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씨크릿독트린

2017.03.19 01:51

프로엠(Proem)

조회 수 393 추천 수 0 댓글 0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선사시대로부터 전해져 내려온 문헌

 

필자의 눈앞에 태고적 문헌의 사본이 있다. 이것은 아직까지 알려져 있지 않은 특수한 방법으로 처리되어 불이나 물이나 공기에 상하지 않도록 한 야자수 잎에 적혀 있다.


첫 장에는 흐릿한 검정 색 바탕에 순백색의 원반○이 그려져 있다. 다음 두 번째 장에도 똑같은 ○이 그려져 있지만, 이번에는 가운데 중심에 하나의 점이 찍혀 있다.

 

첫 번째 원반은 영원 안에 우주를 표시한 것이라는 것을 필자는 알고 있다. 이것은 잠들어 있는 에너지가 다시 깨어나기 전, 말하자면 후일에 이르러, 우주 여러 체계에서 말(음.音)이 발산되기 이전의 상태이다. 바꾸어 설명하면, 방사(放射)하기 이전의 우주상태이다. 지금까지 때묻지 않은 원반○의 검정 색 바탕 안의 점 은 휴면기(Plalaya)동안의 공간과 영원 안에서 분화의 시작을 나타내는 기점을 표시한 것이다.

 

이점은 앞으로 우주로서 전개될 "우주의 알(세계의 난(卵), the Mudane Egg)"이 우주가 되어서 일절(一切)이 되고, 무궁하고 주기적인 우주가 만들어지는 알의 씨눈이다. 이 씨눈은 잠재적인 것으로 되기도 하고 또 활동적인 것으로 되기도 해, 번갈아 반복을 거듭한다.

 

원(○)은 삼라만상이 나타났다가 또 모두가 원○안으로 되돌아가는 신성통일을 나타낸다. 이 원주는, 인간의 마인드로서는 한계가 있어 무리하게 한정해 그린 상징인 것이고, 추상적이며 영원히 인식해 낼 수가 없는 실존을 표시해 본 것이며, 원○의 표면은 우주혼을 나타낸 것이다. 그러나 이 두개는 하나(一體)이다.

 

원반의 면만이 희고, 지(地)의 바탕은 검정 색으로 온통 희미한 것은 원반의 평면을 인간(아데프트)이 인식해 낼 수가 있는 정도라는 것을 명백히 표시한 것이다. 현현기 또는 만반타라(Manvantara)라 하는 여러 현상이 시작하는 것은 이 평면 위에서 이루어진다. 휴면기(브라마의 밤)동안은 이 우주혼(절대혼)안이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미래우주의 발생과 신들의 기원계보의 계획이 감추어져 있다. 이 평면은 유일한 생명이고, 영원히 눈에 보이지 않으면서도 편재해 있으며, 시작도 없고 끝도 없다. 그러나 바른 규칙을 가지고 나타내는 주기적인 것이다.

 

현현과 현현 사이의 기간은 비(無)존재의 어둠 속에 감싸여진 신비가 지배하고 있다. 무의식이지만 곧 절대의식이며 실감해 낼 수 없는 것이지만 유일 자존하는 실재인 것이다. 이는 실로 "감각(지각)에 있어서는 혼돈이지만, 이성에 있어서는 우주이다. 이 유일의 절대적인 속성은 그것 자체이며 영원이면서 끝없는 운동이고 비교(秘敎)적 표현으로는 "커다란 숨" 이라 말하고 있다. 그것은 제한이 없으며, 언제나 있는 것인, 공간 속의 우주에서 영속하는 운동이다. 운동이 없는 것은 신일 수 없다. 이것은 기본 진리이다. 우주혼 속에 있는 실재는 절대적으로 운동이 없을 수 없다.

기원전 5세기경, 데모크리토스의 스승 레우기푸스는 다음과 같은 주장을 했다. 공간은 끝이 없는 운동에 의하여 움직여지고 있는 원자로, 영원이란 꽉 매워져 있고, 이와 같은 원자가 모이면 그의 끝없는 움직임은 얼마 후 옆으로 움직이는 운동이 생겨나서, 여러 원자는 서로간의 충돌이 일어나고, 끝내는 돌아가는 회전 움직임이 만들어진다는 것이다. 
에피쿠로스와 루크레티우스 역시 원자의 측면 운동에 친화성(親和性)의 개념이라 하는 오컬트의 가르침을 덧붙었을 뿐 같은 것을 가르친다.


인간은 역사에서 상속이 시작되었을 때부터, 인간이 삶을 영위할 구체에서의 건축가들이 처음 나타났을 때부터 미현현의 신은 철학적인 유일의 면만이 인정되어왔다. 말하자면 신의 우주적 운동으로서, 자연 속에서 창조적 숨결이 진동이라고 생각되고 있었다.

오컬티즘은 "유일의 실재"를 다음과 같이 개괄한다.


신은 신비적으로 살아 있는(또는 움직이고 있는) 불이다. 이 눈에 보이지 않는 실존의 영원한 증인들은 빛과 열과 습기이다. 이 세 가지는 자연계의 모든 현상을 포함하고 있으며 또한 그 원인이기도 하다. 우주 내면의 운동은 영원(무한)한 것이며 정지하는 경우가 없다. 우주운동(눈에 보이는 것, 즉 지각할 수 있는 것)은 유한하며 주기적인 것이다. 우주운동은 영원(무한)의 추상물로서 언제나 존재하는 것들이고, 현현물로 되어 나타날 때에는 반대로 유한이 된다.


이 두 가지는 연속적인 우주재건의 "알파"이고 "오메가"이다. 원체(元體)인 우주는 현상계에서의 인과관계와는 아무런 연관도 없다. 이것은 우주 안에서 혼, 말하자면 변하는 경우가 없는 신의 생각(思考)안에 자리잡고 있는 이상적 우주에 한해서 우리들은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즉 앞에서도 말한, "그것에는 시작도 없었고 끝도 없다"이다. 그러나, 그것에서의 체인 우주 구성조직체에 관해서는 시초의 것이었다거나 마지막 것이었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새로운 현현기(만반타라)에서는 각각의 조직체에 관해서 시초의 것이고 마지막 것이라고 생각할 수는 있다. 왜냐하면, 우주는 항시 더 높은 단계로 진화해 가고 있기 때문이다.


얼마 되지 않는 몇 년 전의 저서 「아이시스 언베일드」에 다음과 같은 말이 있다.

"비교(秘敎)교리는 불교와 브라만교처럼, 또한 박해 받아온 카발라에서도 다음과 같이 말한다. 유일하고 무한한 미지의 절대본질이 영원에서부터 존재해 있고, 바른 규칙과 조화적인 연속 안에서는 수동적으로 되기도 하고 능동적으로 되기도 한다. 마누(Manu)의 시적표현에서는 이러한 두 가지의 상태를 브라흐마의 "낮"과 "밤"이라 말하고 있다. 브라흐마의 깨어있는 상태이거나 잠들어 있는 상태의 어느 것이 된다.

브라흐마가 잠에서 깨어나 자연의 창조력이 됨으로서 물질계가 21억 6천만년 동안 지속되는 기간을 '브라흐마의 낮'이라고 하고, 물질계가 불과 물에 의해 파괴되고 브라흐마가 다시 잠을 자는 21억6천만년의 기간을 '브라흐마의 밤'이라고 한다. 이렇게 낮과 밤이 50번 반복되는데 이 기간(21억6천만 100)을 '브라흐마의 시대'라고 한다. '브라흐마의 시대'가 끝나고 나면 마타프라야(matapraiaya), 즉 대휴면기가 같은 기간동안 지속한다.


현존하는 최고의 불교종파 "스바바비카(SVABHA VIKA)"파 (아직도 네팔에 남아있다)의 철학자들은 이 "절대본질"에 있어 능동적인 상태(브라마의 낮)에 대해서만 사색하는데, 이것을 스바바바트(Svabhavat)라고 말한다. 그들은 그것이 수동적인 상태에 있는 추상적이고 "알 수가 없는" 힘에 대해 이론을 붙이는 것을 어리석은 일로 간주한다. 그러한 지론 때문에 기독교 신학자들이나 근대과학자들은 이 학파의 철학적인 심오한 논리를 이해하지 못한다. 때문에 이들을 무신론자들로 말하고 있다.


