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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크릿독트린

2017.03.19 01:57

스탠저 Ⅰ 우주의 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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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영원한 어버이(공간)은 언제나 눈에 보이지 않는 그녀의 옷에 싸여져서, 7개의 영원(永遠) 동안에, 또 다시 깊은 잠에 들어갔었다(a). 

“어버이 공간”은 영원하고 언제나 존재해 있으며, 모든 것들의 원인이다. 말하자면, 이해할 수 없는 신성이고, 그의 “눈에 보이지 않는 옷”은 신비스럽게도 모든 물질과 우주의 근원이기도 하다. 공간이란 우리들에게는 가장 쉽게 상상할 수 있는 유일하고 영원한 것이며, 그것은 추상적인 것으로서의 부동(不動)이며, 객관적으로 현현한 우주가 공간 안에 있든지 없든지 간에 전혀 영향을 받지 않는다. 공간이란 어떠한 의미의 차원도 없으며, 스스로 존재하고 있다. 영이란 영과 물질 양쪽의 원인 없는 원인인 그것에서부터 시초로 분화된 것이다. 비교(秘敎)문답으로 가르쳐주고 있는 것처럼, 공간이란 무한의 공허도 아니고, 제한된 충만도 아니며, 양쪽 모두인 것이다. 공간은 존재해 왔으며, 이 시각 이후에서도 언제까지나 계속 존재할 것이다.(프로엠 pp.60 참조).


그러므로, 옷은 분화되지 않은 우주물질의 원체(原體)를 말한다. 이는 우리들이 알고있는 그러한 물질은 아니고, 물질의 영적 에센스인데, 추상적인 뜻으로서 말한다면, 공간과 영원히 공존하며 심지어 일체라고 할 수 있다. 
근원적 자연이나 눈에 보이는 물질중 이 절묘한 눈에 보이지 않은 특성의 뿌리이다. 그것은 유일하고 무한한 영의 혼이다. 힌두교에서는 이것을 물라프라크리티(Mūlaprakṛiti)라고 부르며, 이것이 원초의 질료라고 말한다. 원초의 질료는 육체적, 정신적, 사이킥적 모든 현상의 우파디(Upādhi), 즉 매체의 기초이다. 원초의 질료는 아카사(Ākāśa)가 방사되어 나오는 원천이다. 

(a) 일곱 개의 영원이란 긴 시대 혹은 주기를 말한다. 기독교 신학에서 이해하고 있는 의미의 영원이란 말은 아시아인들의 귀에는 유일의 실재에 적용되지 않을 때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그리고 먼 옛날에 붙여서 말한 언어들도 미래에 있어서만 영원이라는 것이고, 잘못 쓴 용어일 뿐이다. 이와 같은 용어는 도리에 맞는 형이상학에서는 존재하지 않고, 또 있을 수가 없다. 그리고 교회제도란 크리스트교가 출현하기 이전에는 알지 못한 것이었다.


일곱 개의 영원이란 만반타라(Manvantara)의 일곱 회기에 해당하는 기간이며, 총계 311,040,000,000,000년이 되며, 브라흐마(Brahmā)의 100년이고, 마하-칼파(Mahā-Kalpa) 즉 대시대(大時代)동안 계속된다. 브라흐마의 1년은 360일의 브라흐마의 낮과 밤(찬드라야나Chandrayāna, 즉 태음력으로 계산하면)으로 구성되어있다.1)

각주1)==========================================

책, <비쉬누 푸라나Vishnu Purana>의 2권 8장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불사(不死)라는 것은, 칼파가 끝날 때까지 존재한다.” 그래서 번역자 윌슨(Wilson)은 각주에서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베다에 의하면 신들의 불사성(영원성)은 이런 것에 불과한 것이다. 신들은 우주 붕괴(각주2)의 기간 즉, 프랄라야(Pralaya)에서 멸망한다.”<영역2권 269p> 그리고 비교철학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들은 멸망하는 것이 아니고 다시 흡수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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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라흐마의 하루는 인간에게 있어서 4,320,000,000년이다. 이와 같은 영원은 아주 비전적인 계산으로 산출된 것이며, 그 계산에서 진정한 총계를 얻어내려면 모든 숫자는 7x(7의 x승)이어야 한다. x는 주관적, 즉 진정한 세계의 주기의 성질에 따라 여러 가지가 된다. 또 객관적으로 말한다면, 진실이 아닌 세계에서의 최대 주기로부터 최소의 주기에 이르는 각양의 다른 차이가 있는 주기에 관계가 있거나, 그의 주기를 표시하고 있는 모든 수는 반드시 7의 배수여야 한다. 이것에 관하여 설명할 수 있는 열쇠는 줄 수가 없다. 여기에는 비교적인 계산의 신비가 있기 때문이고, 보통의 계산으로서는 아무런 뜻이 없다.


“7이란 수는 신성한 비의(秘儀)에서 가르쳐 주고있는 위대한 수이다.”라고 카발라에서는 말한다. 
10 즉, 피타고라스의 데케이드(decad)는 인간의 모든 지식을 상징하는 수이다. 1,000은 10의 3승이고, 그러므로 7,000이라는 수는 상징적인 의미가 있다. 
씨크릿 독트린에서 4라는 숫자와 수는 최고의 추상계에서만 남성의 심벌이다. 물질세계에서는 3이 남성이고 4는 여성으로, 상징의 네 번째 단계에 있는 수직선과 수평선이며, 그때 그 상징들은 물질계에서 생식력의 심벌로서의 상형문자가 된다. 


2. 시간이란 것은 없었다. 계속의 무한한 품안에서 깊은 잠에 들어 있었기 때문이다(a). 

