세상에서도 참으로 많은 그리고 이러한 여러 가지의 의식상태를 발견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들 인간의 의식만이 깊이 있게 생각하고 계산할 수 있는 권리를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만약 우리가 곤충의 의식범위가 어디까지 미치는지 추정할 수가 없다면, 과학에서는 아무 것도 알 수 없는 의식이란 것을 이 세계에서 어떻게 한정 지울 수 있겠습니까?

 

문) 하지만 왜 못합니까? 개미에 관해서 조차도 자연과학은 발견해야 될 것은 모두를 발견 할 수가 있지 않습니까?

 

답) 당신은 그렇게 생각될지 모르지만, 오컬티스트의 입장에서 본다면, 존 루보크 같은 생물학자는 대단한 노력은 했지만, 과학을 그런 식으로 신용해버리는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과학은 그런 문제에 관해서 여러 가지로 추측할 수는 있지만, 그와 같은 추측이 바른 것이라고 결코 확인 할 수는 없습니다. 만약 과학자가 잠깐동안 개미가 되어서 개미처럼 생각을 하고 다시 보통의 의식범위로 뒤돌아 왔을 때, 개미였을 시절의 체험을 생각해낼 수 있다고 하면, 비로소 그의 개미에 관한 흥미 깊은 곤충에 대해 확실한 어떤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그렇지만 지금의 개미의 행동에서 결론을 내고 추측 할 수는 없습니다.

 

문) 그렇다면, 시간과 공간에 관한 개미의 개념은 우리들의 시간과 공간에 관한 개념과는 차이가 있다는 뜻입니까?

 

답) 바로 그것입니다. 시간과 공간에 관해서 개미는 우리들과 같지 않고, 개미 자체의 개념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한 것의 개념은 전혀 다른 별세계의 것들입니다. 우리들은 별세계를 상상하지 못한다고 해서, 그의 존재를 지레 부정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우리들의 부정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세계는 존재해 있고, 개미의 예로서 알 수 있듯이, 우리들의 세계에 비해 몇 단계나 높은 것들도 있고, 또 낮은 것들도 있습니다.

 

문) 이러한 관점에서 동물과 인간의 차이는, 전자는 태어났을 때에 그의 능력이 많거나 적거나 가지고 있으며, 일반적으로는 그 이상 크게 진보하지 못하지만, 인간은 차츰 차츰 배워나가고 향상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중요한 차이 아니겠습니까?

 

답) 그렇습니다. 그러나 왜 그런 차이가 나게 되어 있는가 하는 것을 잘 기억해 두어야 합니다. 그것은 작은 곤충보다 인간의 원질이 하나 더 많아서가 아니고, 인간은 완성된 동물로서 계획적으로 자신의 진보의 선에 따라 나아가며, 충분히 발달한 모나드(monad), 말하자면 자기의식의 매체인 것에 비해, 곤충이나 심지어 고등동물조차도, 상위의 3위의 원질은 완전히 휴지상태에 있기 때문입니다.

 

문) 현현의 최초의 날개짓을 할 때, 시간의 구분을 만들고 인식 해낼 수 있는 의식이나 의식적 존재가 있는 것입니까? 수바로우씨의 “바가바드 기타의 주석”에는 제일로고스에 관해서, 의식과 지성이 있다고 어렴풋이 비치는 것 같은데요?

 

답) 그러나 그는 어느 로고스에 관해서 말하고 있다고 확실히 설명을 하지 않았습니다. 로고스의 일반적인 이야기를 했다고 생각합니다. 비교철학에서는 제1로고스는 미현현이고, 제2는 현현한 로고스입니다. 이쉬바라(Ishwara)는 제2 로고스이고, 나라야나(Nârâyana)는 미현현의 로고스의 상징입니다. 수바 로우씨는 불이일원론자로서 박학한 베단타 학자였으며, 자신의 입장에서의 그것을 설명했습니다. 우리들은 우리들의 입장에서 그것을 설명합니다. 씨크릿 독트린에서는 현현 로고스가 태어나게 하는 것은 “영원의 어머니-아버지”라고 해석되고, 비쉬누 푸라나에서는 일곱의 피부, 또는 일곱의 층, 일곱의 지대에 쌓여있는 세 개의 란(알)이라고 묘사되고 있습니다. 이 황금의 알속에 남성의 브라흐마가 태어납니다. 브라흐마를 헤아리는 식에 의하지만, 실제는 제2가 되는 로고스이고, 제3로고스이기도 합니다. 확실히, 최고의 제1 로고스 즉 어디서든지 있지만 어디에도 없는 점은 아닙니다. 비교의 해석에서는, 마하트(Mahat)는 실제에서는 제3로고스 즉 일곱 줄기의 창조적 광선, 7개의 로고스들의 총합체입니다. 소위 일곱의 창조(Creations)라고 불리는 것 중에서, 마하트는 세 번째의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현현한 객관적 세계 그리고 주관적 세계의 모든 것들의 이상적 계획과 원형을 짜맞춘 조합으로 보편적인 지적 혼이며, 신성한 생각이기 때문입니다. 상카야 철학이나 푸라나의 교의에서, 마하트는 프라다나(,Pradâna)의 최초의 산물이고, 크쉬트라즈나(Kshetrajñâ)에 의하여 생기가 불어넣어지게 된 “영-질료” 입니다. 비교철학에서는 우리들에게 생명을 불어넣어 주는 자아를 크쉬트라즈나라고 말을 합니다.

문) 그것은 말하자면, 우리들의 객관적인 우주의 시초의 현현입니까?

 

답) 그것은 객관우주 안의 시초의 원질(Principle)이며, 인간의 5감이 아닌 신성한 감각에서만 감지되거나 인식되는 것들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알 수 없는 것으로부터 나왔다면, 그것은 세 번째의 것, 즉 마나스 혹은 부디-마나스에 해당하는 것임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문) 그렇다면 첫 번째 로고스는 원안의 최초의 점입니까?

 

답) 원안의 점이란 한계나 제한을 받는 것이 없고, 명칭이나 속성을 가지지 못합니다. 미현현의 제1로고스는 원의 서로 그어진 선과 같이 있는 것입니다. 시초의 선, 혹은 직경은 어머니-아버지입니다. 거기에서 제2의 로고스가 나오고, 그 안에는 제3의 현현하는 말(언어)을 품고 있습니다. 가령, 푸라나 성전에서는 아카샤의 시초의 산물은 음(소리)이고, 이 경우, 음이란 “말”은 미발성의 생각의 표현인 것이고, 그리스인이나 플라톤파나 성 요한이 말하는 현현한 “로고스”입니다. 월슨 박사나 다른 동양학자들은, 아카샤(Akâsa)와 혼동파(Chaos)를 동일시함에 따라, 아카샤에서 음이 생겨난다고 말하는 힌두인의 생각을 어리석다고 생각합니다. 그렇지만, 아카샤와 푸라타나(Pradhâna)는 단지 똑같은 것의 두 가지의 측면에 불과하다는 것과 우리 세계의 신성한 생각인 마하트는 그의 현현한 음 혹은 로고스라는 것을 알았다면, 자신의 생각과 무지에 웃음을 터트렸을 것입니다.

 

문) 다음의 인용문에서는, 시간을 지각하는 의식은 무엇이겠습니까? 시간의 의식은 깨어있는 육체적 의식의 세계에 한정되어 있는 것입니까? 그렇지 않으면 더 높은 세계에도 있는 것입니까? 씨크릿 독트린 p37에 다음과 같이 쓰여져 있습니다. “시간이란 영원의 계속 안을 여행하고 있을 때, 우리들의 의식상태의 연속에 의해 만들어 낸 환영에 불과하다. 또 의식이 존재하지 않는 곳에서는 시간은 존재할 수 없다”

 

답) 여기서는 우리들의 세계의 의식만을 가르친 것이며, 우리들이 절대자라고 말하고 있는 영원의 신성한 의식은 아닌 것입니다. 여기서 말하고 있는 뜻에서의 시간의 의식은 수면 중에서조차 존재하지 않으므로, 하물며, 원질에 있어 절대적인 것 속에서 존재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해변을 때리는 리듬 혹은 파도의 움직임 속에 태양(큰바다)이 시간의 개념을 가졌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절대자는 의식을 가졌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여하튼, 우리들이 가지고 있는 것과 같은 의식은 없습니다. 그것에는 의식이나 욕구나 소망이나 생각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절대적인 생각, 절대적인 욕구, 절대적인 의식, 절대적인 “전(全, all)”이기 때문입니다.

 

문) 그것은 우리들이 유성(有性, Be-ness) 혹은 사트(Sat)라고 말하는 것들입니까?

 

답) 우리들의 비판자들은 유성(가진 성질)이라고 하는 언어를 대단히 비웃지만, 산스크리트어의 사트를 다른 언어(용어)로 번역할 수는 없습니다. 그것은 존재(existence)는 아닙니다. 왜냐하면, “존재”란 것은 현상에서만 해당되는 것이지, 본체에는 해당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라틴어의 존재한다의 어원을 보면 그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ex는 “부터” 혹은 “나오다”를 뜻하고, sistere는 “서다(발)”라고 말하는 뜻이므로, 앞에 없었던 곳에서 사물이 나타나온다는 것입니다. 또 존재라고 말하는 것은, 처음과 끝이 있는 것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그러한 언어는, 영원히 있는 것들, 다른 무엇에서부터 발생한 것이라고 결코 말하지 못하는 것들이므로, 어떻게 맞추어 넣을 수가 있겠습니까?

 

문) 히브리어의 여호와는 “나는 있다(在)”고 하는 말인 것입니까?

 

답) 옛 배화교의 올무지드(Ormuzd)와 아후라-마즈다(Ahura-Mazda)도 그러합니다. 그 의미에서, 모든 신들과 같이 각 인간도 “나는 있어(在) 있는 자”라고 말해서, 자신의 존재를 자만할 수가 있습니다.

 

문) 그렇지만, “유성(有性, Be-ness)”과 “있는 것(to be)”과는 무엇인가 관계가 있을 것입니다.

 

답) 그렇습니다. 그러나, 유성이란 “있는 것”도 아니며, “없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들은 그것을 상상조차 해볼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들의 지성은 유한의 것이고, 우리들의 언어는 마음보다도 더욱 제한된 조건이 붙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일련의 부정에 의한 것만으로 상상을 할 수가 없는 것들을 어떻게 해서 표현 할 수가 있겠습니까?

 

문) 독일인이면, 그것을 “자인(Sein)”라고 말하는 언어로서 좀 쉽게 표현 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다스 자인(das sein)” 은 유성에 꼭 맞는 언어입니다. 유성(Be-ness)은 익숙하지 않은 이상한 언어로 들리는 경우도 있지만, 독일인들에 있어 “das sein”은 대단히 쉽게 알게되는 말과 개념입니다. 그러나, 우리들은 시간과 공간에 존재해 있는 의식에 대하여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답) 그와 같은 의식에는 시작이나 끝이 있는 것이므로 유한입니다. 하지만 “마야”를 위해 자신이 무한이라고 믿어버리는 그러한 의식을 나타내는 언어가 어디에 있습니까? 데바찬에 들어간 자 조차도 시간을 의식하지 못합니다. 데바찬에서는 모두가 현재입니다. 과거는 없습니다. 과거가 있으면 자아는 그것을 생각해내서, 애석해하거나 슬퍼하기 때문입니다. 또 미래가 있으면, 자아는 그의 실현을 구하려고 할 것입니다. 데바찬은 모든 것이 현재의 지복 상태이기 때문에 데바찬에 들어가 있는 자는 시간의 개념이나 감각은 전혀 없는 것이라고 전해집니다. 그에게 있어 모든 것은 생생한 꿈처럼 된 현실입니다.

 

문) 그러나 우리들은 여러 가지 일이 잇따라 일어나면서 생겨나는 의식상태의 연속을 의식해서 반초 동안에 일생의 꿈을 보는 경우도 있습니다.