기독교 신학자들은, 눈에 보이는 우주를 창조해낸 인격화된 2차 적인 힘이며, 기독교도들에게는 의인화된 신, 즉 천둥과 번개 속에서 노호하는 남성 "여호와" 외에는 신으로 인정하지 않는다. 합리주의적인 과학에서는 불교와 스바바비카파들을 고대의 "실증주의자들"이라 환영한다. 만약 우리들이 불교, 스바바비카파의 철학을 일방적인 시각으로 대한다면, 근대의 유물론자들은 그의 평가를 그런 대로 바른 것이라 할지 모르겠다.


불교도는 창조주는 존재하지 않으며 무수한 창조력만이 있을 뿐이라고 주장한다. 이러한 힘들이 종합적으로 유일한 영원의 질료를 형성하는 것이다. 그 질료의 본질은 불가해한 것임으로, 불교의 관점으로서는, 진정한 철학자의 추론의 대상으로 삼을 수 없다. 소크라테스는 언제나 보편적 실재라고 말하는 신비에 관하여 의논하기를 거절했지만, 그러나 그를 파멸시키려고 모의했던 무리들을 제외하고 지금까지 누구도 그를 무신론자라고 비판하는 자는 없었다.


씨크릿 독트린에 나오는 설명에 의하면 이 신비의 실재는 활동기(顯現期)가 시작되면 영원불변의 법칙에 따라, 이 신성한 본질은 외부에서 안으로 내부에서 외부로 확대팽창을 한다. 이와 같이 순서대로 발동을 시작한 우주의 여러 힘은 긴 연쇄의 최종적 결과로서 현상우주, 즉 눈에 보이는 세계가 생겨났다고 한다. 그와 같이 수동적인 상태가 오게되면 신성한 실재(본질)는 수축이 생겨나고 앞의 활동기에서 창조된 우주의 일들을 점진적으로 해체하면서 되돌아간다. 그의 실질은 소산되어서, 심연으로 또다시 어둠이 덮인다는 것이다.

비밀의 책(The Secret Book)에 나오는 것을 비유로 써 보면 좀더 확실하게 생각을 전할 수 있을 것이다. 알 수 없는 본질(실재)의 날숨은 세계를 만들어(창조해) 내고, 들숨은 세계를 사라지게 한다. 이런 과정은 영겁으로부터 계속되어 왔던 것이며, 우리들이 지금 살고 겪고 있는 현재의 우주는 시작도 없었고 끝도 없는 무한한 연속의 한 토막에 불과하다."

이러한 이야기들을 저작의 본문에서 가능한 설명하겠다. 실제에 있어서 동양학자들에게 생소한 내용은 전혀 없지만, 비교적(秘敎的) 관점에서의 해석에는 서구 학생들이 지금까지 전혀 들어 본적이 없는 내용이 많이 있을 것이다.


첫 번째 그림은 단순한 원반 이고, 두 번째 그림 은 태고의 상징이다. 그 가운데 찍혀진 점은 추상적 우주의 영원한 자연력의 주기적 현현에 있어서 최초의 분화를 의미하고, "그것 안에 있는" 무성(無性)과 무한(無限)의 "아디티"(Rig Veda)이며, 절대공간 안의 잠재공간을 뜻하기도 한다. 제 3단계에서 이 점은 직경으로 바뀐다. 이 점은 뻗어나서 직경으로 바뀐다. 이 세 번째 그림은 모든 것들을 포함하는 절대무한 속에 있는 신성하고 때묻지 않는 순결한 어머니의 성질을 갖고있다.
이 수평 직경은 수직 직경으로 바뀌고, 수평과 수직은 교차 를 이루게 되는데, 즉 이승의 십자가 된다. 이것은 인류의 세 번째 뿌리가 된 제 3근본인종에 도달했음을 상징함과 동시에 인간 생명의 기원이 시작됨을 상징한다. 원의 테두리가 없어지고 만이 남는 것은 물질로 인간이 내려온 것이 완료되어, 네 번째 인종이 시작됨을 상징한다. 원안에 십자는 순수한 범신론을 상징하고도 있다. 둘레에 원이 없는 십자는 자연의 생성의 뿌리인 남근을 상징하게 되었다.

그것에는 원에 안으로 접하는 "다우" 또는 소위 "자이나교에서 말하는 스바스티카(SVASTIKA) 또 다른 뇌신(雷神)토르의 금퇴, 혹은 단순하게 원안의 스바스티카로서 성적인 뜻도 있지만 동시에 다른 뜻도 가지고 있었다.


세 번째 상징을 말하자면, 수평직경에 의해 둘로 나뉜 원은 창조적(여성적이므로 수동적) 대자연의 시초의 현현이라는 뜻도 있었다. 인간이 생식에 관하여 최초로 어렴풋이 지각한 것은 여성이다. 왜냐하면 인간은 아버지보다는 어머니에 더 익숙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여신이 남신보다 더 신성시되었다. 따라서 자연은 여성이고 대단히 객관적이며 실체적이다. 그리고 그것이 결실을 맺는 영적원질(精靈)은 숨겨져 있다.

수평선의 어느 원안에 둘러 나눈 선을 추가함으로 가장 오래된 글자모양 타우가 형성되어졌다. 이 문자는 세 번째 근본인종의 상징적인 "타락"(자연적인 진화에 의해 성의 분리가 일어남)의 날까지는 제3근본인종을 표시하는 상형문자였다. 이때 상징으로 변화되었다. 다시말해 무성(無性)의 생명을 상징하는 원이 분리된 것이다. 수정된 원은 이중의 상형문자, 즉 이중의 상징이 되었다.


이것은 우리들이 속한 다섯 번째 근원인종의 모든 아인종들에게 상징학에서 이야기하는 최초로 형성된 인종의 세크르(sacr')(히브리어로는 네케바(n'cabvah))가 되었다. 그로부터 이집트의 (생명의 상징)로 바뀌었고 더 훗날 금성을 상징하는 표시가 되었다. 그 다음은 스바스티카(토르의 금퇴ː지금은 헤르메스의 십자)가 되고, 끝내 원에서 떨어져서 순전히 남근(男根)의 상징이 된다. 칼리 유가(KALI YUGA)의 비교적 상징은 거꾸로 세운 꼭지점 다섯의 별이다.

두개의 꼭지점이 하늘을 향하게 하는 것은 인간적 마법의 기호이다. 이러한 위치의 별은 모든 오컬티스트가 "좌수(左手)의 길"의 표시로서 인정하는 것으로 의식적 마술에 쓰여진다. 신비주의자들은 이것을 사도(邪道)라고 말한다.


이 책을 읽어 가는 동안에 범신론에 관한 일반의 잘못된 생각을 바로잡기 바란다. 불교도와 아드베티파의 오컬티스트들을 무신론자로 보는 것은 잘못이다. 그들 모두가 철학자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그들은 모두 자신의 반론이나 의론을 엄밀한 논리에 기초를 둔 논리학자이다.


실제로 힌두교의 파라브라흐맘(Parabrahmam)이 다른 여러 나라의 숨겨지고 이름 없는 신들의 대표로 받아드려진다면, 우주의 절대원리가 다른 나라의 모든 신들의 원형이 되었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파라브라훔(Parabrahm)은 하나의 개체적 신이 아니기 때문에 "신"이라 할 수 없다. 만두키야 우파니샤드 2장 28절을 보면, "그것은 지고한 것이며, 지고가 아닌 것이다" 라고 말하고 있다. 원인으로서는 지고하지만, 결과로서는 지고하지 않다는 뜻이다. 파라브라훔은 유일무이의 실재로서, 최고의 영적인 뜻에서는 모든 것들을 포함하는 우주이자, 순수하고 자유로운 영원불변의 무한한 우주공간이다.