(a)시간이란, 우리가 영원한 계속 속에서 여행을 해가고 있을 때, 우리의 의식상태의 연속에 의해 만들어져 나온 환영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환영을 만들어 낼 수가 있는 의식이 존재하지 않는 곳에서는 시간은 존재하지 않고 깊은 잠을 자고있다. 현재란, 영원한 계속(繼續) 중에서 우리들이 과거라고 말하고 있는 부분과 미래라고 말하고 있는 부분을 수학적으로 나누어주는 선에 불과하다. 지구상의 어떠한 것도 진정한 의미의 계속은 없다. 1초의 10억분의 1 동안일지라도 변화하지 않고, 그대로 멈추어 같은 상태로 머무르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또, 현재라 말하는 시간의 구분에 관해 우리들이 지니고 있는 현실 감각은, 미래라 말하는 이상의 영역에서 과거라고 말하게 되는 기억의 영역으로 사물의 감각이 옮겨져 가고 있을 때에, 우리들의 오감이 잡아낸, 거기서의 사물을 희미하게 언뜻 보게되는 것 또는 그러한 것의 연속에서 오는 것이다. 순간적으로 전기의 스파크를 보았을 경우, 망막에 선명하지 못한 상태로 남은 상(殘像)에서 만들어지는 것에 지속감을 경험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진정한 인간이나 사물은 어느 특정한 순간에 물질을 거쳐가는 일의 총계이다. 바닷물 속으로 떨어진 금속으로 보이는 것만으로 되어 있는 것이 아니고, 그것이 물질 형체로서 나타났을 때부터 이 세상에서 사라져 없어지는 순간까지 여러 가지로 변화해 가는 상태 모두의 총합으로서 구성되어 있는 것이다.

 

미래 안에 영원히 존재해 있는, 과거 안에 영원히 존재하려 해서, 차츰차츰 된 봉(棒)은 공중에서 나온 순간에 존재하고, 물에 떨어졌을 때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또, 그것이 어느 순간에 대기와 대해를 분리 해버리거나 동시에 결합시키거나 하는 수학적인 평면과 일치하는 단면으로만 되어있다고 주장하는 사람은 없다. 사람들과 사물의 경우 또한 그와 같다. 그것들은 “있을 수 있는 일”에서 “지금까지 있었던 일들”로, 말하자면 미래로부터 과거로 떨어져, 하나의 영원에서 다른 영원으로 옮겨가는 동안에, (물질로서) 시간과 공간을 거쳐가는 때에, 우리 인간의 감각에는 순간적으로 그것들의 총계적 자아의 단면을 보여준다. 그리고 영원의 과거와 영원의 미래가 계속(繼續)을 구성한다. 만약 우리들의 감각이 인식할 수만 있다면, 어떠한 것이든 진정으로 존재하고 있는 그 계속을 이 둘이 구성하고 있다. 


3. . . . . 우주 마인드는 없었다. 우주 마인드를 포함할(그러므로 현현시킬) 아히(Ah-hi, 천상의 존재들)가 없었기 때문이다(a). 

(a) 마인드란 생각, 의지, 감정으로 뭉쳐진 의식의 여러 상태의 총계에 붙어지는 명칭이다. 깊이 잠에 빠져든 상태에서는 물질계에서의 개념작용은 정지해 있고, 기억도 중지된다. 따라서, 잠시동안에는 “마인드는 없다”. 물질계에서 자아가 개념구성이나 기억을 나타내는 몸체의 기관은 일시적으로 기능이 정지해 있다. 본체가 어떤 존재계의 현상이 되기 위해서는, 적당한 기초, 혹은 매체를 통해서 나타내지 않으면 안 된다. 또 프랄라야(Pralaya)라고 말하는 긴 세월의 휴식의 밤 동안, 모든 존재물이 사라져 잃어버린 때(뒤), “우주 마인드”는 정신활동이 일어날 수 있는 영원한 가능성의 상태가 되어 추상적 절대 사고로서 존속한다. 마인드는 이 사고가 구체적이고 상대적으로 나타난 것이다.


아-히(디야니-초한들Dhyāni-Chohans)는 영적 존재들의 집합체이다. 즉, 크리스트교에서 말하는 천사의 무리이고, 유태교의 엘로힘(Elohim)과 “사자(使者)들”이며, 신성과 우주적인 생각과 의지를 나타내기 위한 매체인 것이다. 그들은 자연계에 그의 “법칙”을 주어, 일을 하게 하는 지적인 힘들이기도 하지만, 그들 자신도 더 높은 힘들에 의하여 똑같이 그들에게 부과되어있는 법칙을 따르는 일을 하고 있다.


그러나, 잘못 생각해 오고 있는 것은, 그들은 자연의 여러 가지 힘들이 "인격화되어 있는 존재"는 아니라는 것이다. 영적인 존재들의 이러한 위계구조를 통하여 우주 마인드가 활동하는 것이지만, 이것은 국가에서 전쟁 수행 능력의 힘을 나타내는 군대와 같은 것이며, 군단, 사단, 여단, 연대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각각, 다른 개성 혹은 생명 및 한정되어 있는 행동의 자유와 한정되어 있는 책임을 가지고 있다. 한 단위 각각은 더 큰 단위 안에 포함되어 있고, 보다 큰 단위의 목적을 따른다. 또 각각의 단위 안에는 더욱 더 작은 단위가 포함되어 있다. 


4. 지복(모크샤(Moksha) 혹은 니르바나)에 이르는 7개의 길(道)은 없었다(a). 불행의 대원인(大原因: 니다나Nidāna와 마야)은 없었다. 그 원인을 생기게 하고, 그 원인에 속박되는 것은 하나도 없었던 것이다(b).