 

답) 그와 같은 의식은 꿈이 깬 뒤에 있을 뿐이고, 꿈을 꾸고 있는 동안에는 없습니다.

 

문) 꿈을 생각해 내는 것은 그림을 묘사하는 사람에 비유할 수 있지 않을까요? 말하자면 듣는 쪽의 마음의 눈앞에 그림의 전부를 보이게 할 수가 없어서, 그 사람은 그림의 각 부분을 자세한 점까지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답) 그것은 대단히 좋은 묘사인 것 같군요.

 

 

 

런던, 랜스다운 로드 17번지에서의 집회

1889년 1월 17일 의장 Mr. T.B. Harbottle

 

스탠저 I (계속)

 

Sloka (3) 우주 “마인드”는 없었다. 우주 “마인드”를 포함할(그러므로 현현시킬) 아-히(AH-HI, 천상의 존재들)가 없었기 때문이다.

 

문) 이 슬로카에서는 아-히와 떨어져 우주마인드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하는 뜻이 포함되어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주석에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또 프랄라야라고 말하는 긴 세월의 휴식의 밤 동안, 모든 존재물이 사라져 잃어버린 때(뒤), “우주 마인드”는 정신활동이 일어날 수 있는 영원한 가능성의 상태로 되어, 말하자면 추상적 절대 사고로서 존속한다. 마인드는 이 사고가 구체적이고 상대적으로 나타난 것이다. 아-히(디야니-초한(Dhyān-Chohan)들)는 영적 존재들의 집합체이다. . . . . 신성과 우주적인 생각과 의지를 나타내기 위한 매체인 것이다. 그들은 자연계에 그의 “법칙”을 주어, 일을 하게 하는 지적 힘들이기도 하지만, 그들 자신도 더 높은 힘들에 의하여 똑같이 그들에게 부과되어있는 법칙을 따르는 일을 하고 있다. . . . .영적인 존재들의 이러한 위계구조를 통하여 우주 마인드가 활동하는 것이지만, 이것은 국가에서 전쟁 수행 능력의 힘을 나타내는 군대와 같은 것이며. . . . .

 

주석은 아-히 자체는 우주마인드는 아니고, 그의 현현매체에 불과하다는 것을 표시하고 있습니다.

 

답) 이 절에서의 뜻은 대단히 명확하다고 생각합니다. 말하자면 프랄라야 안에는 유한의 분화한 마인드는 없으므로, 꼭 마인드가 아주 없는 것으로 되어 있는 상태입니다. 왜냐하면 마인드를 포함해서 인식하는 것들은 아무 것도 없기 때문입니다. 절대적인 마인드의 개념작용을 받아들여 반영하는 것들은 아무 것도 없으며 그것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절대자이며 불변의 사트(유성) 이외의 모든 것들에는 시작과 끝이 있는 것이므로 반드시 유한이고 조건이 붙여져 있습니다. 따라서 “아-히는 없었다”인 것이되 현현물로서의 우주마인드도 없었던 것입니다. 영원히 존재하는 절대적인 마인드와 아-히 속에의 절대마인드의 반영이나 현현을 구별을 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아-히는 최고계에 있음으로, 만반타라의 시초의 날개짓을 할때는 집단적인 우주의 마인드를 반영합니다. 그 후, 아-히들은 가장 낮은 세계 즉 우리들의 세계에 이르기까지 전부 7세계 중에 모든 낮은 힘의 진화의 일을 시작합니다. 아-히는 아직 원질적으로는 하나 이지만 3중인 최초의 로고스로부터 발산된 원초의 일곱 광선 혹은 로고스입니다.

 

문) 그러면 아-히와 보편적 마인드와는 서로의 보완적 관계로서 필요한 것입니까?

 

답)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우주 마인드 즉 절대적 마인드는 프랄라야에서나 만반타라에서나 항상 있으며 불변하는 것입니다. 아-히는 밑으로 향한 진화, 즉 발산을 시작하는 최고의 디야니 말하자면 로고스들입니다. 우주 마인드의 최초의 방사의 때, 비로소 아-히가 존재해오는 것이므로, 프랄라야 동안 아-히는 전혀 없습니다. 우주 마인드 자체는 결코 분화하는 일이 있을 수 없으나, 거기에서의 방사는 만반타라의 시초의 새벽입니다. 진정한 형이상학적인 관점에서는 절대자는 숨어있는 잠재상태의 마인드인 것입니다. 앞에 말한 디야니들의 집단으로서 분화하는 것들은 우주 마인드의 그림자에 불과한 것입니다.

 

문) 절대적 의식이었던 것이 지금은 더 이상 그렇지 않다는 뜻입니까?

 

답) 그것은 영원한 절대적 의식이었으며, 그의 절대의식은 “만반타라의 새벽”때마다 주기적으로 상대적이 됩니다. 이런 잠재적 의식을 용기 안에서의 일종의 진공이라 생각해 봅시다. 용기를 부숴 버리면 진공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것을 어디서 찾아내면 좋겠습니까? 진공은 사라져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것은 어디든지 있으며, 어디에도 없습니다. 그것은 무엇입니까? 무엇도 아닙니다. 말하자면, 그것은 진공인 것과 동시에 충만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근대 과학의 이해에서는 진공이란 진정으로 어떠한 것입니까? 일종의 근질체입니까? 혹은 다른 것들입니까? 완전진공은 우리들의 상상력이 만들어 낸 것은 아닐까요? 아무 것도 존재하지 않는 추측으로의 공간은 순수한 부정입니까? 진공은 그러한 것임으로, 그의 용기를 부숴 버리기만 하면, 좌우간 우리들의 오감에서는 아무 것도 존재하지 않는 것이 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주마인드는 없었다”고 말하는 절은 매우 바른 것입니다. 우주 마인드를 포함하고 있는 용기가 없었기 때문에 없었던 것입니다.

 

문) 아-히에게 조건을 붙여주는 더 높은 여러 힘들은 무엇입니까?

 

답) 그것은 여러 힘들이라고는 부를 수는 없습니다. 힘 혹은 가능성이라고 말하는 편이 낫겠습니다. 아-히는 주기적인 보편법칙이 현현에 눈을 뜨게 된 것으로써 조건이 붙여집니다. 그의 법칙은 연속적으로 활동적, 그리고 비활동적이 됩니다. 이 법칙에 의하여 아-히는 조건 붙여지고 형성되지만 창조되는 일은 없습니다. “창조되다”라고 말하는 용어를 철학에서 쓰기는 불가능합니다.

 

문) 그러면 아-히에 앞장서는 아-히보다 고급의 힘 혹은 잠재력은 현현을 필요로 하는 법칙입니까?

 

답) 그렇습니다. 주기적 현현을 필요로 합니다. 때가 되면, 법칙은 활동하고, 아-히는 현현의 모양새를 시초의 단에서 나타냅니다.

 

문) 그러나, 그것은 하나의 법률(a law)이 아니라 법칙(the Law)입니까?

 

답) 바로 그렇습니다. 그의 법칙은 절대적이고 유일불이(唯一不二)이므로, 그 법칙은 어떤 속성이 아니라 절대성 그 자체입니다.

 

문) 그러나, 그 법칙은 무엇 때문에 존재하는가를 설명하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문제입니다.

 

답) 그것을 설명하려면, 시초 현현과 지고의 원인부터 거슬러 올라가야 하는 것입니다. 지고의 원인을 막연하게 이해하는 것조차 우리 제한된 지성으로는 아무리 노력해도 지금처럼 제한되어 있는 한 절대자에게 가까이 다가갈 수는 없는 것입니다. 절대자라고 말한 개념은 몇천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것이지만, 우리들의 지금의 지적 단계에서는 단순히 논리적 추측에 불과한 것입니다.

 

문) 이 절에 관해서는 “코즈믹 마인드(cosmic mind)”가 “우주 마인드(Universal mind)”보다는 알맞은 용어가 아니겠습니까?

 

답) 아닙니다. 코즈믹 마인드는 우주의 제3단계에 나타나고, 현현 우주에 한정된 것입니다. 「푸라나」에서는 마하트(Mahat) 즉 마인드 혹은 지성의 “대”(Maha) 원칙은 7개의 창조과정, 즉 7개의 진화단계중의 제3단계에서 처음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코즈믹 마인드는 마하트인 것이며, 말하자면 적극적으로(창조적으로) 일을 하는 신성한 개념 구성입니다. 그러므로 그것은 가능성으로서 존재하는 영원한 우주 마인드의 시간에 있어서 실제적으로 존재해 있는 주기적인 현현에 불과합니다. 엄밀히 말하면, 우주 마인드란, 시공을 넘어선 절대자의 다른 이름에 불과한 것이므로, 코즈믹의 개념구성 즉 코즈믹 마인드는 진화한 것이 아니고, 더욱이 피창조물은 아닌 것입니다. 코스믹 마인드란 영원 불변에서 존재해있는 우주마인드의 하나의 국면에 불과합니다. 나는 반복해서 말하지만, 이 절은 우주적인 개념 구성이 없었던, 말하자면 지각의 대상으로 해서 존재하지 않았던 것을 표시하고 있습니다. 말하자면, 우주마인드는 아직까지 잠재적이어서 단순히 가능성에 불과한 것이었으므로, 우주적 개념구성을 지각 해 낼 수가 있는 마음은 전혀 없었다고 말하는 뜻입니다. 이 뒤의 스탠저에서의 현현의 일에 관해서 말하고 있는 것이므로, 현현의 입장에서만 번역해야 하는 것입니다.

 

문) 우리들은 “코즈믹”이라고 말하는 언어를 현현해 있는 우주와 그의 모든 형체를 가리키는데 사용합니다. 분명히 이 절에서는 이런 일에 대해서 말해주고 있는 것이 아니고, 시초의 절대적 의식 혹은 무의식에 관해서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또 절대적 의식은 우주 마인드에서는 있을 수가 없는 일을 은근히 알리고 있는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우주 마인드는 없었고 표현을 할 수가 없었으니, 그것을 나타낼 표현이 없었던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나타낼 표현이 없었는데도, 우주 마인드는 존재했었다고 논할 수가 있습니다. 이것에 대하여 사트에서와 같이 있었지만 없었다고는 말을 할 수는 없는 걸까요?

 

답) 그것은 해석하는데 있어서는 도움이 되지 못합니다.

 

문) 그것은 없었다고 말하면, 절대자의 안에 없었다고 말하는 뜻이 됩니까?

 

답) 아닙니다. 그저 “없었다”라고 말하는 뜻입니다.

 

문) 확실히 여기서는 구별이 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내가 그것이 “있었다(유)”고 말하면, 사트라고 말하는 개념에 대하여 너무 한쪽 측면에 치우쳐 있는 견해가 되어, 사트는 존재했었다 라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우주 마인드는 없었다”고 말하는 문장은 그것대로 우주 마인드가 현현인 것을 표시한다고 누군가는 말할지 모릅니다. 그렇지만, 마인드는 현현은 아닌 것입니다.

 

답) 개념작용의 움직임으로 해서 마인드는 현현인 것입니다. 그러나 우주 마인드는 그것과 같은 것은 아닌 것입니다. 절대적인 것들이 어떤 조건이 붙여진 상대적인 작용을 행하는 것을 말하지는 못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아-히가 출현하면 똑바로 우주적 개념작용도 있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만반타라 동안에 계속됩니다.

 

문) 여기서 말하는 아-히(천상의 존재)는 우주의 어느 세계의 것들입니까?

답) 제1, 제2, 제3 세계의 것들입니다. 제3세계는 실제에서는 미현현의 객관적에서 반영인 근원적인 현현의 출발점입니다. 피타고라스파가 말하는 모나스(Monas)와 같은 것처럼, 제 1 로고스는 시초의 삼개조를 발산해 침묵과 암흑 속으로 사라져 버리는 것입니다.

 

문) 말하자면, 대우주에 있어서 근원적인 방사에서 나온 세 개의 로고스는 소우주(인간)에 있어서의 아트마와 붓디와 마나스에 상응한다는 것입니까?