유일의 불변이고 청정(淸淨)이며, 자유롭고, 쇠태하지 않는 브라흐마(中性) (여기서 말하는 브라흐마(brahma)는 힌두교의 창조신 브라흐마(brahm)가 아니다. 우주의 본질인 브라마를 뜻한다)는 지고의 근원이며 "유일의 진실한 존재 파라마티카(Paramarthika)"인 것이다. 또 절대적 칫트(Chit)와 차이탄야(Chaitanya(지성, 의식))는 인지자가 될 수 없다. "왜냐하면 그것에는 인식이라는 것이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불꽃을 본질이라 말할 수 있는가? 불의 본질은 "우주의 생명과 빛이고, 눈에 보이는 불과 불꽃은 파멸이고 죽음이며 악이라." "불과 불꽃은 아라한의 체를 파괴하며 본질은 아라한을 불사의 것으로 만드나니"「보디무르(Bodhi-moor) 제2권」(편주9)


베다 철학자 상카라차리야는 이렇게 말한다. "절대 영의 지식은 태양의 광휘처럼, 또는 불속의 열처럼, 절대본질 자체 외에는 아무 것도 없다." 그것은 "불의 영"일 뿐, 불 자신은 아니다. 따라서 "불의 속성", 즉 열기나 불꽃은 영의 속성이 아니고, 오히려 그 영이 무의식적 원인으로 되어 있는 것들의 속성이다".


이것이 후일 장미 십자회 철학의 진정한 중심사상의 기초가 아니었겠는가? 간단히 말해서 파라브라훔은 무한하고 영원한 우주의 집합의 총계이고, 각개의 집합체로 맞추어질 수 없는 "그것"이고 "이것"이다. "태초에 "이것"은 유일무이한 자아(Self)였다." (아이타레야 우파니샤드)

위대한 상카라차리야는 "이것"이란 곧 우주를 가리키고 있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태초에"라는 단어의 의미는 현상우주의 재현(再現)이전을 뜻한다. 그러므로 범신론자들이 씨크릿 독트린에도 쓰여 있듯이, 우파니샤드에서 이야기하는 "이것"은 창조를 행할 수 없다는 진술을 반복할 때, 그들은 창조자 혹은 창조자들의 집합의 총계를 부정하지 않는다. 그렇지만 "창조" 특히 형성과 같은 유한의 활동을 무한의 원칙에 끼워 맞추는 것을 매우 논리적으로 부정할 뿐이다.

그들에게 있어서 파라브라흐맘은 절대적 원인이고, 한정되어 있지 않는 묵타(Mukta)임으로 수동적인 것이다. 파라브라흐맘에 없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제한적인 전지와 전능뿐이다. 왜냐하면, 이것들은 인간의 지각력의 반영에 여전히 귀속되기 때문이다. 파라브라훔은 불변하며 영원한 "지고의 일절"이고, 언제나 눈에 보이지 않는 영이자 자연의 진수임으로 속성을 가질 수가 없는 것이다. 당연히 그의 절대성은 유한, 말하자면 조건이 붙여져 있는 것들과는 맺어지려는 개념이 처음부터 배제된다.


만약 베단다파가 모든 속성을 단순히 파라브라훔의 발산에 속하는 것으로 해서, 그와 같은 발산을 "이쉬와라 프러스 마야(Iswara plus Maya)",와 아비드야(Avidya)(무지라기보다는 불가지론에 가깝다.)라고 설명한다고 하면, 이 개념 안에서 무신론을 찾아 낼 수는 없다. 무궁하다고 생각되어지는 우주에서 두개의 절대자나 두개의 무한이란 없는 것임으로, 이런 자존하는 것들에서 인격신적인 창조를 한다고 하는 생각을 가지는 것은 안된다.

유한인 "존재"의 감각과 지각에서 본다면, 유일의 유성(有性)이라고 말하는 뜻에서, 「그것」은 "비존재"이다. 왜냐하면 영원히 공존하는 발산은, 말하자면 생득 방사란 것이 이 일절(一切)속에 숨겨져 있기 때문이다. 그 방사는 주기적으로 브라흐마(음양이라 말하는 이중 에너지)가 되는 것이고, 스스로 현현한 우주가 되고 스스로 넓어져간다. 공간의 (추상적인)물위에 움직이고 있는 나라야나(Narayana)는 자신이 움직이게끔한 구체적인 실질인 물로 변질되어 현현한 "로고스"가 된다.


범신론자와 아트베이타파에 극렬하게 반대하고 있는 정통 바라문들은 그들을 무신론자라고 말하지만, 만약「마누의 법전」이 이 문제에 있어서 어떤 권위를 가질 수 있다고 한다면, 이 창조신의 각 시대의 끝 무렵에는(100신년(神年), 이것을 우리들 인간의 연월로 표시하면 15행의 수가 더 필요함) 창조자인 브라흐마의 죽음을 받아드려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 죽음을 존재의 현현계에서는 일시적으로 보이지 않게 되는 것, 다시 말해 주기적 휴식으로 보는 것 외에 다른 뜻으로 보는 철학자가 정통파 안에는 없을 것이다.


따라서 오컬티스트들은 앞에서의 교의에 관해서는 아트베이타 베단타파의 철학자들과 견해를 같이 하고있다. 절대적 전(全, ALL)은 "황금알(우주의 알)"의 알속으로 들어가, 후일에 이르러 브라흐마와 모든 것이 눈에 보이는 우주가 될 수 있게끔 스스로 전개하는 것으로 변질된다고 말하지만, 절대 전(全, ALL)이 황금알을 창조한다는 생각 또는 황금알을 진화시킨다는 생각은 철학적으로 불가능한 것이라고 베타파는 말한다.

그들은 절대 통일체는 "무한"으로 바뀌어질 수 없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무한"이란 어떤 끝이 없는 연장과 그런 어떤 것의 지속을 전제로 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유일의 전(全, ALL)」은 우리의 존재의 터전인 지구상의, 즉 우리들 존재계에서 「유일의 전(全, ALL)」이 단지 멘탈(정신적)적 물질적 표현을 하고 있는 공간과 같은 지각의 대상도 아니고 주체도 아니다. 만약 영원무한의 전(全, ALL), 즉 편재하는 통일체가 영원 속에서 존재하고 있는 것이 아니고, 주기적인 현현을 통하여 다양한 우주 혹은 여러 가지의 인격이 된다고 생각 할 수가 있는 것이라면, 그 통일체는 유일한 것이 아닐 것이다.


"순수공간은 저항하지도 못하고, 운동하지도 못한다"고 말한 존 로크의 생각은 바른 것이 아니다. 공간이란 "무궁한 허공(limitless void)"도 아니고 "조건화된 충실(conditioned fulness)"도 아니다. 그러나 양쪽 모두이다.


절대적 추상의 세계에서는 영원히 감지할 수 없는 신이고, 유한의 인간 마음에서만 공허(空虛)이다. 또 마야적(현상)인식의 세계에서는 그것이 가시적이든 비가시적이든 간에 질료가 충만한 공간이자 만물의 절대적 용기(容器)이다. 따라서 이것이야말로 절대적 전(全, ALL)이다.


그리스도교의 사도가 "신의 안에 살고 움직이고 존재하도다"라고 말한 것이나 "우주는 브라흐마 안에서 살고 브라흐마에서 생성되며 브라흐마로 회귀하도다"라고 힌두교의 리시가 말한 것은 아무런 차이가 없다. 현현 되지 않는 우주 브라흐마(중성)는 곧 잠재상태에 있는 미현현된 우주이다. 그리고 현현된 브라흐마는 정통종교에서의 상징적 교의에서는 남성-여성(male-female)으로 되어있는 "로고스(logos)"이다. 말하자면, 비전을 전수받은 사도 성 바울의 신과 리쉬(스승)의 신은 보이지 않는 공간과 보이는 공간 모두이다.


공간은 비교의 상징학에서는 "일곱 개의 피부를 가진 영원한 어머니-아버지"라고 표현된다. 공간은 미분화상태에서 분화한 층에 이르기까지 일곱 층의 표면으로 구성되어 있다.
"우주가 존재하던 존재하지 않던 간에, 과거에도 있었고, 현재에도 있으며, 미래에도 있을 것은 무엇이겠는가?"라고 비교의 센쟈르어 문답집에서 묻는다. 그 답은 "공간"이다.


이에 거절당하는 것은, 유일의 알아낼 수 없으면서, 늘 존재하고 있는 자연의 신(즉, 의식하지 못하는 자연의 신)이 아니고, 인간의 독단의 신이며, 그 신의 인격화되어 버린 "말"이다. 한이 없는 자부심, 태어나면서 가지고 나온 교만과 허영에 찬 인간은, 자신의 보잘것없는 작은 뇌 조직 안에서 느낀 재료를 써서 자신의 모독적인 손으로 인격신을 만들어냈다. 그리고는 나타난 적이 없는 하나의 공간에서부터의 직접적인 계시(啓示)라고 하여 인류에게 강요한 것이다.