(a) 비존재라고 말하는 지복에 이르는 일곱 개의 길이 있다. 비존재란 절대적인 존재와 절대적인 의식이다. 그런 일곱 개의 길은 없었다. 왜냐하면 우주는 아직까지 텅 비어있어 신성한 생각 속에서만 존재해 있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 . . . 

(b) 12니다나는 십이연기 즉 12의 존재의 원인을 말한다. 하나 하나는 그의 이전의 원인의 결과였었고, 하나의 원인은 또 다음에 오는 결과에 있어 원인이 된다. 연기의 총계는 고집멸도(苦集滅道)라고 말하는 사제(四諦)에 뿌리를 두고있다. 이것은 소승불교체계의 특징적인 학설이다. 연기(緣起)는 공죄(功罪)를 생겨나게 하고, 끝내는 카르마를 완전하게 작용하게 하는 일련의 법칙의 흐름을 설명하는 이론의 일부이다.


현생에 살고 있다는 것은 인간에게 고생스러움, 불행, 고통을 안겨주는 것뿐임으로 윤회는 무서운 것이라고 말하는 위대한 진리를 뿌리로 삼고 있다. 죽어서라도 인간은 윤회로부터 해방될 수가 없다. 죽음은 잠시 동안 새로운 육체에 화신하기 위해 머무는 기간에 불과하다. 말하자면 데바찬에서 잠시 휴식하고 지구에 와서 다른 인생의 삶에 옮겨가는 과정이다. 히나야나(Hīnayāna) 체계 즉, 소승불교는 먼 옛날부터 있었던 것이고, 또 한편으로는 마하야나(Mahāyāna)는 석가모니가 죽은 후 시작된 후대의 것이다.


그렇지만 마하야나의 교의 역시 기억 해낼 수 없을 정도의 고대로부터 내려왔다. 소승이나 대승의 가르침은 사실 똑같은 것이다. 
야나(Yāna) 즉, 타는 것(산스크리스트어의 바하나Vāhana)은 신비적인 표현이며, 두 개의 "탈것들"은 똑같이 환영과 무지의 산물을 없에 버릴 수가 있는 유일한 것, 즉 지혜와 지식을 얻어냄으로써 인간은 재생의 고통에서부터 벗어날 수가 있으며, 데바찬에서의 거짓된 지복도 벗어날 수 있다고 가르친다.


마야, 즉 환영은 모든 유한한 것을 일으키는 요소이다. 감추어져 있는 원체(原體)가 관찰자에게 보여주는 외관은 관찰자의 인식력의 정도 여하에 따르는 것으로,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상대적인 현실성이 있을 뿐이고, 절대적인 현실성은 없기 때문이다.


미개인의 훈련되어 있지 않은 눈에는 한 폭의 그림이 아무런 뜻도 없는 줄과 색칠을 해둔 것에 불과 하지만, 교양이 있는 사람의 눈에는 전혀 달라서 얼굴이나 경치를 느낀다. 모든 실재의 원체 안에 감추어져있는 유일한 절대적 존재 외에는 영구 불변한 것은 없다. 최고의 디야니-초한들에 이르기까지, 모든 존재계에 속해 있는 존재물은 무색의 스크린에다 환등기에 의해 투영된 영상과 좀 닮아 있다. 그러나, 모든 것들은 상대적인 관점에서 볼 때 진실이다. 왜냐하면, 인식자도 역시 반영(反映)된 것이고, 따라서 인식된 것들은 인식자 자신처럼, 그에게 있어서는 진실이기 때문이다. 여러 가지 것들이 가지고 있는 모든 진실성을 찾기 위해서는 그것들이 섬광처럼 물질계를 지나쳐 가버리기 이전이나 이후에 그들 자체 속에서 찾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나, 의식분야에서 물질적인 것밖에는 다룰 수가 없는 감각기관을 지니고 있는 한, 우리들은 그와 같은 실재를 직접 인식할 수가 없다. 우리의 의식이 어떤 계에서 활동하고 있어도, 그 계에 속하고 있는 우리들이나 사물들은 당장 그 동안에는 유일한 현실이다. 점점 발달의 정도가 올라갈수록, 우리들이 지나온 단계 동안에 그림자였던 것을 실재로 잘못 보아왔다고 느끼게 된다. 또 자아의 향상이란 점진적으로 눈을 떠가는 일련의 과정이며, 어떤 단계의 진보일지라도 이제는 드디어 진실에 도달하였다는 생각을 하게된다. 그러나 우리들이 절대적 의식에 도달해서, 우리들 자신의 의식이 절대의식과 융합할 때 비로소 우리들은 마야에 의해 만들어졌던 망상으로부터 해방될 것이다. 


5. 암흑만이 무궁한(無窮限) 전체를 채우고 있었다(a). 아버지와 어머니와 자식은 아직까지 일체를 이루고 있었기 때문이다. 자식은 새로운 차륜(車輪)과 그 차를 타고 자신의 순례를 하기 위해 깨어나지 않았기 때문이다.(b) 

(a) “암흑은 부(父)-모(母)이고, 빛은 자식”이라고 동양의 옛 격언에서는 말하고 있다. 빛은 그 원인이 되는 뿌리로부터 왔다고 말하는 것 외에는 전혀 상상도 할 수 없다. 그리고 원초의 빛의 경우에는 이성이나 논리를 통해 아무리 설명하더라도 그 근원을 모르기 때문에, 지적 관점에서 우리들은 어둠이라 부르고 있다. 어디에서 비추어지는 종속적이 빛은, 그 근원이 무엇이었든지 간에 일시적인 환영의 성격을 띌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어둠은 빛의 뿌리가 나타났다 사라졌다하는 모체인 것이다. 이러한 우리들의 세계에서는 어둠을 빛으로 만들기 위해 어둠에 더 보탤 것이 아무 것도 없고, 빛을 어둠으로 만들기 위해서도 빛에 보태어 줄 것이 아무 것도 없다. 어둠과 빛은 서로 교체할 수 있는 것이고, 과학적으로는 빛은 어둠의 한 형태이고, 어둠은 빛의 한 형태이다. 더구나, 쌍방 모두가 같은 원체의 현상인 것이다.