 

답) 그렇습니다. 그것들은 상응하지만, 혼돈해서는 안됩니다. 여기서는 진화가 시작될 때의 만반타라의 새벽의 첫 번째 흔들림에 대하여 이야기하고 있으며, 소우주의 인간에 관해는 이야기하고 있지 않습니다.

 

문) 세 개의 로고스는 각각의 세계에서 동시에 발산하는 것입니까 혹은 이전 것에서 차례로 진화하는 것입니까?

 

답) 우주발생론을 고급의 형이상학에서 역학적인 법칙에 맞추는 일은 쉽게 오해를 일으킵니다. 시간과 공간에 맞추어도 안됩니다. 우리들이 알고 있는 것과 같은 공간과 시간은 없었던 때였습니다. 삼개조가 시공, 말하자면 객관적인 우주에 반영하는 것은 훨씬 뒤의 일입니다.

 

문) 아-히(천상의 존재)는 이전의 만반타라에서 인간이었거나 혹은 인간이 되려고 했던 것들입니까?

 

답) 모든 있을 수 있는 생물은 이 만반타라, 또는 다른 만반타라에서 인간이었거나, 인간인 것이거나, 또한 인간으로 될 것입니다.

문) 그러면, 이 만반타라에서는 전 생명주기 동안에 같은 높은 존재계도 줄곧 남아 있는 것입니까?

 

답) 당신이 “생명주기”라 말한 것이 15행(항)이나 되는 긴 세월에 걸쳐 있는 기간을 말하고 있다면, 절대로 그대로 남아있지 않다고 답을 합니다. 아-히는 제 3 계에서 비로소 나타내며, 모든 세계를 거쳐가게 됩니다. 모든 다른 하이어라키도 그러합니다. 최고계에서 그들은 아루파인 것이고, (무형이며 체도 없고, 실질도 없고) 단순한 숨입니다. 제2계에서 비로소 루파 즉 형체에 다가서는 것입니다. 제3계에서 궁극에 인간으로 화신하는 마나사-푸트라스(Manasa-putras)가 됩니다. 각계에서는 서로 틀린 명칭으로 불려집니다. 그의 원래의 근일(一)질료는 거침없이 분화를 계속합니다. 우리들은 그것을 질료라고 말하지만, 그것은 우리들이 생각해낼 수가 있는 질료는 아닙니다. 그 후에, 루파는 정묘한 형체로 되는 것입니다.

 

문) 그러하다면, 이 만반타라의 아-히는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답) 이미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훨씬 이전에 혹성적, 태양적, 태음적인 자아가 되어서, 마지막에 육체화신(肉体化身)을 해내는 자아로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씨크릿 독트린에서 말하는 것처럼, 아-히는 “영적 존재의 총합적인 집단”입니다.

 

문) 그러나 이번의 만반타라에서는 아-히는 인간이 되지 못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만.

 

답) 그렇게 말하는 것은, 무형의 아-히로서는 인간이 되는 일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자신의 변형으로서 인간이 되는 일은 있습니다. 만반타라를 혼동해서는 안됩니다. 15행의 년수(年數)의 “만반타라”라고 말하는 주기는 태양계에 해당하지만, 객관적 우주 말하자면 어머니-아버지에 관계되는 만반타라도 있고, 조그만 만반타라가 많이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말한다면 전자의 것에 관계하는 구절을 선택해서, 후자의 것에 관한 구절은 약간만 쓴 것입니다. 많은 구절은 알아차리기가 어려워서 빼버린 것입니다.

 

문) 그러면, 하나의 만반타라의 인간들은 다음의 만반타라에 깨어나면, 아-히단계에 상응하는 단계를 거쳐야 한다는 이치입니까?

 

답) 얼마의 만반타라들은 뱀의 꼬리가 입안에 있는 것과 같습니다. 이 상징을 잘 음미해서 생각해 보십시오.

 

문) 인간은 자신이 생각하는 일을 선택할 수가 있습니다. 아-히의 경우에서도 똑같이 할 수가 있습니까?

 

답) 할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에게는 자유의지가 있지만, 아-히에게는 자유의지가 전혀 없습니다. 아-히는 자극이 주어지면 활동해야만 하는 법칙하에 있기 때문에 동시에 활동할 수밖에 없습니다. 지성과 의식을 모두 가지고 있는 인간에게만 자유의지가 있는 것입니다. 지성과 의식의 움직임에서, 인간은 자신의 안의 것이나 바깥 것에서 인식을 합니다. 아-히는 인간이 아니고, 힘들인 것입니다.

 

문) 그렇지만, 아-히들은 의식적으로 일을 하고 있는 것들이 아닌가요?

 

답) 우주의 의식 안에 움직이고 있다는 의미로서는 의식적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제 3계에서의 마나사-푸트라(Manasa-Putra)의 의식은 보다 더 높은 세계의 의식과는 판이하게 틀립니다. 제3계에 이르게 되면 아․히는 사고자가 됩니다. 거기에, 근대과학과 틀리는 오컬티즘에서는 물질의 각 원자가 한차례 분화해 버리면, 그의 독특한 의식을 띄우는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인간 혹은 동물의 몸의 체의 각 세포는 그의 독특한 식별력과 본능과, 상대적으로 말한다면 “지력”을 지니고 있습니다.

 

문) 아-히는 지복을 경험하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까?

 

답) 어떻게 아-히가 지복 또 비지복을 경험 할 수가 있겠습니까? 고통을 알게 되어야 비로소 지복을 알게 되는 것이고, 지복은 진정한 지복이 되는 것입니다.

 

문) 그러나, 행복과 지복은 틀린 것입니다.

 

답) 설령 틀리는 것이 있어 고통이라고 말하는 대조적인 경험이 없다면 행복이나 지복도 있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문) 그렇지만, 지복이란 절대자의 상태를 말하는 것으로 생각해 왔습니다.

 

답) 그것은 더욱 더 비논리적입니다. 어떻게 절대자가 무엇을 느낀다고 말할 수가 있겠습니까? 절대자에게는 조건이나 속성이란 것이 있을 수가 없습니다. 유한으로 되어 분화해 버린 것에서만이 무언가를 느끼기도 하고 무엇의 속성을 가지고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문) 지(知)란 것이 그와 같이 복잡한 것이어서 아-히는 의식적인 지적 존재라고는 말할 수 없는 것입니까?

 

답) 지(知)라고 말하는 용어에 문제가 있을는지 모릅니다만, 서구의 언어가 빈곤해서 그렇게 밖에 말할 수가 없습니다.

 

문) 한 언어의 지(intelligence)보다도, 좀 더 긴 문구가 그의 개념을 좀 더 정확하게 표현할는지 모르겠습니다. “지” 라고 말하는 언어는 몇 개의 힘의 작용과 반작용이라고 말하는 복잡한 움직임의 뜻을 포함하지만, 아-히란 통일체로 된 힘을 나타낸 것 같은 것입니다. 현현하는 힘의 실체라고 말하는 언어는 보다 더 그의 개념을 잘 표현하는 것 같습니다.

 

답) 혹은, 아마 아-히라고 말하는 개념을 하나의 불꽃, 즉 통일체라고 생각하면 좋을 것입니다. 그의 불꽃의 광선은 복잡하기 때문에 각 광선을 각기 직선으로 작용하는 것입니다.

 

문) 그러나, 보다 낮은 형태 안으로 받아드려지면, 비로소 그와 같은 광선은 복잡하게 되어갑니다.

 

답) 바로 그러한 것입니다. 광선은 아-히라고 말하는 불꽃에서 튕겨져 나와서 물질에 깊숙이 빠져들면 들수록, 더욱 분화해 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최후에, 잡다한 사람이나 정을 가지고 살아가는 이승에 이르게 되면, 광선은 정말로 아주 복잡한 것이 됩니다.

 

문) 원소의 에센스로서의 아-히는 통일체입니까? 통일체라고 생각해도 좋습니까?

 

답) 그렇게 생각해도 좋지만, 엄밀하게 말한다면, 아-히는 통일체에서 나오는 것들이고, 그의 통일체는 7광선의 첫 번째 것들입니다.

 

문) 그렇다면, 통일의 반영이라고 말해도 좋습니까?

 

답) 프리즘에서의 여러 광선의 기본적인 뿌리는 한줄기의 백광선이지 않습니까? 한줄기 광선은 셋이 되고, 그 셋은 일곱이 되고, 그리고 그 일곱 개의 기본광선은 무한으로 분화해 갑니다. 아-히의 소위 의식으로 되돌아오면, 그의 의식을 인간의 지각의 표준으로서는 판단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것은 전혀 다른 세계에서 존재해 있는 것입니다.

 

문) “수면 중에는 마인드는 물질계에 없다”라고 말하는 것은, 다른 세계에서 활동하고 있다는 이치입니까? 깨어있는 상태의 마인드와 육체의 수면 중의 마인드를 분별해내는 특성의 정의 같은 것이 있는 것입니까?

 

답) 물론 있지요, 그러나, 그것에 관해 논하는 것은 지금의 문제와는 관계가 없으며,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고급 마인드가 이성적으로 일하는 것은 잠을 자고 있지만, 본능적인 마인드는 완전히 깨어나 있는 경우가 때때로 있다고 말해두면 충분한 것입니다. 그것은 대뇌와 소뇌와의 생리적인 구별입니다. 하나는 잠자고 있지만 다른 것은 깨어 있습니다.

 

문) 본능적 마인드란 어떤 의미입니까?

 

답) 본능적 마인드는 소뇌를 통해 일을 하고 있는 것으로, 동물의 마인드는 그러합니다. 인간의 경우, 수면 중에는 대뇌의 기능은 멈추어 있고, 소뇌는 수면자를 아스트럴계에 가게 합니다. 당신들의 대다수가 현실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깨어있는 상태를, 우리들은 환영의 세계라고 말하고 있지만, 아스트럴계란 그것보다 더 현실성이 없는 계입니다. 왜냐하면 아스트럴계는 선과 악을 무차별하게 반영하여 대단히 혼돈 되어 있는 상태이기 때문입니다.

 

문) 깨어있는 상태의 마인드의 기본적인 조건은 공간과 시간입니다. 육체의 수면 중, 마나스(자아)에는 공간과 시간이 존재하고 있습니까?

 

답) 우리들이 알고 있는 것 같은 공간과 시간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당신이 고급 마나스와 저급마나스 중 어느 편을 가리키고(치우쳐)있는 것인가에 따라 달라질 것입니다. 시공에 있어서 환영의 영향을 받게 되는 것은 저급마나스 뿐입니다. 예로서 꿈을 꾸는 자는 2, 3초의 동안에 일생동안에 생겨날 일을 경험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한편, 고급마나스(자아)의 인식이나 이해에 있어서는 공간이나 시간이 없습니다.

 

문) 마나스는 붓디의 매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만, 우주 마인드는 마하 붓디라고 말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우주적인 뜻에서의 마나스와 붓디와 인간에게 나타나는 마나스와 붓디와의 구별은 어디에 있는 것입니까?

 

답) 영적 혼 알라야(Alaya)에서 발해온 우주적인 붓디는 붓디가 프라크리티에 해당됐을 때만이 마하트의 매체입니다. 이 경우에, 마하 붓디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이 붓디는 7계로 내려오면서 분화 하지만, 인간 속에 있는 붓디는 아트마의 매체이며, 아카샤의 최고계의 에센스로 되어 있으므로 분화하지 않습니다. 인간에게 있어서의 마나스와 붓디 차이는 우주에 있어서는 마나사-푸트라와 아-히의 차이와 비슷한 것입니다.

 

문) 마나스는 마인드이지만 붓디는 이승에서는 마인드를 갖지 못하는 것처럼, 아-히도 개인적인 마인드를 갖지 못한다고 말했습니다. 마인드가 없는 의식이 있을 수 있습니까?