오컬티스트는 이 계시가 신성(神聖)으로부터 온 것이기는 하지만 유한인 실재, 말하자면 현현된 생명으로부터 내려온 것이지, 결코 미현현의 "유일한 생명"에서 온 것으로 받아들이지는 않는다. 그러한 현현된 생명을 최초의 인간, 혹은 드야니-붓다(Dhyani-Buddha) 또는 드얀초한(Dhyan-Choan)이라 부르는데, 힌두교에서는 리쉬프라자티(Rishi-Prajarati, 우주의 창조신)라하며 엘로힘(Elohim) 또는 신의 아들들이라 불린다. 이들은 여러 나라 국민들이 숭배하며 별의 혹성영들로 언급되는데 인간에게는 신적인 존재들이다.


또 오컬티스트는 "아디삭티(Adi-Sakti)", 말하자면 "물라프라크리티(Mulaprakriti)"에서의 직접의 발산, "그것"의 영원한 뿌리, 또는 우주혼의 아카사(Akasa)형체를 감아 쓰고 있는 창조적 원인인 브라흐마의 여성적인 면을 철학적으로 "마야"(현상계를 창조하고 움직이는 원동력)로 해서 인간 "마야"의 원인이라고 본다.


그러나 이러한 견해를 가지고 있어도 오컬티스트는 "마야"가 존속하는 동안, 즉 대현현기(Mahamanvantar)동안 그의 존재를 인정하고, 또 세계(우주)혼은 과학에서 알던 모르던 모두의 자연현상과 연관되었음으로, 실제적인 사안에 아카사 즉, 물라프라크리티(Mulaprakriti)의 방사를 적용할 수가 있다.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종교는 비교(秘敎)적인 것으로 뿌리나 기초는 "하나"였지만 현교적으로는 인도와 페르시아, 이집트의 종교이다. 그 다음에 온 것은 앞의 종교에서 나온 "칼데아(chaldea, 고대 바빌로니아 남부 지바의 왕국)"의 새 종교이다. 현재는 고고학자들에 의해 완전히 잊혀진 채 그 원형이 많이 잘못 전하여져 사바교(태양과 달, 그리고 별들의 신들을 숭배)로만 알려져 있다.


그 후의 여러 종교가 생겨난 것을 거쳐서 유대교가 나온다. 이 교리는 비교적인 측면에서 카발라(Kabala)와 바빌로니아의 메이지즘(Magism)과 일맥 상통하는 계통이고, 현교적인 측면에서 볼 때 「창세기」나 「모세오경」에서처럼 우화적인 전설로 가득 차 있다. 조하르(Zohar, 히브리 신비교 경전)를 토대로 「창세기」를 읽어보면, 처음 네 개의 장은 우주 발생론의 심오한 철학적 대목의 일부라 할 수 있다. (SD 3권 구푸타베이티야와 조하르 참조) (편주10)


그것들은 상징적인 가려진 문구 그대로 읽으면 한편의 동화로서, 과학과 논리의 측면에서 볼 때 골칫거리가 아닐 수 없는데, 이는 분명한 카르마의 결과라고 하겠다.「창세기」를 기독교 교리의 성서의 머리말로 삼도록 한 것은 「모세오경」의 진정한 뜻이 무엇인지를 잘 알고 있었던 랍비(Rabbis, 유태교율법학자)들의 잔혹한 복수에서였다. 그것은 그들의 성전을 강탈 당한데 대한 랍비들의 무언의 항변이었다. 유태인들은 현재 그들의 전통적 박해자보다는 확실한 우위에 있다. 지금까지 언급한 현교적 교의를 지금부터는 절대적(보편적)교리에 비추어 차츰 설명해 가겠다.


오컬트 교리 문답 안에 아래와 같은 질문과 대답이 있다.

"언제나 항상 존재해 있는 것은 무엇인가?"

"공간, 즉 어버이 없이 스스로 존재하는 것(Anupadaka)입니다."

"언제나 항상 존재했던 것은 무엇인가?"

"뿌리 속의 씨눈(우주 생성의 근원)입니다."

"언제나 항상 들락날락하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커다란 숨(우주의 호흡)입니다."


"그러하다면 세 개의 영원(永遠)이 있는가?"

"아닙니다. 그 세 개는 곧 하나입니다. 언제나 있으면서 있는 것은 하나이고, 언제나 있었던 것도 하나이며 언제나 있음직 할 것도 하나입니다. 이것은 공간입니다."


"오, 제자야! 설명해 보라."


"유일한 것은, 원주가 없으며 끊어진 곳이 없는 완전한 원(輪)입니다. 그의 원주는 어디에도 없고, 어디에서도 있는 것입니다. 그 유일한 것은 현현기 동안만 직경을 나타내는 원의 무한의 평면입니다. 유일한 것은 현현기 동안 어디에서도 발견되지 않고, 어디에서도 지각되는, 눈으로 보이지 않는 "점"입니다.


그것은 수직이고 수평이기도하며, 아버지이고 어머니이며, 아버지의 정상이고 맨 밑(바닥)이며, 실제에 있어 어디서도 잡을 수 없는 어머니 양손입니다. 왜냐하면, 유일한 것은 윤(輪)이고, 또 그 윤 안에는 또 다른 윤들이 많이 있는 윤이기 때문입니다. 암흑 속(어둠)에 빛이고, 빛 속에 암흑, "영원의 숨"입니다. 이것이 어디서나 존재해 있을 때는 밖으로부터 안으로, 어디에도 존재하지 아니했을 때에는(마야, 중심의 하나) 안에서 밖으로 나아갑니다. 그것은 팽창과 수축을 반복합니다(숨을 뱉고 숨을 마시고). 팽창할 때 어머니는 사방에 뿌립니다. 수축 할 때, 어머니는 뱉은 것을 거두어 넣습니다. 이것은 진화와 붕괴, 즉 만반타라와 프랄라야를 만들어 냅니다.

씨앗은 눈에 보이지 않는 불꽃입니다. 뿌리는 차갑습니다. 그러나 진화하는 만반타라 동안 그녀의 옷은 차갑고 반짝입니다. 뜨거운 숨은 아버지입니다. 아버지는 다양한 면으로 구성된 원소로 인해 생겨난 것을 먹어치웁니다. 동종으로 된 한 면으로 이루어진 원소만이 남습니다. 차가운 숨은 어머니입니다. 어머니는 형상을 잉태시키고 바깥으로 내보냈다가 새벽이 오면(브라흐마의 하루, 즉 만반타라), 새로운 형상으로 태어나도록 하기 위해 자신의 가슴으로 거두어들입니다."


일반 독자들의 보다 분명한 이해를 위해, 오컬트 과학에서는 일곱 가지의 우주의 원소를 천명하지 않을 수 없다. 그 중의 네 가지는 순전히 물질적인 것들이고, 다섯 번째의 에테르(Ether, 靈氣)는 반물질적인 것이다. 이 다섯 번째의 에테르는 제 5라운드 전기간 동안의 앞서 말한 네 가지를 지배하기 위해 제 4라운드의 진화단계가 끝나갈 무렵에 이르러 대기안에 눈에 보이게 나타난다. 에테르는 제 5라운드의 진화단계가 진행되는 동안 전과정을 지배원소로서 작용한다.


나머지 두 가지 원소는 인간이 감지할 수 있는 범위를 넘은 것들이다. 그러나 이 두 가지는 제 5라운드의 여섯 번째 인종과 일곱 번째 인종의 진화단계 동안에 예감(직감력)과 같은 것으로서 나타날 것이다. 그리고 각각 제6, 제 7라운드에서 인간들에게 알려지게 될 것이다. 이들 일곱 원소에는 과학에서 알고있는 원소들 보다 훨씬 더 많은 아원소들이 있으며, 이것들은 절대 유일의 원소가 단순히 잠정적으로 변형된 여러 꼴에 불과한 것이다. 이 절대 유일의 원소는 에테르도 아니고 아카사도 아니다. 이것은 에테르나 아카사의 근원인 뿌리들이다. 오늘날 과학에 의하여 마음대로 공공연하게 주장하고 있는 다섯 번째 원소는 뉴턴이 가설로서 세운 에테르는 아니다. 뉴턴이 이것을 에테르라고 말한 것은 아마 먼 옛날 "부-모(Father-Mother)"가 되는 "에테르(AEther)"라는 발화성 신성물질을 연상한 것이라고 본다.