이러한 원체는 과학적인 마음에 있어서는 절대적 어둠이고, 일반적 신비가들의 지각력에서는 회색의 흐린 밝기 정도에 불과하다. 그렇지만, 비전가의 영적인 눈에서는 절대 빛이다. 어둠에서 반짝이는 빛을 어느 정도까지 통찰해내는가는 우리들의 시력 여하에 달려있다. 우리들에게 있어서 빛은 어느 곤충들에게는 어둠으로 보인다. 마찬가지로 투시가들의 눈은 보통의 눈으로는 암흑으로밖에 보이지 않는 곳에서 빛을 본다. 전 우주가 잠들어 있을 때, 말하자면 원초의 유일의 원소로 돌아갔을 때에, 광휘의 중심이나 빛을 인식할 수 있는 눈도 없었다. 어둠은 필연적으로 무궁한 전체를 채우고 있었다. 

(b) 아버지-어머니는 근원적 성질의 측면에서 남성 원리와 여성 원리로서, 코스모스의 모든 계에 있는 모든 것들 속에 나타나는 상반하는 양극인데, 비유적인 표현을 쓰지 않고 말하면 영과 물질이다. 이 영과 물질에서 생겨나는 것이 자식인 우주이다. 이것들은 브라흐마의 밤, 프랄라야 동안에 객관적 우주의 모든 것들이 원초의 영원한 원인으로 돌아갈 때 “다시 일체”가 된다. 그리고는 다음의 새벽이 찾아들면 다시 나타나기 시작한다. 그것이 주기적으로 행하여지고 있기 때문이다. 카라나(Kāraṇa), 즉 영원의 원인은 고독(孤獨)했었다. 좀 더 확실히 말하면, 브라흐마의 밤 동안은 카라나만이 있는 것이다. 이전에 있었던 객관적 우주는 원초적인 영원한 원인 속으로 녹아 들어 있었다.


다시 말해, 다음 차례의 만반타라의 새벽에 다시 분화를 시작하여 새로운 결정(結晶)을 해서 나오기 위해 공간 안에서 용해된 채로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다음의 만반타라의 새벽은 브라흐마의 새로운 하루의 시작이며, 브라흐마(우주의 상징)의 새로운 활동이 시작이 된다. 비교적(秘敎的)으로 말하면 브라흐마는 동시에 부-모-자식이고, 또한 영과 혼과 체이다. 부와 모와 자식은 각각 하나의 속성을 나타내는 상징이고, 각 속성 또는 특성은 그의 주기적 분화 즉, 내려오면서의 진화와 올라가면서의 진화 안에서 신의 숨이 차례로 흘러나오는 것이 된다. 우주 물리상으로 말하면, 그것은 우주와 혹성체인과 지구이고, 순수한 영적인 뜻으로는 알아낼 수 없는 신과 혹성 영과 인간을 의미한다. 인간은 양자(兩者)의 자식이며, 영과 물질의 창조물이고, 제(諸) 차륜, 즉 만반타라 동안 지구에서의 주기적인 출현에 있어서는 양자(兩者)의 현현인 것이다. (Part Ⅱ “브라흐마의 낮과 밤”을 보라) 

6. 일곱의 장엄한 주(主)들과 일곱의 진리는 존재하는 것을 그만두고 있었다(a). 우주, 즉 필연의 자식은 있으면서 없는 “그것“에 의해 토해지기 위해, 파라니쉬판나(b)(Paranishpanna) (절대적 완전함, 파라니르바나<Paranirvāṇa>, 시초의 능동적 질료)안에 잠겨 있었다. 아무 것도 없었다.(c) 

(a) 일곱의 장엄한 주란 일곱의 창조 영들, 즉 디야니-초한이고, 히브리어의 엘로힘(Elōhīm)에 해당한다. 그것은 크리스트교 신들의 계보에서 성 미카엘, 성 가브리엘과 다른 천사들이 속하는 대천사의 하이어라키와 같은 것이다. 
로마 교회의 도그마적 신학에서는 성 미카엘은 모든 만(灣)과 갑(岬)을 지키고 있지만, 비교체계에서 디야니(Dhyāni)들은 차례로 다가오는 라운드와 지구 체인의 근본 인종들을 지키고 있다. 게다가 그들은 자신들의 보살들 즉, 디야니-붓다들(Dhyāni-Buddhas)에 상응하는 인간을 각 라운드와 인종 기간에 보내주고 있다고 말한다.


일곱 개의 진리와 계시라고 말하기보다는, 오히려 계시되어있는 비밀 중에서 네 개 만이 우리들에게 내려진 것이다. 우리들은 아직 제4라운드에 머물고 있으므로, 세계에는 지금까지 네 사람의 붓다 밖에 나오지 않았다. 이것은 대단히 복잡한 문제이므로 뒤에 좀더 충분히 다루어야 될 것으로 안다.


지금까지는 “사제(四諦)와 네 개의 베다가 있을 뿐이다”라고 힌두교도와 불교도는 말한다. 똑같은 이유로, 이레나에우스(Irenaeus)는 4복음서의 필요성을 주장하였다. 그렇지만, 새로운 라운드에서 선두에 서게 될 새 근본인종은 그의 계시와 계시자들이 있어야 함으로, 다음 라운드에서는 다섯 번째의 계시와 계시자들이, 또 그 다음 차례의 라운드에서는 여섯 번째의 계시와 계시자들이 오게 될 것이다. 