 

답) 이 물질계에서는 있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다른 높은 세계에서는 있을 수 없다고 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가령, 우주마인드가 있다고 하면, 보다 높은 세계에 있어 마인드의 매체인 뇌나 뇌의 능력인 의식은, 이승에서의 뇌와 의식과는 판이하게 다른 조직을 가지고 있는 것이어야 할 것입니다. 고급세계의 것들은 절대적인 전(全)에 훨씬 가까이 가있고, 따라서 이승의 질료보다 더 높은 동질도의 질료 안에 나타내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그의 질료는 특수한 것들이고, 우리들 육체인간의 지각을 완전히 넘어선 초인적인 것입니다. 원초적 분화라고 말하는 인식해낼 수가 없는 상태로서 그것을 부르고 또한 상상해 보아야합니다. 그의 고급세계에 있어서, 현현기 동안의 위대한 이지원칙인 마하트는 두뇌로서 일을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한 두뇌를 통해 영원한 우주마인드는 아-히를 발사합니다. 아-히는 그의 결과로서 나타난 의식과 개념구성입니다. 이 원소의 삼각형의 그림자는 낮은 세계를 통해서 더욱 더 낮은 곳에 내려오는 동안, 각 단계마다 한층 더 물질적으로 되어 갑니다.

문) 말하자면, 의식은 객관적인 현현을 인식하게 해주는 세계가 된다는 뜻이 아니겠습니까?

 

답) 그렇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는 의식이라는 큰 문제에 직면하게 되며, 유물론과 싸워야만 합니다. 의식은 무엇이겠습니까? 근대과학에 의하면, 의식은 의지와 같은 마인드의 기능의 하나입니다. 우리들은 그것에 긍정하지만, 의식은 본질적으로는 사물은 아니므로 적어도 현현기 동안의 그 기능에 있어서, 마인드는 하나의 확실한 실재(entity)라고 덧붙일 수 있습니다. 그것은 동양의 모든 유심론자의 의견입니다.

 

문) 하지만, 오늘날 마인드는 하나의 실재라고 말하는 것이 상식입니다.

 

답)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인드라고 하는 용어는 “혼” 과 완전한 동의어인 것입니다. 혼의 존재를 부정하는 자들을 물론 두뇌와 따로 떨어져 있는 의식이란 것을 부정하고, 죽을 때는 의식이 없어진다고 주장할 것입니다. 오컬티스트들은 그것에 대해서, 의식은 사후에도 존재하고 있으며, 그때에 비로소 이승에서의 속박에서 벗어나므로 자아의 진정한 의식과 자유가 겨우 시작하는 것이라고 단언합니다.

 

문) 아마, 전자의 의견은 “의식”이라 말하는 용어를 인식의 기능이라 말하는 뜻으로 한정해 버리는데서 나오게 된데 기인할 것입니다.

 

답) 정말로 그렇다고 한다면, 오컬티즘은 그러한 의견을 수용할 수 없으며 아주 반대합니다.

 

Sloka (4) 지복(모크샤(Moksha) 혹은 니르바나)에 이르는 7개의 길(道)은 없었다. 불행의 대원인(大原因: 니다나Nidāna와 마야)은 없었다. 그 원인을 생기게 하고, 그 원인에 속박되는 것은 하나도 없었던 것이다.

 

문) 지복에 이루는 일곱 가지의 길이란 무엇입니까?

 

답) 학도가 오컬티즘을 더욱 깊이 공부하게 되면 알 수 있게 되는 능력인 것입니다.

 

문) 소승불교의 사제란 것은 에드윈 아놀드가 「아세아의 빛」이란 잡지에서 말하고 있는 고집멸도와 같은 것입니까?

 

답) 그것은 모두가 신학적이고 현교적인 것이며, 불교의 어느 종파의 경전에도 있는 것입니다. 지금 말한 것은, 아마 스리랑카 혹은 남방불교에서 나온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러나, 아리야상가파에서는 이것을 아주 자세히 취급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경우에도 “사제”는 일반의 불승과 진정한 신비가 사이에서는 전혀 틀린 뜻이 됩니다.

 

문) 불행의 대 원인인 니다나와 마야는 절대자의 국면인 것입니까?

 

답) 니다나란 인과의 연속이라는 뜻입니다. 십이인연(니다나)이란, 카르마의 법칙 중에서 가장 엄한 반응 혹은 결과를 일으키는 주된 원인을 열거한 것입니다. 마야란 것은 단순한 환영인 것이어서 니다나와 마야라고 하는 언어의 사이에 필연적인 관계는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러나 우주 그것들을 마야 혹은 환영이라고 생각하게 되면, 우주의 안에 도덕적인 동인으로 해 니다나는 물론 마야의 안에 포함됩니다. 니다나를 불러 생겨나게 하는 것은 마야 즉 환영 혹은 무지에서입니다. 한번 원인이 생겨나면, 결과는 카르마의 법칙대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한가지 예를 들어봅시다.

우리들은 모두가 자신이 독립된 개체(Units)라고 생각하지만, 본질에 있어 우리들은 불가분(나누어져, 떨어져)의 한 개체인 것이고, 대 존재의 큰바다 속의 한 방울인 것이며, 다른 한 방울과 구별되어질 수는 없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자신을 독립된 개체라고 생각해서 원인을 만들면, 인생의 모든 부조화가 곧바로 생겨나 영향을 미칩니다. 그러나 실제로 부조화로 보이는 것은, 조화를 되살려서 균형을 유지하는 대자연의 노력입니다. 이러한 분리감은 모든 악의 뿌리인 것입니다.

 

문) 아마, 마야와 니다나를 구별해서, 마야가 절대자의 측면인가를 설명하는 편이 좋지 않겠습니까?

 

답) 설명하기 어려운 문제인데, 마야는 분화의 원인이며 측면이므로, 절대자에게는 현현은 있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저 절대자의 반영, 절대자에 의한 것이 아니고, 절대자로부터 주기적으로 방사되던 그림자가 있을 뿐입니다.

 

문) 그렇지만, 마야는 현현 혹은 분화의 원인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답) 그것이 어떻다는 것입니까? 확실히 말하지만 마야가 없다면 분화는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절대자의 국면이라고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것은 그저 현현 우주와 똑같이 옛 현현우주와 함께 줄곧 존재해온, 순수한 동질성의 이질적 분화에 불과한 것입니다.

 

문) 그러면 유추에 따라, 분화가 없다면 마야도 없는 것이다 라는 이치가 됩니까? 그러나 우리들은 지금 우주의 원인으로서의 마야에 대하여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인데, 다시 한번, 분화를 넘어선 단계를 생각해 보면, “마야는 어디에 있는 것일까?”라고 자문하게 됩니다.

 

답) 마야는 어디에서나 있고, 시작과 끝이 있는 모든 것들의 안에 있는 것입니다. 모든 것들은 “영원한 것들”의 측면이지만, 그러한 뜻에서 물론 마야 자체나 만반타라에서나 마하프랄라야에서는 영원히 우주에 실재하는 사트(유일의 실재)의 국면입니다. 그러나 절대자에 비하면, 니르바나(열반)에서 조차도, 마야에 불과하다고 말했던 것을 잊어버리지 않도록 하십시오.

 

문) 그것으로 마야는 있을 수 있는 모든 현현의 집합명사라고 말하는 이치입니까?

 

답) 그것은 이 용어의 설명으로는 되지 않습니다. 마야란 자신이 영원무한의 사트(Sat, 유일의 실재) 혹은 “유성(有性, Be-ness)”과는 별개의 독립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각 자아의 인식력입니다. 현교 철학과 푸라나(the Purânas)에서는 마야가 창조신의 활동적인 의지의 인격화인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창조신 자신도 일종의 인격화된 마야인 것이고, 인간의 지각은 환(幻)에 불과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그의 사색의 시작에서부터 순수한 추상을 인격화하기 때문입니다. 정통파 힌두교도가 생각하는 마야는 베단타파의 유심론자나 오컬티스트가 알고 있는 마야와는 판이하게 다른 것입니다. 질료 혹은 분화한 것은 무엇이거나, 그것이 실재한다고 말하는 신념이야말로 마야 즉 사람을 속이는 영향력이라고, 베단타 철학은 단언합니다. 바가바타 프라나에서는 마야와 프라크리티 말하자면 현현한 자연과 질료는 같은 것이라고 말합니다. 칸트나 스코펜하우어 그리고 다른 서구의 진보적인 철학자들도 똑같은 주장을 하지 않습니까? 물론, 그들이 동양사상, 특히 불교에서 그것에 관해 생각을 얻어냈지만, 하여튼 일반론적으로 구미의 철학자는 이 우주의 비현실성이라고 말하는 문제를 대체로 바르게 보게 되었습니다. 두 사람이 동시에 사물들을 바라볼 수는 있지만 정확히 똑같은 방법으로 볼 수는 없으며, 모두가 자신의 입장에서만 보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모든 사람들은 어쨌든 간에 환영의 테두리 안에서 움직이며 일을 합니다 특히 자신은 개인(개체)이면서 다른 것과는 별개의 존재인 것이고, 자신의 자아(ego)는 영원 (혹은 적어도 일곱 개의 영원)동안 존속한다고 말하는 최대의 환의 영향 아래에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들 자신 뿐 아니라, 눈에 보이는 우주와 보이지 않는 우주 모두는 영원히 있었고, 있으며, 있을 “무시무종”의 유일의 전(全)의 일시적인 부분에 불과한 것입니다.

 

문) 그의 용어는 분화의 복잡한 점을 잘 짜 맞추어 주는 것 같습니다. 즉, 개체는 각각 분화를 하지만, 마야는 모든 개체의 집합체를 지칭하고 있다고 생각됩니다. 그러나, 여기서 이차적인 문제에 관해 질문하고자 합니다.

대뇌와 소뇌에 관한 앞서의 의논에 관에서인데, 소뇌는 본능의 기관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동물에는 본능적인 마인드가 있다고 생각되는데, 소뇌는 동물적인 생명의 기관에 불과하고, 육체의 기능만이 통제한다고 말합니다. 한편 감각적인 마인드는 오감의 인상을 받는 마인드이고, 지성이나 본능을 필요로 하는 사고나 개념작용 등은 그와 같은 기능을 지배하는 뇌의 일부, 즉 대뇌밖에 없습니다.

 

답) 그것은 그럴지 모르지만, 소뇌는 본능적인 동물기능의 기관입니다. 그들의 기능은 꿈에 반영되어 꿈을 만들어 내지만, 그러한 꿈은 혼돈 되어 있고 일관성이 없습니다. 한편 일련의 생겨난 일이 보이고 확실하게 기억이 되는 꿈은 고급자아의 시력에 의한 것입니다.

 

문) 소뇌는 습관성의 기관이라고 말할 수가 있습니까?

 

답) 본능적인 것임으로, 그와 같이 말해도 좋다고 생각합니다.

 

문) 그러나, 습관성이 우리들이 현재라고 부르는 것에 의하는 것이라면, 본능은 과거에 의한 것입니다.

 

답) 그의 명칭이 무엇이었거나 앞에서 말한 것처럼, 대뇌가 아닌 소뇌만이 수면 중에 작용합니다. 깨어났을 때는 우리들이 경험하는 꿈이나 발산이나, 본능적인 감정은 그와 같은 작용의 결과인 것입니다.

 

문) 꿈의 일관성은, 아주 감각을 통합하는 기능을 가져다주는 것입니다. 그러나 대뇌도 작용할 것입니다. 그의 증거로서 우리들이 반수반각의 상태에 가까울수록 우리들의 꿈은 선명해 집니다.

 

답) 깨어났을 때에는 바로 그렇습니다. 하지만 그 전에는 대뇌는 일하지 않습니다. 소뇌의 이런 상태를, 낮 동안에 뜨거워(열이) 있다가, 밤에는 열이 발산하는 금속의 봉에 비유할 수가 있습니다. 말하자면, 밤 동안의 뇌의 에너지는 무의식적으로 발산합니다.