뉴튼은 직감적으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자연은 영원히 순환하며 일하고 있는 것들이고, 고체에서 액체를 만들어내고, 휘발성에서 불휘발성의 것들을 불휘발성에서 휘발성의 것들을 만들어내고, 농밀한 것들에서 정묘한 것들을 정묘한 것에서 농밀한 것들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이와 같이 만물은 아마 에테르에서 시작했을지 모른다. "

지금부터 이 책에 소개될 "지혜의 책(The Book of Dzyan)"에서 발췌한 모든 것은 우리들이 속한 태양계 및 그 주변의 눈에 보이는 것들의 휴면기(프랄라야)후의 우주발생만이 다루어지고 있음을 독자들은 염두 해두기 바란다. 보편적(전체) 우주(Kosmos)의 진화에 관한 비밀의 가르침은 소개할 수 없다. 이 시대의 가장 뛰어난 예지를 가지고 있는 자들이라 할지라도 그런 가르침을 이해할 수 없다. 이런 문제를 연구하는 것을 허락 받은 최고의 비교도들, 그리고 최고신 디야니초한들조차도 수십 억 개의 태양계를 건너뛰는 소위 말하는 "중심태양"의 경계를 넘어서 신비를 통찰한 적이 없었다고 스승들은 공공연하게 명확히 말하고 있다. 그러므로 이 책에 소개되는 것은 "브라흐마의 밤"이 끝난 후의 우리들의 눈에 보이는 우주에 관한 것뿐이다.


독자가 씨크릿 독트린의 기초가 되는 「쟌(Dzyan)의 서」에서 "스탠저"의 의미를 숙고하기에 앞서 절대로 필요로 하는 것은, 먼저 사상이 전 체계의 밑바탕(기초)인 것이고, 그 전 사상 체계에 스며들어 있는 몇 가지 기본개념을 잘 터득해두는 것이다. 이 기본적 개념은 몇 안되지만, 이것들을 명확하게 이해하지 못하면 그것에 이어지는 내용들을 이해해 낼 수가 없다. 그래서 몇 차례씩 읽어가면서 조금씩 전진하도록 독자에게 부탁하고 싶다.

「씨크릿 독트린(비밀의 가르침)」은 세 가지 기본적 원리를 제시하고 있다.

a) 유일의 편재(偏在), 영원, 무한, 불변의 원칙. 이것은 인간의 사고력, 즉 개념구성의 힘을 초월하고, 인간의 어떠한 표현이나 비유도 이것을 한정시키고 축소해 버리는 것이 되고 만다. 이것들은 사고의 범위를 넘어서 있으며, 「만두키야, 우파니샤나드」(시가7)에 의하면 "생각해 낼 수 없고, 말로 표현할 수 있는 도를 넘은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와 같은 개념을 일반의 독자들에게 좀더 확실하게 느끼도록 하기 위해, 현현해 있고 한정적인 조건이 붙어있는 모든 존재 이전에 유일의 절대적 실재가 있다고 하는 기초원리에서부터 시작하자. 이 영원무궁한 원인을 지금의 서구의 현대철학에서는 "무의식의 존재" 또는 "불가지의 존재"라는 막연한 표현을 쓰고 있으나, "과거에도 있었고, 현재에도 있으며, 미래에도 영원히 존재할" 모든 것들의 뿌리 없는 뿌리(근원)인 것이다.


물론 이것에는 아무속성도 없으며, 본질적으로 현현해 있는 유한의 존재와는 아무 연관관계가 없다. 이것은 존재(Being)라기보다는 존재성 유(有)(Be-ness. 있는 것, 산스크리트어에서 말하는 Sat)이고 모든 사고나, 추측을 넘어서 있는 것들이다.


이 존재성 유(有)(Be-ness)를 씨크릿 독트린에서 두 가지의 측면으로 상징하고 있다. 그 하나는 완전한 주관성을 나타내는 절대적이며 유일한 추상공간이다. 이것은 인간의 마인드로는 절대 유추해 내거나 인식할 수 없는 개념이다. 다른 또 하나는 비한정적 절대의식을 나타내는 절대적 추상운동으로서, 조건이 붙어있지 않는 의식을 나타낸 것이다. 서구의 사상가들도, 의식의 변화 없이는 상상해 낼 수가 없다고 하는 것을 믿고 있으며, 운동은 그 본질적인 특성인 변화를 가장 잘 상징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 유일한 실재의 운동의 측면은 "큰 숨(우주)"이라는 말로 상징되기도 하는데, 이 말은 더 이상 설명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충분히 사실적인 상징인 것이다.

그래서, 씨크릿 독트린의 시초의 기본적 원칙은 이런 형이상적인 유일의 절대자, 즉 존재성 유(有)(Be-ness)이다. 인간들의 유한의 지성은, 이것을 신학에서 삼위일체라고 상징하고 있다.


그러나, 좀더 설명하면 독자의 이해를 도울 수 있을 것이다. 허버트 스펜서씨는 "시초의 원인"의 성질은 우리들의 머리에 타오르는 의식의 성질과 본질적으로 같은 것이라고 단언하고, 자신의 불가지론을 최근에 수정했다. 오컬티스트는 좀더 논리적으로 "시초의 원인"은 "원인 없는 원인" "영원한 것"들 "불가지"의 것들에서 나온다고 말한다. 바꾸어 말하면, 스펜서씨는 우주에 편재해있는 비개인적 실재의 생각은 순수한 본체라고 말한다. 이 정도의 전진이 이루어져 그는 비교(秘敎)와 베다의 가르침에 대단히 가까워졌다.


파라브라훔(유일의 실재, 절대자)은 절대의식의 장(場)이다. 즉, "한정된 조건"이 붙어있는 존재와는 아무 연관관계도 없는 본질인 것이다. 의식적 존재는 파라브라훔이 한정적 조건을 붙여놓은 상징이다. 그러나 우리들의 생각 속에서(우리들에게는 절대적 비실재로 인식되는 것) 벗어나면 영(또는 의식)과 물질, 주관과 객관이라 말하는 대비(對比)에서 이원성이 생겨난다.


그러나 영(또는 의식)과 물질을 독립된 두 실재로 생각해서는 안되고, 절대자(프라흐마훔)의 두 가지 상(相) 혹은 두 가지 면(面)이라고 생각해야 하며, 주관적이든 개관적이든 간에 한정된 조건이 붙어 있는 존재의 기초로서 생각해야 한다. 이 형이상학적 3원소인 아트마(Atma, 영), 부디(Buddi, 혼) 그리고 마나스(Manas, 정신)의 3개조를 모든 현현물을 나오게 하는 근원으로 생각하면, "큰 숨(우주)"은 우주이전의 관념작용의 특성을 띠게 된다.


이것은 힘과 모든 개체의 의식의 원천인 것이고, 우주진화라고 하는 방대한 체계에 지도적 지력(知力)을 공급하는 것이다. 한편, 우주이전의 근원본질(물라프라크리티)은 대자연에 있는 모든 것들의 객관세계에서 바탕이 되는 절대자의 면(面)이다.


우주이전의 관념작용이 모든 개인의식의 뿌리가 되는 것과 똑같이 우주이전의 질료는 여러 단계에서 분화하는 물질의 원질료이다. 따라서, 절대실재(절대자)의 이러한 두 가지면의 대비는 "현현된 우주"가 존재하는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우주관념 작용은 우주적 질료 없이는 개인의 의식이 되어서 현현할 수는 없다. "나는 나다"라는 의식이 솟구쳐 오르는 것은 물질의 매체를 통해서만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고, 복잡화의 어느 단계에서 "우주 마인드"의 하나의 광선의 조절에 집중시킬 수 있는 것은 물질적 바탕이 필요하다.