(b) “파라니쉬판나(Paranishpanna, 圓成實)"는 절대적 완성인 것이고, 모든 실재는 활동의 대기간 즉, 마하-만반타라의 끝날 무렵에는 절대적 완성의 경지에 이르게 된다. 그리고 절대적 완성 속에서 휴식의 기간을 갖게 되는 것이다. 티베트에서는 이것을 용-그룹(Yong-Grŭb)이라고 말한다. 요가차리아(Yogāchāra)학파 시대까지는 파라니르바나의 진정한 성질에 관해서 공개적으로 가르쳐지고 있었다. 그러나, 그 이후에는 완전히 비교(秘敎)로 되어버리고 말았다. 따라서 그것에 관해서 모순된 많은 설명이 행해져 내려왔다. 그것을 이해할 수가 있는 사람은 진정한 유심론자(唯心論者) 뿐이다. 절대적 완성의 상태를 이해하고 또, 어째서 무아(無我)와 공(空)과 암흑이 삼위일체인가, 그것만이 자존이며 완전인 것인가를 알고 싶은 사람은 파라니쉬판나 외에는 모든 것들을 유심(唯心)이라고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나, 파라니르바나는 상대적인 의미에서만 절대적인 것이다. 왜냐하면 다음의 활동기에서는 좀 더 높은 기준에 따라, 더욱 높은 절대적 완성에 자리를 내줘야 하기 때문이다. 만약 아일랜드 식의 표현을 좀 빌리자면, 그것은 마치 완전한 꽃이 완전한 꽃이었던 상태를 끝맺고 꽃이 죽어서 완전한 과실이 되는 것과 같다.


씨크릿 독트린에서는 세계에서부터 원자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들이 끊임없이 진보를 계속하고 있다는 사실을 가르치고 있다. 또한 끝이 없고 한정이 없는 진보는, 생각해낼 수 있는 시작(처음)이 없을 뿐 아니라 상상해 낼 수가 있는 끝이란 것도 없다. 우리의 우주는 헤아릴 수 없는 무수한 우주 안에 있는 하나의 우주에 불과하다. 그리고 무수한 우주는 모두 필연의 자식들이 된다. 왜냐하면 거대한 우주적인 체인에서 하나의 연결고리인 우주 하나 하나는 모두가 앞에 있는 우주와의 관계에서는 결과이고, 뒤에 있는 우주와의 관계에서는 원인이기 때문이다.


우주의 출현과 소멸은 “큰 숨(Great Breath)”의 내쉼과 들이쉼으로 표현되고 있다. 큰 숨은 영원하고, 또 운동이므로 절대자의 세 가지 측면 중하나이다. 추상적 공간과 추상적 계속은 다른 두 측면이다. 
큰 숨이 내쉬어질 때, 이 숨을 신성한 숨이라 부르고, 불가지(不可知)의 신성 즉, 유일한 실재의 숨이라고 생각되고 있다. 이 불가지의 신성은 말하자면 훗날에 코스모스가 될 하나의 생각을 내쉰 것이다. 또 신성한 숨을 다시 들이마셨을 때 “거대한 어머니(Great Mother)”의 가슴속으로 사라져 들어가고, 어머니는 “눈에 보이지 않는 옷을 입고” 깊은 잠에 빠져든다. 

(c) “있지만 존재하지 않는 그것”이란 큰 숨 자체를 말하는 것이다. 그것에 대해서 우리들은 절대적 존재라고만 말할 수 있을 뿐, 비존재들과 구별해낼 수 있는 형(形)의 존재로 상상하여 묘사해낼 수는 없다. 현재, 과거, 미래 세 개의 기간은 비교철학에서는 복합시간인 것이다.


현상계에 관해서 만이 이 셋은 합성 수(數)인 것이고, 원체의 영역에서는 추상적인 타당성은 갖지 못하기 때문이다. 성전에서 말하고 있듯이 “과거는 현재이고 미래이기도하다. 미래는 또한 나타나 있지는 않지만, 역시 있다.” 이것은 마드야미카(Mādhyamika)의 프라상가(Prasaṇga)파의 가르침에 있는 하나의 계율에 의한 것이나, 그것이 순수한 비교적인 학파로부터 떨어져나간 후, 그 학파의 교의가 알려졌다.


쉽게 말해서, 계속과 시간에 관한 개념은 모두가 연상의 법칙에 따라 우리들의 감각에서 나온다. 이 개념이란 인간의 지식의 상대성의 느낌의 테두리 안에 묶여져 있기도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개인의 자아의 경험 속이 아니고서는 존재하지 않으며, 자아의 진화가 현상적 존재라고 말하는 마야를 쫓아버렸을 때 소멸한다. 예로, 우리 의식의 여러 가지 상태가 파노라마적으로 연속되는 것이 아니면, 시간이란 무엇이겠는가? 어느 대사의 말씀에 의하면, “과거, 현재, 미래라는 세 가지의 어설픈 언어로 말을 써야만할 경우, 나는 현기증을 느낄 때도 있다. 주관적 전체의 객관적인 면만을 나타내는 빈약한 개념이라서 목적에 전혀 맞지 않았다. 섬세한 조각을 하는데, 도끼를 쓰는 것과 같은 꼴이다.” 쉽게 “삼브리티(Saṃvṛiti)의 먹이가 되지 않도록, 파라마르타(Paramārtha)를 획득해내어야만 한다.” 