 

문) 그렇지만, 뇌는 수면 중에 인상을 받아 넣지 못한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음 때문에 깨어난 사람은 자신이 꾼 꿈의 음에서 받은 인상을 거슬러 올라가는 것이 되는 경우가 때때로 있습니다. 이 사실은 수면 중에 뇌 활동을 결정적으로 증명하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답) 물론 그와 같은 기계적 활동이 있습니다. 그와 같은 때에, 꿈의 상태에 대해서 인식이 조금 있었다면, 기억력은 일을 해 꿈을 개조할 수가 있습니다. 꿈에 관한 의론에서는, 깨어나는 상태로 옮겨져 가는 꿈의 상태는 남아있는 불이라고 말을 합니다. 그의 비유로 한 걸음 더 나아가면, 기억이 일하는 것은 남아있는 불을 다시 타오르게 하는 공기의 흐름과 같은 모양입니다. 말하자면, 소뇌의 작용은 식별이하로 되어 있는 모습이 사라지게 될 때, 깨어나는 상태의 의식에 의한 활동으로 되살려 일으키는 것입니다.

 

문) 그러면, 소뇌의 일하는 움직임이 없어지는 일이 있습니까?

 

답) 없습니다. 그러나, 대뇌의 기능 속에서 사라집니다.

 

문) 바꾸어 말한다면, 소뇌에서의 자극은 깨어나 있는 의식의 식역 아래 있습니다. 의식의 장(장소)은 완전히 대뇌가 차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수면에서 깨어나기까지 그대로 계속되지만, 수면에 들어가서는 소뇌부터의 자극이 의식의 잠을 만들어 낸다. 따라서 의식이 머무는 것이 대뇌뿐이라는 것은 바른 것이 못됩니다.

 

답) 그렇습니다. 대뇌의 기능은 생각을 갈고 닦아, 완성케 하고, 조정을 하는 것이지만, 한편으로 소뇌의 의식적인 욕망을 발생케 하고 다른 기능을 담당합니다.

 

문) 명백히 의식에 관한 우리들의 개념을 확대해야 하겠습니다. 예로서 민감한 식물이 의식을 갖지 못할 이유는 아무 것도 없습니다. 듀 프렐(Du Prel)은 그의 저서 「신비철학」에서 일종의 국부적인 의식, 아마 일종의 반사적인 연결일지도 모르는 것을 표시한 불가사의한 실험에 대해 보여주고 있습니다. 또 그는 더 나아가서 명치를 지각할 수 있는 투시가들의 경우와 같이, 식역은 우리들이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것보다 위아래 방향 모두로 훨씬 넓게 퍼져갈 수 있다는 것을 충분히 확증된 많은 실례를 들어서 증명하고 있습니다.

 

답) 듀 프렐의 실험은 기쁜 일입니다. 그것들은 오컬티즘의 가르침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 헉슬리 교수의 이론에 대하여 좋은 교정수단이 되기 때문입니다.

 

 

III

 

런던, 랜스다운 로드 17번지에서의 집회

1889년 1월 24일 의장 Mr. T.B. Harbottle

 

스탠저 I (계속)

 

Sloka (5) 암흑만이 무궁한(無窮限) 일절(一切)을 채우고 있었다. 아버지와 어머니와 자식은 아직까지 일체를 이루고 있었기 때문이다. 자식은 새로운 차륜(車輪)과 그 차를 타고 자신의 순례를 하기 위해 깨어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문) 이 암흑은 슬로카(1)에서의 공간이라 말하는 “영원의 어버이”들과 같은 것입니까?

 

답) 전혀 틀린 것입니다. 여기에서의 끝없는 “무궁한 일절”은 “어버이 공간”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우주적인 공간은 적어도, 이미 잠재적인 속성을 가지는 것입니다. 한편 여기서 말하는 “암흑”에는 속성이 있다고는 결코 말할 수가 없습니다. 이것은 우주적 공간을 채우는 “알 수가 없는 원리”입니다.

 

문) 그렇다면, 암흑이란 광(光)의 반대의 극이라는 뜻에서 말하고 있는 것입니까?

 

답) 그렇습니다. 말하자면 현현하지 않는 알 수 없는 것들은, 현현한 것들, 즉 사색의 대조가 될 수 있는 것들의 반대쪽 극이 된다고 말하는 뜻입니다.

 

문) 암흑은 광(光)에 반하는 것이 아니고, 분화에 대입해 있는 것입니까? 혹은 암흑은 부정성의 상징이라고 하는 편이 더 낳을까요?

 

답) 여기서 말하는 “암흑”은 광(光)에서도 분화에서도 대입된다고 생각되는 것입니다. 광이나 분화나 활동의 주기인 만반타라의 진화의 실제의 결과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창세기에서 말하는 “연못의 표면에 있는 어두움(암)”입니다. 여기서는 깊은 연못(심연)이라 말하는 것은 “어두움의 아버지의 빛나는 자식”이고, 어두움의 아버지란 공간입니다.

 

문) 이 경우, 광(光)은 없는 것입니까? 혹은 현현하는 것들은 아무 것도 없고, 대조를 인식하는 것들은 아무 것도 없는 것입니까?

 

답) 양편 모두가 바른 것이 됩니다. 객관적으로, 광이나 암흑이나 환(幻) 즉 마야입니다. 이 경우에 암흑은 광이 없는 것도 아니고, 유일의 불가해한 근원적 원리입니다. 그것은 절대성 자체이므로, 우리들의 지각에 있어서의 형이나 색이나 실질성이나 언어로서 표현 할 수가 있는 어떠한 것도 거기에는 없습니다.

 

문) 광(光)은 언제 그 암흑에서 나오는 것입니까?

 

답) 암흑에 이어서, 시초의 현현의 때에.

 

문) 광(光)은 시초의 현현입니까?

 

답) 분화는 이미 시작하고 있고, 진화의 제3단계에서만이 시초입니다. 철학에서는 “광(光)”이라는 언어를 두 가지의 뜻으로 씁니다. 하나는 알 수 없는 암흑의 품에서 늘 잠재해 있는 영원이며, 절대적인 광입니다. 그 광은 알 수가 없는 암흑과 함께 영존해 있고, 말하자면 그의 암흑과 일체입니다. 또 하나의 광은 이질성의 현현인 것이고, 암흑의 대조(상대)입니다. 이해력을 얻어내고 비쉬누-푸라나를 읽어보는 사람은, 광의 이 같은 두 가지의 면에 대해 비쉬누에서 확실히 표현되어 있는 것을 알 수가 있을 것입니다. 비쉬누는 브라흐마와 일체인 것과 동시에 브라흐마와는 다른 것입니다. 여기서 비쉬누는 영원의 미지수인 것과 동시에 방정식의 하나 하나의 항인 것입니다. 그는 중성의 브라흐마인 것이고, 본능적으로는 브라흐마의 두개의 근본적인 면 즉 물질과 영(靈)입니다. 영(靈)이란, 추상적인 광(光)입니다. 그러나 베다에서 비쉬누는 그다지 존중되고 있지 않습니다. 남성의 브라흐마는 한번도 등장하지 않습니다.

 

문) “아버지와 어머니와 자식이 다시 일체가 되었다”고 말하는 것은 어떤 뜻입니까?

 

답) 미현현의 “아버지”와 준현현의 꼴인 “어머니”와 우주, 말하자면 우리들의 철학에서 말하는 제3로고스 즉, 이 세 개의 로고스는 주기적으로 일어나는 프랄라야 동안에 다시 하나로 되었다는 뜻입니다. 분화했던 에센스는 다시 미분화로 되었습니다. “아버지와 어머니와 자식”이라 말하는 문절은 크리스트교의 아버지와 자식과 성령이란 말의 원형입니다. 초기의 크리스트교와 그노시즘에서 성령은 여성의 “소피아(Sophia)”였습니다. 말하자면, 이 문장은 창조적이고 감수성이 있는 모든 힘들과 우주를 구성하는 그러한 힘들의 결과는 그의 원래의 상태로 돌아가서, 모두가 하나가 되었다는 의미인 것입니다. 마하 프랄라야 동안은 절대자 외에는 아무 것도 없는 것입니다.

 

문) 부와 모와 자식의 여러 가지의 뜻에는 어떤 것이 있습니까? 스탠저의 주석에서는 아버지와 어머니와 자식을 (a)영과 질료와 우주, (b)영과 혼과 체 (c)우주와 혹성연쇄와 인간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만.

 

답) 지금 말한 정의는 완전하고 명확하다고 생각합니다. 추상적인 개념을 인격화시키지 않는 이상, 이 설명에 아무 것도 더 붙일 것이 없습니다.

 

문) 이러한 3개조의 최후의 것들 즉 자식과 우주와 인간과 체라는 개념은 서로간에 상응해 있는 것입니까?

 

답) 물론, 상응합니다.

 

문) 그리고 3개조의 최후의 것들은 모두 그 이전에 두개의 것들에서 생겨난 것입니까? 예로 자식은 아버지와 어머니에게서 태어나고, 인간은 연쇄와 우주에서 생겨나는 등등. 그리고서 최종적으로 프랄라야에서 자식은 그의 어버이와 다시 일체가 되는 것입니까?

 

답) 그의 질문에 답하기 전에 기억해야할 것이 있습니다. 여기서는 소위 창세 이전의 시기에 관해서는 아무런 이야기가 없고, 물질 또한 아직 형을 취하지 못했고, 분화하기 시작할 때만의 것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버지-어머니라고 말하는 합성어는 근원질료, 즉 영-물질이라고 말하는 뜻입니다. 그것이 분화해서, 동질성에서 이질성으로 바꾸어 떨어져나가기 시작하면, 영-물질은 플러스(+)와 마이너스(-)로 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지난날에는 전혀 수동적이었던 것들이, “영(0)상태”(Zerostate) 즉 라야에서부터 활동적인 상태와 수동적인 상태로 되어버립니다. 분화의 결과로 진화가 시작되고, 그후 우주가 생겨나는 것입니다. 바꾸어 말하면, 분화의 결과로 자식이 태어난다고 말하는 것은 자식은 다음에 오는 마하 프랄라야까지는 우주 즉 현현해있는 ‘코스모스’인 것을 말합니다

 

문) 마하 프랄라야라고 말하는 것은 라야에 있어 궁극적인 상태 즉 제로포인트인 아버지와 어머니와 자식의 단계이전의 최초의 상태를 말하는 뜻입니까?

 

답) 「씨크릿 독트린」에서는, 아버지-어머니의 기간 이전의 일은 거의 아무 것도 쓰지 않고 있습니다. 아버지-어머니의 기간이 있다면, 말할 것 없이 라야라고 말하는 상태는 있을 수가 없습니다.

 

문) 말하자면, 아버지와 어머니는 라야 상태 이후의 것입니까?

 

답) 그렇습니다. 개별의 것들이 라야 상태에 있다고 해도, 한번 아버지-어머니로 나타나게되면, 우주는 라야 상태에 있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문) 포하트(Fohat)는 아버지와 어머니와 자식 중 하나에 들어있는 것이지요?

 

답) 포하트는 포괄적인 용어이고, 여러 가지의 뜻으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그는 3개의 로고스들의 광(光)(다이비프라크리티Daiviprakriti)이며, 3개의 로고스들은 제각기 진화의 세 가지의 영적 단계의 인격화된 상징입니다. 포하트는 위에서의 모든 영적인 창조적 개념 구성의 총계인 것이고 아래의, 즉 천과 지(땅)와의 모든 전기 역학적, 창조적인 힘의 총계이기도 합니다. 제1, 제2 로고스에 대하여 커다란 혼란과 오해가 있는 것 같습니다. 제1로고스란 아버지-어머니의 가슴속에 이미 존재하지만, 아직까지는 현현하지 않고 있는 가능성입니다. 제2로고스는 창조자들의 추상적인 집합체인 것이고, 그리스인은 이러한 것을 “데미우르기(Demiurgi)(우주의 건설자)”라고 불렀습니다. 제3로고스는 제2로고스의 분화의 최종적인 결과인 것이고, 우주의 여러 힘의 개별화입니다. 그래서 포하트는 우주 여러 힘의 수령인 것입니다. 왜냐하면 포하트는 제3로고스에서 나오(발)는 일곱 개의 창조적 광선 또는 디야니 초한들의 총합체이기 때문입니다.