한편, 우주 관념작용을 동반하지 않고서는 우주질료는 공허한 추상물로 그대로 남을 것이고, 어떤 의식도 현현해 생겨나는 것은 없다. 그러므로 "현현우주"에는 이원성이 가득 차있다. 이원성은 "현현물"로서의 현현우주의 존재(Ex-istence)의 "무엇"인 본질 바로 그것이다. 그러나 주관과 객관, 영과 물질이라 말하는 반대의 양극은 그것들에 의해 총합되어 있는 유일의 통일체의 두 가지 면일 뿐이고, 현현우주에는 영을 물질로, 주관을 객관으로 연결하는 "무엇"이 있다.


서구의 이론에서는 아직 모르고 있는 이 "무엇"을 오컬티스트들은 "포하트(Fohat)"라고 말하고 있다. 이것은 "신의 사고"안에 있는 "관념"을 "자연의 법칙"으로 해서, 우주질료에 인상을 주게 하는 "걸쳐져 있는 다리", 즉 매개체 역할을 한다. 그러므로 "포하트"는 우주관념 작용의 "다이나믹"한 "에너지"인 것이다. 또 다른 측면에서 볼 때, 지성적인 중개자이고, 모든 현현물의 지도적 힘이며 눈에 보이는 세계의 건설자이자 디야니초한들을 통해 전파되어 현현시키는 "성스러운 사고"이다. 이와 같이 우리들의 의식은 영으로부터, 말하자면 우주관념작용으로부터 비롯되고 그 의식을 개체화시키고, 자아의식 즉 반사적 의식에 이루게 하는 몇 개의 매체들은 우주원질에서 온다.

그리고 "포하트"는 "마인드"와 물질사이를 연결하는 신비적인 매개 역활을 하며, 여러 가지의 나타내는 방법으로 모든 원자에게 대전(帶電)을 시켜서 생명을 불어 넣어주는 원동력 역할을 하는 원칙이다.

아래의 요약을 보면 좀더 명확한 개념을 가져다 줄 것이다.

1) 절대자. 베단타파 철학의 파라브라훔이란 유일의 실재, 사트(Sat)이고 이것은 헤겔이 말한 절대존재이기도 하고 비존재이기도 하다.
2) 첫 번째 현현은 비인격적인 것임으로 철학적으로는 현현 되지 않은 로고스이고 "현현하게 될 것들"의 전조인 것이다. 이것은 서구의 범신론자들의 "시초의 원인"이고, "무의식"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들이다.
3) 영-질료(Spirit-matter), 생명. "우주의 영"이고 푸루샤(Purusha, 영)와 프라크리티(Prakriti, 질료)이고 제 2로고스인 것이다.
4) 우주 관념작용. 마하트(Mahat) 즉 예지(우주적 지성, 보편적 세계혼, 물질의 우주적 본체, 자연 안의 (혹은 자연의)지적 작용의 바탕이고 마하부디(Maha-Buddhi)라고 말하기도 한다.
우주에서의 유일의 실재는 한정된 조건이 붙여져 있는 우주에서는 두 가지 측면으로 구성되어 나타난다.

씨크릿 독트린에서는 두 번째 원리를 다음과 같이 말한다.

b) 전체로서의 우주는 끝없이 평온한 것처럼 영원 무변한 것이지만 그것은 "끊임없이 나타났다 사라지기도 하는 무수한 우주의 놀이터"이기도한 것이다. 그와 같은 여러 우주는 "현현하는 별들"이나 "영원의 불꽃"이라고 말하고 있다. "순례의 영원성"은 자재(自在)의 눈의 깜빡임과 같은 것이다.(쟌의 서). 세계가 나타나고 사라지고 하는 것은 조수(潮水)가 규칙적으로 밀물과 썰물을 되풀이하는 것과 같다.


씨크릿 독트린의 두 번째 주장에서는, 물질과학이 자연의 모든 분야에서 관찰하고 기록해온 주기의 법칙, 즉 조수의 간만(干滿)의 법칙과 같이 끊임없이 변화하는 절대적 보편성인 것이다. 낮과 밤, 삶과 죽음, 수면과 깨어나는 것과 같은 교체(交替)는 너무나 일상적이고 완전히 보편적이며, 예외가 없는 사실 속에 우주의 절대적 기본법칙의 "하나"가 있다는 것을 이해하는 것은 쉬운 일이다

씨크릿 독트린에서는 가르치는 세 번째 원리는 다음과 같다.

c) 미지의 근원의 한 측면이 되는 보편적 최고 혼과 모든 혼과의 기본적 동일성, 그리고 보편적 최고 혼의 불꽃인 모든 개개의 혼의 의무적인 순례의 여행, 그것은 주기의 법칙(윤회)과 카르마의 법칙에 따른 화신의 주기를 통해서 전 기간동안에 행해진다. 바꾸어 말하면, 보편적 제 6본질, 즉 최고의 혼의 청정한 에센스에서 파생해 나온 불꽃이,
(1) 현현기의 현상세계에서의 모든 원소의 형체의 경험을 빠짐없이 거칠 때까지,
(2) 또, 처음에는 자연의 충동에 의해, 얼마 후에는 카르마에 의해 자제(自制)되어 스스로 시작하고 스스로 생각해낸 노력에 의해 개체성을 획득해 낼 때까지, 가장 하등한 의식으로부터 가장 고등한 의식에 이르기까지, 광물 및 식물로부터 지고한 디야니 붓다에 이르기까지, 지성의 모든 단계를 차례로 오르지 않는 한 순수한 영적 붓디(신성한 혼)의 독립된(의식적)존재가 될 수는 없다.


비교철학의 중심적인 가르침은, 오랫동안의 긴 윤회와 환생을 거쳐서 스스로의 노력과 공적을 통해 자기자신의 자아(Ego)와 싸워 승리하는 자가 아니라면 어떠한 특권이나 특별한 천부적 재능도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힌두교에서 우주는 브라흐마(Brahma)와 브라흐마(Brahm )라고 말하는 이유이다. 브라흐마(Brahma)는 우주의 모든 원자 하나 하나에 내재해 있고, 자연계의 여섯 가지의 본질은 모두 대우주이든 소우주이든 우주의 일곱 번째에서의 "유일한 것", 말하자면 유일한 실재의 결과인 것이고, 그의 다양하게 분화해 있는 소(小)의 면(面)인 것이다. 또한 그러한 이유로 여섯 번째 세계, 즉 브라흐마(Brahma)의 매개체인 브라흐마(Brahm )의 세계에서의 변환은 정신적, 영적, 물질적인 순서로 현현 및 구체화되는 것이며, 이러한 국면에서 형이상학의 어의반용법(어구의 원래의 뜻을 반대로 사용하는것)에 의해 환영적 마야적으로 보게되는 것은 이 때문이다.

비록 모든 개체적인 원자 뿌리와 집합적인 모든 형체의 뿌리는 그의 일곱 번째 본질, 즉 유일의 실재이지만, 현현해 있는 현상과 잠정적(一時的)인 나타냄으로서는 역시 우리들의 감각에 미치지 못한 환영에 불과한 것이다.


파라브라흐맘과 물라프라크리티라고 말하는 두 가지 면에 두는 유일의 원리는 그의 절대성에서는 성(性)이 없고, 조건이 붙어 있지 않으며 무한의 영원이다. 유일의 원리의 주기적(현현기의)발산, 말하자면 원초의 방사(放射)도 유일인 것이고, 다만 남 여 양성에서는 현상(現象)으로 해서는 유한(有限)이다. 그의 다음 방사가 시작하면, 모든 방사물은 양성(兩性)으로서, 그것의 하등(低級)한 차원에 있어서는 남성 및 여성의 본질이 된다.


대휴면기든 소휴면기든(소휴면기에서의 세계는 그대로 머물러 있게 된다) 휴면기(Pralaya)가 끝나면, 다시 깨어나 활동적 생명의 처음의 것은 가소성(可塑性)이 있는 아카사, 우주의 아버지-어머니(Father-Mother), 에텔의 영과 혼, 즉 원의 표면에 해당한다. 공간은 그것이 우주활동 전일 때 어머니라고 불리며, 다시 막 깨어나는 단계에 있어서는 아버지-어머니로 불린다. (스탠저 ∥의 주석참조) 카발라에서는 이것을 아버지-어머니-자식(Father-Mother-Son)이라고 한다. 반면, 동양의 가르침에서 이것은 현현 우주의 제 7본질, 즉 그의 아트마, 붓디, 마나스(영, 혼, 의식(지성))로서 일곱 개의 우주본질 그리고 일곱 개의 인간원질로 나누어지는 삼개조인 것이다.