7. 존재의 원인은 제거되어 있었다.(a) 이전에 보였던 것들과 지금은 보이지 않는 것들이, 영원한 비존재 즉 유일의 그것(큰숨)안에 휴식하고 있다.(b) 

(a) 존재의 원인은 과학에서 알려져 있는 물리적 여러 원인뿐만 아니고, 초 물질적인 여러 원인을 의미한다. 초물질적, 다시 말해 형이상적인 원인의 주된 것은 니다나와 마야의 결과인 존재하고 싶다고 하는 욕망이다. 유정(情)의 생명에 대한 이 욕망은 원자에서부터 태양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들에 나타난다. 그리고 이 욕망은 객관적 존재로 촉진되어지며, 우주가 존재해야만 된다고 하는 하나의 법칙이 되는 신성한 생각의 반영인 것이다.


비교(秘敎)에 의하면, 존재하고 싶은 욕망 및 모든 존재의 참된 원인은 영원히 감추어져있는 상태이며, 그 원인에서 최초로 유래한 발산물은 마인드가 인식해낼 수 있는 가장 완전한 추상적인 것들이다. 그러한 추상적인 것들은 당연히 감각이나 지성의 대상으로 나타나는 물질우주의 원인이라고 가정해야만 한다.


그리고 그것들은 자연의 여러 이차적, 종속적 힘의 기초가 된다. 이 여러 힘은 모든 시대에서 일반대중에 의해 신이나 신들로서 의인화되어 숭배를 받아왔다. 원인이 없는 것들을 상상해보는 것은 불가능한 것이다. 원인이 없는 것들을 상상하려고 해보면, 마인드는 공백이 되고 만다.


이것은 실제에서 원인과 결과의 사슬을 거슬러 올라가려고 하면, 마인드로서 최후에 이르게 되어야 할 막다른 곳의 상태인 것이다. 그러나, 과학과 종교는 필요 이상으로 빨리 공백상태로 뛰어든다. 왜냐하면, 물질적 구체물(具體物)에 대해 유일하게 생각할 수 있는 원인인, 형이상학적 추상인 것들을 그들은 무시하기 때문이다. 이런 추상의 것들은 우리들 존재계에 다가설수록 차례로 구체적으로 되어간다. 그래서, 끝내는 형이상적인 것들부터 물리적 현상에의 전환의 과정을 거쳐 지나서 물질 우주의 형체로 구현된다. 그것은 수증기가 물로 응축되고, 물이 얼음으로 응결되는 과정과 닮아 있다. 

(b) 유일의 존재인 영원한 비존재라는 관념은, 우리들이 존재의 관념을 현재의 존재의식에 한정시키고 있는 것을 잊어버리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역설로 보일 것이다.


우리들이 존재라고 말하는 것은 일반적인 용어가 아닌 특수한 용어이다. 아직 태어나지 않은 어린 태아가 우리들이 말하는 의미로서의 존재개념이 있다고 한다면, 어린 태아는 자궁 안에서의 생명밖에 알지 못하기 때문에, 존재의 개념을 필연적으로 태내의 생명에 한정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탄생 후(태어나지 않은 어린 태아로서는 사후)의 생명이라고 말하는 관념을 그의 의식에 표현하려고 노력해도 판단을 할 자료가 없으며, 그와 같은 자료를 이해 할 수 있는 능력도 없다. 아마도 생후의 아기는 생명을 진정한 존재인 것을 비존재라고 표현할 것이다. 우리들의 경우, 유일의 존재는 현상의 근저에 놓여 있는 모든 원체의 본체로 이해하고 있다. 현상이란 것은 실재(實在)의 그림자를 지니고 있는 한, 모두가 유일한 존재에 의하여 주어진 것들이지만, 지금에 있어서 우리들에게는 그러한 것을 인식해낼 수 있는 감각이나 지성이 없다. 일 톤의 석영 속에 흩어져 감지할 수 없는 금의 원자는 광부의 육안으로 인식될 수 없다. 그렇지만 금의 원자가 거기에 있는 것뿐만 아니라, 광부가 캔 석영의 가치를 금의 원자가 높여주고 있음을 그는 알고 있다. 석영과 금의 이런 관계는, 현상과 본체와의 관계를 어렴풋이 짐작케 해 표현하는 것이 된다. 그러나 광부는 금이 석영에서 추출되었을 때 어떻게 보이는지를 알고있다.


그러나 보통의 인간은 베일에 덮여 감추어져 있는 것들의 진정한 모습이 마야와는 분리된 것이라는 것을 전혀 상상하지를 못한다. 
자신보다 이전의 무수한 세대가 획득한 지식에 정통한 비전가만이 마야가 어떠한 영향도 줄 수가 없는 원질(原質)로 당마(Dangma)의 눈을 향하는 것이다. 니다나와 네 개의 진리, 즉 사제(四諦)에 관해서 비교철학의 가르침이 가장 중요함을 가지는 것은 바로 이점 때문이다. 그렇지만, 그것들은 비밀이다. 

8. 존재의 유일한 형체만이 끝없는 무한이고, 원인 없이 꿈이 없는 잠 속에서 넓게 퍼져 있었다(a). 그리고, 우주공간 안에서는, “당마(Dangma)”의 “뜨고있는 눈”에 의하여 느껴지는, 편재하는 모든 것에 빠짐없이 생명인 무의식은 맥동치고 있었다(b). 

(a) 근대 사상의 경향은, ‘외견상으로는 대단히 차이가 있는 것들에도 동질의 기반이 있다’고 말하는 고대의 사상으로 돌아가고 있다. 말하자면 이종(異種)은 동종(同種)에서 발전하였다고 하는 사고방식이다. 생물학자는 요즘, 동질의 원형질(原形質)을 찾아내려고 하고 있으며, 화학자는 원질(protyle)을 찾고 있다. 또 한편 물리학은 전기, 자력, 열 등이 분화해온 원래의 근원의 힘을 찾고 있다.