 

문) 만반타라 동안에, 자식이 존재하거나 깨어 있는 동안, 아버지-어머니는 독립적으로 존재하고 있는 것입니까? 아니면, 단지 자식의 안에서 나타내 존재하고 있는 것입니까?

 

답) 아버지-어머니, 자식이라고 말하는 용어의 경우, 그 개념들은 인격화되지 않는 것에 주의해야 하겠습니다. 어머니와 아버지는 단순히 원심력과 구심력인 것이고, 그의 결과가 “자식”입니다. 비교철학에서, 아버지나 어머니 어디서든 자식이라 말하는 개념을 빼는 것은 불가능한 것입니다.

 

문)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당연히 다음의 문제가 나옵니다. 말하자면 원심력과 구심력이란, 그러한 것이 만들어 낸 결과로부터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을 생각하는 것이 가능하겠습니까? 원인에 대하여 결과는 언제나 이차적인 것이라고 생각합니다만.

 

답) 그와 같은 개념이 우리들의 상징체계에 해당하거나 또는 지지를 받는 일은 아마 없을 것입니다. 만약 이러한 힘이 정말 존재한다면, 결과가 만들어낸 것이 틀림없습니다. 그리고 만약 결과가 없어진다면, 힘은 그것과 함께 사라져 버릴 것인데, 그렇다면 누가 그것을 알 수 있겠습니까?

 

문) 그러나, 수학적인 목적을 위해 그와 같은 힘은 독립해 있는 실재로서 존재하지 않겠습니까?

 

답) 그것은 다른 문제입니다. 자연과 과학, 현실과 철학적 상징은 커다란 차이가 있습니다. 이와 똑같이, 우리들은 인간을 7가지의 원질로 나누지만, 그것은 인간에게 7가지의 피부나 실재나 혼이 있다고 하는 뜻은 아닙니다. 7개의 본질은 모두 하나의 원질의 측면인 것이고, 그 원질조차도 하나의 무한한 불꽃 혹은 불의 일시적이면서 주기적으로 나타내는 광선에 불과한 것입니다.

 

Sloka (6). 일곱의 장엄한 주(主)들과 일곱의 진리는 존재하는 것을 그만두고 있었다. 우주, 즉 필연의 자식은 있으면서 없는 “그것“에 의해 토해지기 위해, 파라니쉬판나((Paranishpanna) (절대적 완전함, 파라니르바나(Paranirvana), 시초의 능동적 질료)안에 심어들어 버렸다. 아무 것도 없었다.

 

Sloka (7). 존재의 원인은 제거되어 있었다. 이전에 보였던 것들과 지금은 보이지 않는 것들이, 영원한 비존재 즉 유일의 그것(큰숨)안에 휴식하고 있다.

 

문) 만약, “존재의 원인”이 빠져 있었다고 한다면, 어떻게 해서 다시 존재하는 것으로 되는 것입니까? 주석에서는 존재의 주된 원인은 “존재하고 싶다고 하는 욕망”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만, 여기 이 절에는 “필연의 자식”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답) “존재의 원인은 빠져있었다”고 말하는 것은, 이 이전의 만반타라 혹은 브라흐마의 시대를 지칭하고 있습니다. 시간과 공간의 차륜을 영원히 움직여서, 그것 자체가 공간과 시간을 넘어서는 원인은 우리들에게 니다나(Nidânas)라고 부르는 유한의 원인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습니다. 이 절과 주석과는 전혀 모순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문) 모순이 없어도 대비는 확실히 있습니다. 만약 존재의 원인이 없다면, 어떻게 해서 다시 존재하게끔 되었습니까? 그러나 지금 말씀한 답에서 이 문제는 해결됩니다. 왜냐하면 하나의 만반타라는 프랄라야의 안에서 사려져 버렸고, 그 만반타라를 존재하게끔한 원인은 공간과 시간의 제한을 넘어있으므로, 또 하나의 다른 만반타라를 존재시킨다고 말씀했기 때문입니다.

 

답) 바로 그렇습니다. 이 유일한 영원에 따라 “원인 없는” 원인은 불변한 것이고, 유한의 조건 붙여진 존재와 관계하는 어떤 세계에서의 원인과도 아무런 관계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 원인은 결코 유한의 의식이나 욕망은 없습니다. 절대자가 욕망이나 결여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불합리한 것입니다. 시계가 울린다고 해서 시계가 울리고 싶어하는 욕망이 있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문) 그러나 시계는 감기어지는 것이므로, 감는 것이 필요하지 않습니까?

 

답) 우주와 그 원인에 대하여 같은 말을 할 수 있습니다. 절대자는 시계나 시계를 감는 것 모두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유일한 차이는 시계는 시간과 공간 속에서 감겨지지만, 우주와 그 원인은 시공을 넘어서, 즉 영원 속에서 감겨지는 것뿐입니다.

 

문) 그 질문은 실제로 절대자 안에 분화의 원인을 요구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답) 그것은 도리에 맞는 사색의 영역 바깥입니다. 파라브라훔은 원인이 아니며, 파라브라훔에 발산시키거나 창조하도록 할 수 있는 원인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엄밀히 말한다면 파라브라훔은 절대자가 아니라 절대성입니다. 또한 파라브라훔은 원인이 아니라 원인성입니다. 말하자면, 현현하는 모든 것의 원인 안에서, 의지적인 것은 아니지만 추진적인 힘입니다. 이 같은 영원한 원인 없는 원인, 혹은 원인성처럼 무엇인가가 있다고 우리들은 막연하게 생각할 수가 있습니다만, 그것을 정의하는 일은 불가능합니다. 수바로우씨의 「바가바드기타 강연집」에서는, 제1로고스일지라도 파라브라훔을 지각 할 수가 없어, 그의 베일이 되는 물라프라크리티만이 알 수가 있을 정도라고 논리적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들은 파라브라훔의 시초의 근본적인 면이 되는 물라프라크리티에 대해서 확실한 개념이 없으므로, 물라프라크리티(대자연의 프라크리티의 뿌리)로서 로고스에게도 숨겨져 있는 지상의 총계에 관해서 아무 것도 알 수가 없는 것입니다.

 

문) 슬로카7에서 말하는 “이전에 보였던 것들과 지금은 보이지 않는 것들”이란 어떠한 뜻입니까?

 

답) “이전에 보였던 것들”이란 영원 속으로 사라져 없어진 과거의 만반타라의 우주입니다. “지금은 보이지 않는 것들”이란 영원하고, 언제나 존재하며, 늘 볼 수가 없는 신을 말합니다. 우리들은 그 신을 추상적인 공간이라든가 절대적 사트 등, 여러 가지의 이름을 붙여서 말하지만, 실제로 그것에 관해서 아무 것도 모릅니다.

 

Sloka (8). 존재의 유일한 형체만이 끝없는 무한이고, 원인 없이 꿈이 없는 잠속에서 넓게 퍼져 있었다. 그리고, 우주공간 안에서는, “당마”의 “뜨고있는 눈”에 의하여 느껴지는, 편재하는 모든 것에 빠짐없이 생명인 무의식은 맥동치고 있었다.

 

문) “눈”은 절대자로 향해 열린 것입니까? “존재의 형체”와 “편재하는 것들”은 절대자와는 틀리는 것입니까? 혹은 같은 원칙의 여러 가지의 명칭입니까?

 

답) 모두가 같은 것입니다. 단순히 비유적인 표현에 불과합니다. “눈”은 “보는 것”이 아니고, “편재해 있는 것들”을 “느낀다”는 것뿐인 것을 말하고 있는 것에 주의해 주십시오.

 

문) 우리들이 그러한 느낌이 있는 것은 감각, 또는 의식을 받는 것은 이 “눈”을 통해서입니까?

 

답) 물론이지요, 그의 “눈”을 통해서 입니다. 볼 수가 있게 되기 이전에, 당마 즉 “보는 자”가 되기 전에, 그와 같은 “눈”이 있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문) 말하자면 그것은 최고의 영 능력입니까?

 

답) 그렇게 생각해도 좋지만, 스탠저 I에서 말한 단계에서는, 그 눈의 행운을 지닌 주인은 어디에 있었습니까? 인간에게는 아직까지 없었음으로, “편재하는 것들”을 느끼는 당마는 없었습니다.

 

문) 6절에 관한 것인데, 암흑은 광(光)의 원인이라고 말씀하셨는데요?

 

답) 거기에서도 암흑은 비유적인 뜻이라고 이해하는 쪽이 좋습니다. 우리들은 그것에 관해서 아무 것도 모르고 있으므로, 우리들의 지성에 있어서는 확실히 암흑입니다. 앞서 말했지만, 여기서는 분화한 세계에서처럼, 암흑과 광을 정반대의 것으로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암흑은 가장 오해를 일으키지 않는 말이 되므로 사용했습니다. 예로 만약 혼돈이라고 하는 말을 썼다면, 혼돈 되어 있는 질료로 혼동하기 싶습니다.

 

문) 물론, 광(光)이라고 말하는 언어는 물리적인 광이라고 말하는 뜻에서는 결코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답) 그렇습니다. 여기서의 광이란, 동력이 되기 위해 라야 상태에서 깨어나 있는 시초의 잠재력입니다. 그것은 미분화의 질료 안에서 최초의 진동이고, 그 질료가 객관적인 상태, 즉 현현이 시작하는 세계로 던져지는 것입니다.

 

문) 씨크릿 독트린의 후편에서, 광(光)은 암흑에 의하여 눈에 보이게끔 되어서, 그 보다도 오히려 원래의 암흑이 존재해 있어, 광은 그것을 반영하는 것들, 즉 객관적인 세계의 존재의 결과를 얻어낸 것이라 했습니다. 물이 가득 차있는 구(球)에 전기적 광선을 통하게 하면 물 속에 불투명한 입자가 없는 한 그 광선은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입자가 있으면 광은 차츰 보이기 시작합니다. 이것은 바른 유추입니까?

 

답) 대단히 좋은 실례라고 생각합니다.

 

문) 광(光)은 진동의 분화인 것이 아닙니까?

 

답) 과학에서는 그렇게 말합니다. 음도 그러합니다. 그러므로 오감은 어느 정도 서로간에 교환이 이루어진다고 하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예로서 트랜스 상태에 있는 투시가는 자신의 이마나 발바닥에, 또한 진흙탕 속에 들어있는 편지를 읽을 수가 있다는 사실을 당신은 어떻게 설명하겠습니까?

 

문) 또 하나의 감각력에 의한 것이겠지요.

 

답) 그런 것은 아닙니다. 단순히, 시각과 촉각이 서로간에 교환이 이루어져 해내는 것입니다.

 

문) 그러나, 그 감각력은 제6감의 시작이 아닙니까?

 

답) 그것은 방금 올려놓은 예, 말하자면 단순한 시각과 촉각의 교환을 넘어선 것입니다. 그와 같은 투시가는 본적이 없는 것, 또는 쓰여진 일이 없는 편지의 내용을 알아낼 수가 없을 것입니다. 왜냐 그것에는 제6감이 일해주는 것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감각의 교환은 물질계에서의 감각작용인 것이고, 제6감은 보다 높은 세계에서의 감각작용인 것입니다.

 

문) 생리학적으로 판단하자면, 아마 모든 감각력은 궁극적으로는 촉각으로 귀착할 수 있습니다. 촉각은 조정적인 감각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런 결론은, 촉각력이 최초의 근본적인 감각력인 것이고, 다른 감각력은 모두가 거기에서 진화한 것을 표시한 발생학적인 연구에 의합니다. 그럼으로, 다른 감각력은 모두 촉각보다는 특수화되어 분화된 것들입니다.