한편, 기독교의 신비주자들의 서구의 카발라에서는 그것을 삼개조, 즉 삼위일체라 하고, 그들의 오컬티스트들은 그것을 남성-여성(male-female)의 여호와, 즉 야하바(Jah-Havah)라 한다. 비교적 삼위일체와 기독교 삼위일체 사이에는 상당히 차이가 있다.
신비가들과 철학자들, 동양과 서구의 범신론자들은 자신들이

말하는 삼위일체의 기원을 신성하면서 매우 순수한 추상으로서 발생전의 삼위일체로 통합한다. 하지만 정통파 종교에서는 그것에 형을 붙여 의인화시킨다.


히란야가르바(Hiranyagarbha), 하리(Hari), 상카라(Sankara)는 현현해 있는 "지고한 영(Spirit of the Supreme Spirit)"(프리티비(Prithiv ), 즉 지구는 비쉬누의 시초의 화신을 맞이한다)의 세 가지 본질의 삼위격(三位格)이고, 형성, 보전, 파괴의 형이상적 추상특성이며, "창조된 것들이면서, 멸(滅)하지 않는 것들(즉 아츄타(Achyuta), 비쉬누의 별명)의 세 개의 신성한 아바스타스(Avasth s)(문자그대로 위격(位格))인 것이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정통적인 기독교에서는 삼위일체의 세 가지 속성을 자신들의 인격적 창조신으로 나누어놓고 그보다 더 높은 신성은 인정하지 않는다.


오컬티즘에서는 그것보다 더 높은 신격(神格)은 추상적인 삼각형이고, 정통파에 있어서는 완전한 정육면체이다.


동양의 철학자들은 창조신 혹은 팔백만의 신들을 브란티다르사나타(Bhrantidarsanatah)라고 생각했는데, 이것은 "잘못된 이해" 혹은 "틀리기 쉬운 외형으로 인해 물질적 형체로 잘못 인식하는 것"을 말한다.


그리고 신들을 자기중심적인 인격, 즉 인간 혼(제 5본질인 하급의 면)의 환영적 개념작용에서 나온 것이라 설명하고 있다. 이것은 「비슈누 프라나」의 새 번역에서 잘 표현해주고 있다.

전체적인 브라흐마는 본질적인 프라크리티의 두가지 면, 즉 전개된 면과 전개되지 않은 면(물라프라크리티)이 있고, 또한 영의 면과 시간의 면이 있다. 두 번째 태어난 자여, 영은 지고의 "브라흐마"의 시초의 면이다. 다음에는 이중의 면, 즉 전개한 것들과 전개하지 않고 있는 것들 모두의 프라크리티인 것이고 시간은 마지막 면이다.

오르페우스교의 신통계보학에서도, 신 쿠로노스는(Kronos[Choronos]) 더 높은 신격에서 태어난 신 또는 그의 대리자로서 표시되어 있다.


신성한 상징학에서는, 우주가 다시 깨어날 때 그의 단계를 중심적인 점의 완전한 원으로 해서 표현하고 있다. 이런 표시는 보편적이었으므로, 카발라에서도 발견된다. 그러나 지금의 서구의 카발라가 기독교 신비가의 손안에 들어 있어서, 그것이 지혜의 서 「죠하르」에 명백히 표시되어 있는데도 이것을 무시하고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은 파벌심을 지니고 있는 무리들은 순서를 뒤죽박죽으로 해 놓았다. 라고 하는 기호를 "장미와 십자의 합일", 말하자면 오컬트에서 생식(生殖)의 대신비라고 말해, 발생이전의 대우주로 표시하고 있다. 여기에서 장미십자회(Rosi-crusians)라는 이름이 나왔다고 말한다.(Rose Cross)!


그러나, "장미십자회의 상징"으로 가장 잘 알려져 있고, 가장 중요한 것으로 판단해보면, 근대 신비가들조차 지금까지 알수 없었던 아주 중요한 것이 하나 있다. 그것은 일곱 마리의 새끼를 먹이기 위해 가슴을 찢어 열어 젖히고 있는 어미 펠리칸의 상징이다. 그것은 진정한 장미십자 동포단의 신조를 나타낸 것으로 동양의 비밀의 가르침으로부터 직접 온 것이다. 브라흐마(중성)는 카라함사(Kalahamsa)라고 불리는데, 서구의 동양학자들의 설명에 의하면, 그것은 영원한 백조 혹은 두루미를 뜻한다고 한다.(스탠저Ш 주석8 참조). 그러므로 창조자 브라흐마는 카라한사라고 말한다. 여기서 커다란 오류가 생긴다.

한사-바하나(Hansa-v hana)(백조를 자신의 탈것으로 사용하는 자)로 불리어져야 하는 중성의 브라흐마(Brahma)는 창조주인 브라흐마(Brahm )와는 다르다. 스탠저의 주해에 따르면 창조주 브라흐마는 진실한 카라한사이고 중성의 브라흐마는 함사(hamsa), 그리고 아-함사(A-hamsa)라고 한다. 브라흐마와 파라브라흐맘이라고 하는 말을 여기서 쓰고 있는 것은 그 말이 비교적인 술어(術語)이기 때문이 아니라, 서구의 학도들에 잘 알려져 있기 때문인 것을 이해해주었으면 좋겠다. 양쪽 다같이 비교의 1모음어, 3모음어 7모음어와 완전한 동의어이고, "유일의 모든 것(the ONE ALL)"과 "모든 것 속에 계시는 온전한 전체(the One All in all)"를 나타낸다. 
이상이 「씨크릿 독트린」의 기본 개념이다.

여기에서 이 개념들이 품고 있는 고유의 합리성을 옹호하거나 증명하는 것은 적절한 것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또 이러한 개념들이 기존의 유수한 사상에서 외관에 나타내고 왜곡되어있는 경우가 있으나, 이러한 개념을 모든 사상과 철학의 이름에 알맞게 넣어주기 위해 기본적인 비밀의 가르침에서 탈선 할 수는 없다.


어쨌거나 독자들이 이런 개념을 명백히 이해하고, 살면서 문제에 부딪힐 때마다 이로 인해 빛을 깨닫는다면, 이것들을 더 이상 증명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이런 진리는 혹자에 있어서 하늘에 떠있는 태양처럼 분명하며 당연한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제 독자들에게 책에 나와있는 주제로 넘어가 더 이해를 돕는 뜻에서 일반적인 개념을 짧게 표시하고 그 뼈대와 개요를 덧붙여 가면서 "스탠저"의 내용으로 진행하고자 한다.

스탠저에 나와 있는 우주진화의 역사는, 말하자면 진화라고 말하는 것은 추상적인 대수식(代數式)인 것이다. 따라서, 거기에서 "우주"의 진화의 시초 출발과 우리들의 현재상태 사이에 있었던 모든 단계와 변화를 모두 설명할 것이라고 너무 기대해서는 안 된다. 그런 설명은 현재, 존재계의 바로 옆에 있는 다른 존재계조차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의 의식으로는 어떤 방법으로 설명해도 이해시킬 수 없는 것이다.


따라서, "스탠저"에서는 적절하게 변형시켜 모든 진화에 응용 할 수 있는 추상적 공식만 제시되어있다. 이를테면 우리의 조그마한 지구의 진화에서 시작해서 이 지구가 속하는 혹성체인의 진화와 또 그 혹성 체인이 속하는 우리들 태양계 우주의 진화 등에 관해서 설명할 것이다. 정신이 가고자 하는 곳까지 따라가서 알고자 한다면 지칠 때까지 계속해서 더 넓은 세계, 점점 더 높은 단계의 진화에 응용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책의 "우주의 발생"편에 소개되는 일곱의 항목은 진화의 일곱 단계를 나타낸 것이다. 고대 인도의 신화, 전설, 왕조사 등을 기록한 흰두교의 성전인 「푸라나(Purana)」는 열 여덟 권으로 되어 있다. 이 「푸라나」에서는 "일곱의 창조"라고 말하고 있고, 기독교의 성서에서는 창조의 "일곱 날들"이라 말하고 있으며, 그의 진화의 경로인 일곱 단계를 "스탠저"에 표시하면서 설명하고 있다.