씨크릿 독트린은 이런 사상을 형이상학의 영역으로 가져가서, 존재의 유일의 형체가 만물의 기반이며 뿌리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아마도 존재의 유일한 형체라고 말하는 용어는 전혀 바른 것이 못된다. 산스크리트어에서는, 그것은 프라바바퍄야(Prabhavāpyaya), 즉 어느 주석자가 말한, 만물이 거기에서 시작되고 거기로 녹아 들어가는 장소 혹은 계(界)이다. 그것은 윌슨이 번역하고 있는 것처럼 세계의 어머니는 아니다. 왜냐하면 핏츠에드워드 홀씨가 표시한 것처럼, 자가드-요니(Jagad-Yoni)란 세계의 어머니나, 세계의 자궁이라고 말하기보다는 거의가 “세계의 실질적 원인”이기 때문이다.


「푸라나」의 주석가들은 카라나, 즉 원인으로 그것을 설명하지만, 비교철학은 그 원인이 이상적인 영이라고 말한다. 그것은 제2단계에서는 불교 철학자가 말하는 스바바바트(Svabhavat) 말하자면, 영원의 원인과 결과, 편재해 있지만 추상적이고, 자존의 가소성본질(可塑性本質)이며 만물의 근원이다. 불교 철학자는 스바바바트를 인도 베단타 학파의 파라브라흐만(Parabrahman)과 물라프라크리티(Mūlapṛakiti)로, 즉 두 가지의 면이 있는 일자(一者)로 생각하고 있다.


베단타파와 특히 웃타라-미만사(Uttara-Mīmānsā)파가 불교의 가르침에 의해 깨우쳤다고 말하는 위대한 학자들의 억측은 정말 놀라지 않을 수 없다고 느껴진다. 그러나 실제에서는 역으로 불교(고타마 붓다의 가르침)는 씨크릿 독트린의 교의에서 “깨우쳐져서“ 그 위에 세워진 것이다.


씨크릿 독트린에 관해서는 여기서 부분적 개관만을 시도해오고 있지만, 실제에서는 우파니샤드 역시 씨크릿 독트린의 교의 위에 세워져있다. 스리 샹카라차리야(Śrī Śaṃkarāchārya)의 가르침에 의하면, 위의 사실을 부정할 수 없다. 

(b) 꿈을 꾸지 않는 잠이란, 동양의 밀교 학파 사이에 알려져 있는 의식의 일곱 상태 중 하나이다. 이러한 상태의 하나 하나에서 마인드의 다양한 부분 중 일부가 작용하게 된다. 즉, 베단타 학파의 입장에서 말한다면, 개인은 자신의 원질과 틀린 다른 세계를 인식하고 있는 것이다.


“꿈이 없는 잠”이라는 말은, 눈을 뜨고 깨어있는 상태에서는 기억하지 못하기 때문에 공백이라고 생각되는 인간의 의식상태에 어느 정도 유사한 상태의 우주를 표현하기 위해서 비유적으로 쓰여지고 있다. 그것은 마치 최면술에 걸린 사람이 의식이 있는 사람처럼 말을 하거나 행동을 하기도 하지만, 그 사람이 원래의 상태로 돌아왔을 때, 자신이 무의식의 공백상태였다고 생각하는 것과 같다. 


9. 그러나 우주의 “알라야(Alaya)”(모든 것들의 기초로서의 영혼, 아니마 문디Anima Mundi)가 “파라마르타(Paramārtha)"(a) (절대적 비존재와 무의식인 절대적 존재와 절대적 의식)안에 있고, 대차륜(大車輪)이 “아누파다카(Anupādaka)”였을때, 당마는 어디에 있었던가(b)? 

(a) 여기에 몇 세기 동안에 걸쳐, 학자들간에 논쟁의 쟁점이 되었던 주제가 있다. 알라야와 파라마르타, 이 용어는 다른 어떤 신비용어보다도 학파를 분열시키고 더욱 다양한 측면으로 진리를 세분시켜왔다. 알라야란 글자 그대로 “세계의 혼” 즉, 아니마 문디이고, 에머슨(Emerson)씨가 말하는 오버 소울(Oversoul)이다. 비교에 의하면, 이것은 주기적으로 그 성질이 바뀐다. 인간이나 우주의 신(디야니-붓다)들도 이를 수 없는 세계에서 알라야의 내면의 본질은 영원 불변한 것이지만, 우리들이 살고있는 세계를 포함해 저급계의 활동적 생명기간 동안에는 변화한다. 그 동안은 디야니-붓다들은 혼과 본질에 있어서 알라야와 일체일 뿐만 아니라, 요가(신비적 명상)를 일구어낸 사람들조차도, 자신의 혼을 알라야에 녹아들게 할 수가 있다.(무착(無着) 즉, 아리야상가(Āryāsaṇga), 부마파(Bumapa) 학파(편주13)). 이것은 열반은 아니며, 열반 전의 상태이다. 그러므로 여기에서 의견의 차이가 생겨난 것이다. 대승불교의 요가차리야파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즉, 알라야는 공(空)의 구현이기는 하지만, 알라야(티베트어에서는 Nying-po와 Tsang)는 보이는 것, 보이지 않는 것의 모든 기초이다. 또 그의 원질은 영원불변한 것이고, “깨끗하며 조용한 수면에 비추어지는 달처럼”, 우주의 모든 것들에 자신을 그려낸다고 말하지만, 다른 학파에서는 이것에 반론한다.