 

답) 그것은 동양철학의 견해는 아닙니다. 아누기타에서 바라문과 그의 처가 7감에 관해서 이야기했습니다. 트림바크 데랑씨와 막스뮐러 교수의 영어역은 제6, 제7감을 “마인드와 이해력”이라 했습니다만, 이것은 원문의 산스크리트어의 정확한 뜻을 전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힌두인에 의하면, 제1감은 음과의 관계가 있고, 이것은 촉감이라고 말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문) 아마, 촉각이란 것은 감수성 혹은 일종의 감각매체를 표시하고 있는 것인지요?

 

답) 그러나 동양철학에서는 먼저 음의 감각이 나타나고, 그 다음에 시각이 나타납니다. 음은 색으로 변해 바뀌어지기 때문입니다. 투시가에게는 음이 보이고, 각 음조와 전조를 잡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실제로, 보통의 음의 감각, 말하자면 음의 진동을 통해 청각을 사용할 경우보다 더 훨씬 깨끗한 모든 음조와 전조의 차이를 느낄 수가 있는 것입니다.

 

문) 그의 경우, 음은 일종의 리듬적인 움직임으로 인식하게 되는 것입니까?

 

답) 네, 그렇습니다. 그와 같은 진동이 보이는 거리는 들을 수 있는 거리보다 먼 것입니다.

 

문) 만약, 육체적인 청각을 못쓰게 되어, 음의 투시력만으로 인식을 가지게 되었을 때, 그 감각을 투청력으로 바꾸는 것을 할 수 없습니까?

 

답) 하나의 감각력은 어느 선에 이르게 되면, 반드시 다른 감각력과 융합합니다. 따라서 음은 맛으로 바꾸는 것이 가능합니다. 어느 민감한 사람의 입에서 대단히 신맛을 느끼는 음이 있는 반면에 어떤 음는 단맛을 느끼게 합니다. 실제로 상응의 법칙은 감각의 모든 단계에 해당합니다.

 

문) 그러하다면, 후각에도 해당하는 것입니까?

 

답) 당연한 것입니다. 앞에서 이러한 일을 표시한 바 있습니다. 한번 상응 관계를 알게 되면, 5감은 서로간에 교환 할 수 있다고 하는 것을 알게됩니다. 더욱이, 5감은 모두 상당히 강화되거나 변경될 수 있습니다. 베다나 우파니샤드에서 음을 볼 수 있다고 언급한 부분에 대해 이제는 좀 이해가 되리라 생각합니다.

 

문) 「하퍼스 매거진(Haper's Magazine)」의 전월호에는 남방의 섬의 어느 부족에 관한 흥미로운 기사가 있습니다. 그 부족은 사실상 예술과 서로간의 대화, 그리고 이야기하는 습관을 잃어버렸습니다만, 그들은 여전히 서로를 이해하고 서로가 생각하는 것을 명백히 보는 것 같습니다.

 

답) 그와 같은 “진리의 궁전”은 근대사회에서는 적합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뚜렷한 언어로 이야기하게 되기 전인 초기인종들에게는 생각이 객관적인 형태를 취해 서로간에 교류했었다고 합니다. 만약 진정 그러했다면, 인류의 진화의 도상에서 전 인류가 영능자나 투시가였던 때였음이 틀림없을 것입니다.

 

 

IV

 

런던, 랜스다운 로드 17번지에서의 집회

1889년 1월 31일 의장 Mr. T.B. Harbottle

 

스탠저 I (계속)

 

문) 7인의 주(主)등에 관하여 말하고 있는 슬로카 (6)에 관해서 입니다만, 용어의 바른 사용법이 문제가 되는데, 디야니-초한과 혹성영과 건설자들과 디야니-붓다를 구별해 설명해 주십시오?

 

답) 하이어라키의 모든 것을 설명한다고 하면 씨크릿 독트린에 두터운 2권 정도의 책을 덧붙여야 될 것입니다. 그것에 관한 많은 설명은 스탠저와 주석에서 생략된 것입니다. 그러나 짧게 정의해 봅시다. 디야니-초한은 모든 데바 즉 천계의 존재의 총칭입니다. 하나의 혹성영은 하나의 혹성의 지배자이며, 일종의 유한한 인격신입니다. 그러나 신성한 혹성들의 지배자들과 우리의 지구와 같은 조그만 세계들의 “연쇄(chain)"의 지배자들 사이에는 큰 격차가 있습니다. 다른 모든 혹성과 똑같이 지구에는 여섯 개의 눈에 보이지 않는 구체가 있고 네 개의 계층이 있다고 말하지만, 지구와 다른 신성한 혹성과는 아주 중요한 차이가 있습니다. 어떤 반대의 의논이 있다고 해도, 지구는 고대인이 말하는 “7개의 신성한 혹성”안에 포함되는 일은 없습니다. 현교적으로 일반사람에게 알려져 있는 점성학에서는, 지구는 어느 비밀의 혹성의 대 제물이었습니다. 그 혹성은 지금의 천문학에서는 알려져 있지 않지만, 비전을 받은 비전가들에게는 잘 알려진 것이었습니다. 근대 점성학에는 태양과 달을 7개의 신성한 혹성 안에 넣어 헤아리지만 옛날에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태양이 중심이 되는 항성인 것이고, 달은 죽은 혹성이기 때문입니다.

 

문) 지구 연쇄의 6개의 구체 중에는, 신성한 혹성들에 포함되는 것이 있습니까?

 

답) 하나도 없습니다. 신성한 혹성이란, 우리들의 계 위에 맞닿아 있는 모든 혹성들이었습니다. 그 중 일부는 후에 발견된 것들도 있습니다.

 

문) 태양과 달이 그의 대체물인 두 개의 혹성에 관해서 무엇인가 가르쳐 주실 것이 없습니까?

 

답) 근대 천문학자는 그것에 관해서 아무 것도 알지 못하지만, 그에 관한 비밀은 별로 없습니다. 하나는 수성과 태양 사이에 있는 혹성이고, 발견될 것으로 생각해서 미리 “불칸(Vulcan)”이라는 이름을 붙여 두었습니다. 또 하나는 역행적인 운동을 하는 혹성으로, 밤의 어느 시간에 종종 볼 수가 있으며, 달 가까이에 나타나는 것 같습니다. 이 혹성의 오컬트적인 영향력은 달을 통해서 전하여 집니다.

 

문) 그와 같은 혹성이 신성시되거나, 혹은 비밀로 하는 것은 어떤 까닭에서입니까?

 

답) 우리들이 알고 있는 한, 그것들의 오컬트적 영향력 때문입니다.

 

문) 7개의 신성한 혹성에 속하는 혹성영들은 지구의 하이어라키와 차이가 있는 것입니까?

 

답) 명백히 그렇습니다. 지구에 속한 혹성영은 매우 높은 단계는 아니기 때문입니다. 혹성영이란 인간의 영적인 성질과는 아무 관계가 없고, 물질적인 일이나 우주 형성에 관여하는 존재들에 섞여서 일하고 있다고 생각해 두십시오. 우리들 지구의 신들이나 지배자는 우주적(cosmic)인 지배자입니다. 말하자면 그들은 우주의 물질의 형을 만들고 형성시키는 것으로 코스모크레이터스(Cosmocratores, 우주의 지배자들)라고 말합니다. 그들은 영(sprit)과는 전혀 관계가 없습니다. 매우 다른 하이어라키에 속하는 디야니-붓다는 특히 영과 관계가 있습니다.

 

문) 그러면, 그러한 7개의 혹성영은 지구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것입니까?

 

답) 역으로 디야니-붓다가 아닌 이러한 혹성영은 물질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지구와 매우 밀접한 관계에 있습니다. 지구와 인간의 운명을 결정하는 것은 그들입니다. 그들은 카르마를 집행하는 자입니다.

 

문) 그들은 제5본질의 고급 마나스와 어떤 관계가 있습니까?

 

답) 없습니다. 세 개의 상위의 원질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습니다. 그러나, 제4본질과는 어느 정도 관계가 있습니다. 그러면, 지금까지 말해 온 것을 요약해 봅시다. 디야니-초한이란 모든 천상의 존재들에 대한 총칭입니다. 디야니-붓다들은 여기서는 설명할 필요는 없지만 어떤 신비적인 뜻에서, 인간은 상위의 3개조와 관련이 있습니다. 앞에서 설명한 대로 “건설자들”은 코스모크레이터스라고 부릅니다. 그들은 이상적인 계획에 따라 물질에 형을 주는, 눈에 보이지 않는 지적 “석공(Mason)”입니다. 그 계획은 우리들이 신성하고 우주적인 개념작용이라고 부르는 것 안에 이미 준비되어 있습니다. 초기의 메이슨들은 건설자들의 집합체를 “우주의 위대한 건축가”라고 불렀으나, 근대의 메이슨은 그들의 G.A.O.T.U.를 단수의 인격신으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문) 건설자들은 혹성영이기도 합니까?

 

답) 어떤 뜻으로는 혹성영입니다. 지구도 하나의 혹성이지만, 보다 낮은 단계의 것입니다.

 

문) 그들은 지구의 혹성영 밑에서 일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답) 내가 지금 말한 바 있지만, 집합적으로 말한다면 그들 자체는 지구의 혹성영 자체입니다. 건설자들은 하나의 실재 혹은 일종의 인격신이 아닌 하나의 불변의 법칙 아래서 일을 하고 있는 자연의 여러 힘들이라고 이해하면 좋겠습니다. 우리들은 그 법칙의 원질에 관해서, 어떠한 추측을 한다해도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문) 그렇지만, 우리들의 지구의 건설자와 똑같이, 우주의 건설자들이나 태양계의 건설자들도 있지 않겠습니까?

 

답) 물론 있습니다.

 

문) 그렇다면, 지구의 건설자들은 다른 건설자들과 똑같이, 하나의 “혹성영”이지만, 그저 그 의지가 낮은 것뿐이라는 말입니까?

 

답) 네,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문) 낮은 것이라 말하는 것은, 혹성의 크기가 작은 것이기 때문입니까? 아니면 질적으로 떨어진다는 말입니까?

 

답) “질에 의한 것이라고, 우리들은 가르침을 받고 있습니다.” 우리들의 근대적, 특히 신학적인 교만은 고대인들에게는 없었습니다. 신학은 진흙의 한점 티끌도 되지 않는 지구를, 우리에게 알려진 어떠한 행성이나 별들보다도 헤아릴 수 없을 만큼 위대하다고 주장합니다. 만약 비교철학이 목성의 “영”(집합적 복수)은 지구의 영보다 훨씬 훌륭한 것이라고 가르친다면, 그것은 목성이 지구보다도 몇 배 큰 것이기 때문이 아니라, 목성의 질량과 조직이 지구보다도 훨씬 정묘하고 훌륭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질적인 것에 응해서 “혹성적 건설자들”의 각각의 하이어라키는, 우주의식이 준비해둔 개념작용을 반영하거나 그것에 따라 작용하기도 합니다. 우주의식이야 말로 우주의 진정한 대 건축가입니다.

 

문) 우주의식은 세계의 혼 또는 “아니마 문디(Anima Mundi)"와 같은 것입니까?

 

답) 그렇게 말해도 좋습니다. 우주의식은 그들의 하이어라키의 원형이며, 여러 하이어라키는 거기에서 분화한 것입니다. 유일의 무인격인 “우주의 위대한 건축가”는 마하트, 즉 우주 마인드입니다. 마하트란 하나의 상징이고 추상이며, 모두를 물질화 시키는 인간의 개념 속에는 실재적인 형태로 어렴풋이 나타나는 측면입니다.

 

문) 정통파가 생각하는 디야니-붓다와 비교가 생각하고 있는 디야니-붓다와의 진정한 차이는 어떤 것입니까?