첫 번째 스탠저은 다시 깨어나서 현현의 날개 짓을 하기 직전의 프랄라야 동안의 유일한 전(全)의 상태를 묘사하고 있다.


조금만 생각해보면 이런 상태는 상징적으로 표현될 수 있을 뿐, 묘사가 불가능함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또 그리고 이것은 부정어 이외의 말로는 표현 할 수 없다. 왜냐하면, 이것은 절대적 상태이기 때문에 긍정어의 말로 대상을 묘사하는데 필요한 특성이나 속성 같은 것이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상태는, 인간 자신의 개념작용의 힘이 미치지 못하는 아득히 먼 한계로 생각해야 한다. 혹은 오히려 가장 추상적인 속성 모두를 부정해서 암시하고 있을는지 모르겠다.

스탠저 II에 그려져 있는 상태는, 서구인에 있어서는 스탠저 I에서 말하고 있는 것과 거의 같다. 그 차이를 표현하기 위해서는 그 나름의 논설이 필요하다. 그러므로 써진 우화적인 말의 뜻을 이해하는 것은 보다 높은 직감과 더 높은 능력에 달려있다.
실제로 이러한 스탠저의 모든 것은 이해하는 능력은 육체 두뇌에서 나오는 보통의 이해력이 아니고 내적 능력에 호소해야하는 것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스탠저 III는 프랄라야 다음에 다시 우주가 생명으로 깨어나는 것을 설명하고 있다.
유일의 것 안에 흡수되어있는 상태에서 "모나드들(Monads)"이 나오는 것을 묘사하고 있다. "세계"의 형성에 있어 가장 최초이자 최고의 단계이다. 모나드라고 말하는 언어는 광대한 태양계에도 가장 작은 원자에도 동등하게 쓰여지는 것이다.

스탠저 IV는 우주의 "씨눈"이 의식적인 신성한 권능의 칠중의 하이어라키로 분화하는 것을 설명하고 있다. 의식적인 신성한 권능은 유일한 지고의 에너지의 활동하는 현현물이다. 그들(이러한 힘)은 이 현현된 우주의 틀을 만들고 모양을 형성한, 궁극적으로 "창조주"라는 이름이 붙여질 수 있는 존재들이다. 그들은 전달자이자 안내자이며 진화를 조절하고 통제하는 지적 존재이고, 우리들이 "자연의 법칙"이라고 알고 있는 유일의 법칙이 구현한 존재이다. 그들은 궁극적으로 드얀 초안(Dhy ni-Chohans)이라고 알려져 있지만, 「씨크릿 독트린」에서는 각각의 성격에 맞게 다양한 명칭으로 불린다.

스탠저 V에서는 세계의 형성 과정에 대해 말하고 있다. 첫 번째는 확산되어 있는 우주질료의 단계이고, 다음은 성운이 형성되는 첫 번째 단계인 불의 소용돌이에 관해서 쓰여져 있다. 성운이 응축해 여러 가지 변질의 과정을 거쳐서, 상황에 따라 태양계 우주, 하나의 혹성 체인 혹은 하나의 혹성을 형성한다.

스탠저 VI에는 세계가 생겨나는 여러 단계를 설명하고 있다. 진화가 일어나서 이러한 세계는 네 번째 커다란 주기(제 4라운드)까지 왔다. 네 번째 주기는 지금 우리들이 살고 있는 시대에 해당한다.

스탠저 VII은 생명이 하강하며 인간의 출현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을 뒤쫓으면서 역사의 실마리를 풀고 있다. 그리고 「씨크릿 독트린」 제 1 권이 끝난다.

이번 라운드에서 지구에 처음으로 인간이 나타나 지금 상태에 이르기까지의 인간의 진화에 대한 것이 2권의 주요 내용이다.


각 서

특정한 주제로 되어있는 각각의 스탠저는 모두 현대적인 번역으로 되어 있다. 원전에서는 옛날의 케케묵은 어투나 수수께끼 같은 문체와 단어를 소개해서 문제를 한층 더 어렵게 만드는 것은 유해무익한 것이기 때문이다.

발췌한 「쟌의 서」는 원래의 센자르어로 된 주석서를 중국어(한문), 티베트어, 산스크리트어로 번역해 놓은 것에서 추려낸 것이다. 그리고 이제 처음으로 유럽의 언어로 옮겨졌다. 말할 나위도 없이 여기에 주어진 일곱 개의 스탠저는 단지 일부분일 뿐이다. 설령 스탠저를 완전하게 출판한다 해도, 소수의 실력 있는 오컬티스트외에는 불가해한 것으로 남을 것이다. 많은 일반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이 필자-오히려 보잘것없는 기록자라고 말하는 것이 더 낳을 것 같다-에게도 그와 같은 금지되어 있는 부분은 알 수가 없다. 읽기 쉽게 하고 또 너무 많은 각주를 피하기 위해, 스탠저의 본문과 주석을 섞어버리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라 생각했다. 또 고유명사를 써야만할 경우 원전에 있는 말 대신에 산스크리트어나 티베트어로 옮겨진 단어를 쓰도록 했다. 왜냐하면, 산스크리트어나 티베트어의 역어는 승인 받은 동의어인 것이고 원전에 나온 말은 대사와 그의 제자들 사이에서만 쓰여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만약 티베트어나 센자르어판의 한곳에서만 쓰여져 있는 명사나 전문어만 써서 영어로 번역했다고 가정한다면 스탠저1은 다음과 같은 꼴이 된다. "지규안의 토오그는 일곱 코르로안에서 잠자고 있었다. 모든 녕은 가슴안에 있었다. 콘치 호그는 아니다. 쓰얀 캄도 아니고 라 코한도, 텐브렐 츄그니도 아니었다. 다르마카야는 멈추었다. 쓰젠챤은 시작하지 않았다. 니그본이즈안에는 바르낭 과 싸가 있었다. 순 찬과 양 그르브의 밤에는 토 오그 옌신만이 있었다. (파라니쉬판나), 등등" 이것은 순전히 주문과 같은 소리로 들릴 것이다.


이 저작은 오컬티즘의 학도의 교육을 위해 쓰여진 것이며, 언어학자를 위해 쓰여진 것은 아니기에, 가능한 이와 같은 외국어는 쓰지 않는 편이 좋다고 생각한다. 번역할 수 없는 용어, 즉 그 의미를 설명해주지 않으면 이해할 수 없는 용어는 모두 산스크리트어의 형으로 남겨 두었다. 이러한 산스크리트어는 거의 모든 경우가 후기 산스크리트어 중에 비교적 최근에 발달한 것들이고 제 5근본인종들의 것이다. 지금 현재 알려져 있는 산스크리트어는 아틀란티스인의 언어로 사용되지 않았다. 마하바라탄(post-Mah bh ratan) 시대 이후의 인도 철학체계 안에 쓰여져 있는 대부분의 철학 용어는 베다에서는 발견되지 않으며 원전 스탠저에서도 볼 수 없다. 단지 동의어만이 발견될 뿐이다.

 

다시 말하지만 신지학도가 아닌 독자는 지금부터 나오는 모든 것을 아이들에게 들려주는 옛날 이야기들이라고 생각해도 아무 상관없다. 겨우 몽상가들이 말하는 입증되지 않은 추측의 하나라고 생각한다면 매우 좋고, 최악의 경우에는 억측이나 확실하지 않은 과거, 현재, 미래의 많은 과학적 가설에 덧붙여진 가설로 생각해도 좋다. 그렇다해도, 소위 과학적 이론이라 불리는 것들보다는 훨씬 분별적이며, 모든 경우에서 보다 더 철학적이고 있음직한 것들이다.


필요한 것이라 생각되는 많은 주석과 설명은 보통 각주로 쓰고 있으나, 스탠저의 주석이 필요한 문장에는 기호로 표시를 했다. 추가로 필요한 부분은 제 2부, 그리고 3부에 있는 상징주의에서 다루고 있다. 이것들에는 본문보다 더 충분한 정보가 주어져 있는 경우가 많다.

?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