 

답) 대단히 큰 차이가 있습니다. 디야니-붓다는 상위의 데바로서 불교에서는 보살이라고 말합니다. 현교에서 디야니-붓다는 다섯이지만, 비교에서는 일곱이며, 그것은 일곱 사람의 개별의 실재가 아니고, 일곱의 하이어라키입니다. 다섯의 디야니-붓다는 이미 왔었고, 나머지 둘은 제6, 제7 인종 때에 온다고 씨크릿 독트린은 말합니다. 현교적으로 말하면, 그들의 대표는 바즈라사트바(금강살주) 즉 “지상의 지성” 또는 “지상의 불타” 이지만, 그것의 너머에 있는 것은 바즈라다라(Vajradhara)입니다. 그것은 파라브라훔이 브라흐마 혹은 마하트를 넘어 있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디야니-붓다의 현교적인 뜻과 비교적인 뜻은 전혀 틀린 것입니다. 현교적으로 말한다면, 각각의 디야니-붓다는 3개조 즉 삼위일체이고, 그의 세 가지의 상은 동시에 세 개의 세계에 나타납니다. 더 설명하면, 지상계에서의 인간불타와 아스트럴 형체의 세계에서의 디야니-붓다와 최고의 니르바나계에서의 아루파, 즉 무형의 불타로 해서 나타납니다. 이러한 디야니들 중 하나가 화신한 인간 붓다는, 다양한 인간의 몸안에서 7년에서 7000년 동안 한정되어 지구에 머무르는데, 그들은 그 동안 인간으로서의 일반적인 조건과 일들과 죽음을 겪어나갑니다. 이에 반해, 비교철학에서는 “일곱 디야니-붓다들”(이는 힌두의 쿠마라들와 같이 불교의 신비주의 사상에서 화신한 상위의 지적존재들과 같은 디야니들의 일곱 하이어라키들이라고 하는 편이 낫다) 중 다섯만이 나타났다고 합니다. 지금까지는 이 다섯만이 정기적으로 계속 화신하여 이 지상계에 나타났습니다. 나머지 둘은 제6, 제7근본인종 때에 오게 될 것입니다. 이것은 다시 완전히 그렇다고 할 수는 없는 반 상징적인 것입니다. 왜냐하면 제6, 제7의 하이어라키는 이미 나머지 하이어라키들과 함께 이미 이 지상계에 화신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제 4근본인종의 초기에 거의 대부분이 소위 말하는“불타의 상태(Buddhaship)”를 이루어냈으므로, 제7라운드가 시작될 때까지 의식적인 자유와 지복 속에서 쉬고 있으며, 제7라운드가 시작되면 붓다들로 구성된 새로운 인종이 되어, 전 인류를 이끌게 될 것이라 말해지고 있습니다. 이러한 디야니들은 단지 인류에만 관계를 가지고 있으며, 엄밀히 말한다면, 단지 인간의 최고의 원질들과만 관계가 있습니다.

 

문) 어느 혹성들이 프랄라야 상태에 들어가면, 그 구체를 맡고 있는 디야니-붓다들과 혹성영들도 프랄라야에 들어가는 것입니까?

 

답) 제 7라운드의 끝머리에서만 들어가고, 라운드와 라운드사이에서는 들어가지 않습니다. 그러한, 소 프랄라야의 동안에 법칙의 일을 하는 것을 지켜보아야만 하기 때문입니다. 「씨크릿 독트린」의 3권에서, 이 문제에 관해서 좀더 자세히 쓰겠습니다. 그러나, 이것들의 차이는 단순한 기능상의 것에 불과합니다. 그러한 것들은 모두 동일한 에센스의 여러 가지 측면인 것입니다.

 

문) 어떤 한 라운드를 지켜보는 책무를 하고 있는 디야니들의 하이어라키는 그의 활동기간 중에, 전 구체의 연쇄를 감시하는 것입니까? 혹은 어느 하나의 구체만 감시하는 것입니까?

 

답) 육체로 화신하는 디야니가 있고 구체를 감시하는 디야니가 있습니다. 전자의 역할에 대해서는 방금 말했습니다. 후자는 다음과 같은 역할을 수행합니다. 디야니의 각 종류 또는 하이어라키는 어느 라운드에 상응합니다. 처음의 가장 낮은 하이어라키는 제1라운드 즉 그다지 발달하지 못한 라운드를 담당하게 됩니다. 두 번째의 하이어라키는 제2라운드에 상응하고, 이와 같이 제7라운드에 이르기까지 계속됩니다. 제 7라운드는 일곱의 디야니 중 최고의 하이어라키의 감시를 받는 것입니다. 마지막에는 디야니들이 지구상에 나타나며, 얼마의 혹성영들도 나타날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때에는 전 인류는 이미 보디사트바(Bodhisattvas)가 되어 있을 것이고, 자신의 “자식들”, 말하자면 자기자신의 영과 에센스의 자식들이 되어서, 자기자신이 되어 있을 것입니다. 디야니는 신성하고, 혹성영은 아스트럴적(Sidereal)입니다. 디야니만이 아누파다카, 즉 “어버이가 없다”라고 말을 합니다. 왜냐하면, 그들의 아버지나 어머니가 되어 있지 않는 미현현의 로고스에서 직접으로 방사했기 때문입니다. 실제 그들은 일곱 로고스들의 영적인 측면입니다. 혹성영은 총합적으로 말하면 7개의 세피로트(위의 3개의 세피로트는 초우주적인 추상인 것이고, 카발라에서는 블라인드(blinds)입니다)이며, 하늘의 인간, 즉 아담 카드몬을 구성하는 것들이다. 불교에서는 디야니란 것은 하나의 총칭이고, 모든 신들을 표시한 약어이다. 그러나, 디야니들은 “신들”이지만, 숭앙해야 할 것은 아닙니다.

 

문) 신들이라면, 숭앙해서 안 되는 것입니까?

 

답) 동양사상은 우주 외의 신성과 인격신의 개념 부정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무신론이라고 말하는 사람에게 나는 다음과 같이 답합니다. 성서에는 “많은 주님들과 많은 신들이 있다.”고 말하는데, 그와 같은 하나의 인격신을 숭앙하는 것은 불합리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만약 숭앙이 바람직하다고 할지라도, 다른 신들 보다 더 제한되고 더 낮은 각각의 많은 신들 가운데서 숭앙할 신을 선택해야 하는데, 말하자면 다신교나 우상숭배를 선택하던가, 또는 유태인이 하는 것처럼, 여러 가지의 신들 중에서 하나의 민족 신을 선발해서, 많은 신들의 존재를 믿으면서, 자신이 선발한 신 외에는 모두 무시하거나 경멸해, 그 신만이 최고의 “신중에서의 신”이라고 여기는 것을 선택해야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도리에 맞지 않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와 같은 신은 무한도 아니고 절대적인 것도 아니므로, 유한의 것이고, 말하자면, 공간과 시간에 의해 조건이 붙어져 있고, 제한 받는 것이 틀림없기 때문입니다. 프랄라야가 오게되면, 그 민족신은 사라져 버리고, 브라흐마와 그 외의 모든 데바나 신들은 절대자에게 흡수되어 버리고 맙니다. 그러므로 오컬티스트는 신들을 숭앙하지도 않고 기원하지도 않습니다. 만약에 그와 같은 행동을 한다면, 우리들은 많은 신들을 숭배하거나 혹은 절대자에게 기원을 하는 것이 됩니다. 그러나 절대자에게 속성은 전혀 없는 것이라, 우리들의 기원을 들을 수 있는 귀가 없습니다. 많은 신들을 숭앙하는 사람이 있다면, 모든 신들에게 별도리 없이 불공평하게 되기 마련일 것입니다. 그 사람이 아무리 많은 신을 숭배해봤자, 모든 신을 각각 숭앙해 간다는 것은 불가능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 중에서 어느 하나의 신을 선택해도, 무지하기 때문에 완전으로부터는 좀 먼 것을 선택하게 될지도 모릅니다. 그러므로 인간은 그와 같은 신들을 숭앙하는 것보다, 모든 인간은 자기 안에 신이 계시다는 것, 말하자면 절대자로부터의 직접적인 광선, 하나인 것에서의 천상의 광선이 각자의 안에 존재한다는 것, 따라서 신은 자기자신의 바깥에서가 아니고, 내부에 존재해 있다고 하는 이치를 깊이 명심해두는 것이 훨씬 좋다는 것입니다.

 

문) 예를 들면 브라흐마(Brahmâ)와 같이, 우리의 구체의 모든 진화를 감시하는 혹성적 하이어라키, 또는 혹성영에 해당하는 어떠한 명칭이 있습니까?

 

답) 그것은 7중이고 하나의 하이어라키이므로, 어떤 카발리스트들에 의해, 그것을 “지구의 영”이라고 부르고 않는 한 일반적인 총칭일 뿐입니다.

 

문) 그러한 무수한 하이어라키를 기억한다는 것은 너무 어렵습니다.

 

답) 화학자가 무수한 화학적인 기호를 기억하는 것은 그다지 대단하지 않습니다. 오걸티즘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인도에서는 3억이 넘는 남신과 여신이 있습니다. 마누들이나 리쉬들도 혹성영입니다. 마누나 리쉬는 인류의 진화를 지켜보기 위해, 인류의 진화초기에 나타나서 인류를 가르치기 위해 지속적으로 지상계에 내려와서 육체화신을 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현교에서 대웅좌에 살고 있다고 말하는 “삽타 리쉬(Sapta Rishis)” 즉 “일곱 리쉬들”도 혹성영입니다.

 

문) 그들은 브라흐마보다 높은 것입니까?

답) 브라흐마를 어떻게 해석하는가에 따르는 것입니다. 비교철학에서는 브라흐마는 7인의 로고스의 총합체입니다. 현교의 신학에서 브라흐마는 비쉬누파에서는 비쉬누의 일면인 것이고, 다른 종파에서는 다른 식으로 생각합니다. 예로, 힌두교의 삼위일체인 트리무르티(Trimurti)에서는 브라흐마는 중요한 창조신이지만, 비쉬누는 보호신이고 쉬바는 파괴신입니다. 카발라에서는 브라흐마는 확실히 아담 카드몬이며, 말하자면 「창세기」1장의 “남성-여성”의 인간입니다. 세피로트가 아담-카드몬에서 나오는 것처럼, 마누는 브라흐마에서 나옵니다. 마누나 세피로트는 상황에 따라, 7이 되기도 하고, 10이 되기도 합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의 설명해주기를 원하는 스탠저의 다음 슬로카로 나가봅시다.

 

Sloka (9). 그러나 우주의 “알라야(Alaya)”(모든 것들의 기초로서의 영혼, 아니마 문디(Anima Mundi))가 "파라마르타"(절대적 비존재와 무의식인 절대적 존재와 절대적 의식)안에 있고, 대차륜(大車輪)이 “아누파다카(Anupadaka)”였을때, “당마”는 어디에 있었던가?

 

문) “알라야”(Alaya)는 부정접두사인 a 와 laya에서 비롯되고있으며, 결코 현현하거나 분해되지 않는다는 뜻입니까?

 

답) 그것이 어원학적인 것에서라면, 나는 확실한 답을 준비하지는 못했지만, 정반대의 뜻이 될 것입니다. 라야야말로 무현현의 것이므로, 알라야가 어느 쪽이냐고 한다면 “결코 무현현이 아닌 것들”이란 뜻입니다. 그 말의 어원학적인 분석이 어떻거나 그것은 단순히 “세계의 혼” 말하자면 아니마 문디입니다. 이것은 이 절의 매우 용어적인 것에 의해 표현되었습니다. 말하자면 알라야는 절대적인 무존재와 무의식인 동시에 절대적인 완성과 절대성 자체인 파라마루타안에 있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렇지만, 이 용어의 해석은 북방불교의 요가차리야파와 중관파 사이의 논쟁의 씨가 됩니다. 중관파의 전통적 학설은 파라마르타(사트야)를 다른 것들에 의존시키고 있고, 상대적인 것으로서, 절대성이라 언어의 배후에 있는 형이상학을 가치 없는 것으로 만들고 있습니다. 요가차리야파는 이 해석을 정면으로 부정합니다.

 

문) 비교철학은 요가차리야 학파와 같은 교의를 가르치지 않습니까?

 

답) 아주 같은 것은 아닙니다.

?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