파라마르타(Paramārtha)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요가차리야파는 다른 것들에 의존하는 것들(파라탄트라paratantra)로서 파라마르타를 설명한다. 마드야미카(Mādhyamika)파에서는, 파라마르타는 파라니쉬판나, 즉 절대적 완성에 한정되어져 있다고 한다. 말하자면 (네 개의 진리중) “두 개의 진리”를 설명할 때 요가차리야파는 (아무튼 이 현상계에서는) 삼브리티사트야(Saṃvṛitisatya) 즉, 상대적 진리만이 존재해 있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마드야미카파는 파라마르타 사트야 즉, 절대진리의 존재를 가르친다. “오! 탁발승이여, 아라한은 파라니르바나와 일체를 이루어낼 때까지는 절대 지식에 이를 수는 없는 것이다. 파리칼피타(Parikalpita, 偏計所執)와 파라탄트라(Paratantra)는 그들의 두 개의 대적(大敵)이다.” 파리칼피타(티베트어로는 Kun-tag)는, 모든 것들이 공함과 환영적 성질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범하게 되는 잘못이다. 말하자면 그는 무아(無我)의 것들이 실재하고 있다고 생각을 한다. 그리고, 파라탄트라란 무엇이든 간에, 종속적 관계 또는 인과 관계를 통해서만 존재하고, 그 원인이 제거되기가 무섭게 소멸되어 버리고 만다고 한다. 예로서 촛불의 심지에서 나오는 빛을 들 수 있다. 심지를 짤라버리거나 불을 꺼버리면 빛은 사라진다.


비교철학에서는 모든 것들이 살아있고 의식이 있는 것이지만, 인간의 생명이나 의식과 같은 것은 아니고 동물의 것들과도 다르다고 가르친다. 우리들은 생명이란 소위 물질 속에 나타나 있는 “존재의 유일한 형체”라고 생각하고 있다. 인간에 관해 말하면, 우리들은 생명을 영, 혼, 물질로 잘못 나누어 버린다. 물질은 이 존재계에서 혼이 나타나기 위한 매체이고, 또한 혼은 더 높은 계의 영을 나타내기 위한 매체인 것이다. 그리고 이 셋은 각기 편만해 있는 생명에 의해 총합된 삼위일체이다. 보편적 생명이라는 개념은, 금세기에 인류의 마인드로 차츰 되돌아오고 있는 고대의 개념의 하나이다.


그것은 인류의 마인드가 신인동형론(神人同形論)적 신학에서 해방된 결과이다. 과학이 우주생명의 흔적을 탐구하거나 가정하는 데에 만족하여 아니마 문디(!)라고 속삭이며 말할 정도로 용기도 못 가진 것은 사실이다. “결정체(結晶體)의 생명”이란 생각은 지금의 과학에서는 모두가 알고 있는 것으로 되어있지만, 반세기전이면 어림없는 것으로 무시되었을 것이다. 식물학자들은 요즘 식물의 신경을 탐구하고 있다. 그들은 식물이 동물처럼 느끼고 생각한다고 가정하기 때문이 아니라, 식물생명에도 신경이 동물생명에 대해 가지는 관계와 같이 기능적으로 같은 어떤 구조가 식물의 성장과 영양을 설명하는데 있어 필요하다고 믿기 때문이다.(편주14) 원자이거나, 혹성이거나, 생명을 가진 것은 살아있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은 사실이다. 과학은 힘이나 에너지라는 언어를 써서 자기 기만을 해왔지만 그 사실들을 부정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게 됐다.


그러나 '내적인 비교학파의 신념이란 무엇인가'라고 독자는 물어볼는지 모른다. 이 문제에 관하여, 대체 어떤 가르침이 비교적 불교도에 의하여 가르쳐 지고 있는 것일까? 그들에 있어서 알라야에는 이중적 심지어는 삼중의 뜻도 있다. 대승불교의 요가차리야의 사상에서 알라야는 우주혼(아니마 문디)이기도하고, 진보를 이루어낸 아데프트의 자아이기도 하다. “요가에 능숙한 사람은, 실재의 진정한 성질을 명상하는 것에 의해 자신의 알라야를 마음대로 끌어낼 수 있다.” 알라야는 “절대적, 또한 영원히 존재한다”고 용수(龍樹)(나가르쥬나)의 큰 라이벌인, 무착(無着)(아리야상가)은 말한다. 어느 뜻에서는 그것은 프라드하나(Pradhāna)인 것이다. 그것을 「비쉬누 푸라나」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명되어 있다. 

전개되지 않은 상태의 원인이 되는 것은, 가장 훌륭한 성자들에 의해 프라드하나, 즉 근원적 토대라고 확실히 불리고 있다. 그것은 정묘한 프라크리티(Prakṛiti)에 해당하는 최초의 기초이고, 영원한 것이며, 있는 것(즉, 만물을 포함하는 것)이면서 또한 없는 것, 또는 단순한 과정이다. 

그러나, 프라크리티는 부정확한 용어이며 알라야 쪽이 좀 더 적절하다. 왜냐하면 프라크리티는 “지각하지 못하는 브라흐마”는 아니기 때문이다. 아니마 문디 즉, 유일한 생명 또는 보편적 혼을 아낙사고라스(Anaxagoras)에 의해, 또는 그의 시대에 처음으로 가르쳐졌다는 주장은, 인류의 여러 인종의 요람기에서부터 오컬트의 가르침이 보편적이었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들과 특히 “태고의 대계시”라는 생각 그 자체를 부인하고 있는 학자들의 잘못에서 나온 것이다.


아낙사고라스는 맹목적으로 움직이고 있는 원자라는 현교적 이론에 따른 데모크리투스의 우주론이 너무나도 유물적인 개념인 것이라, 그것에 반대하기 위해서 그런 가르침을 널리 공개했었던 것이다. 아낙사고라스는 플라톤처럼 그 가르침의 창시자가 아니고 전달자에 불과하였다. 그가 “세계의 지성”이라 말했던 노우즈(Nous), 그의 견해에 의한다면, 전적으로 물질에서 떨어져 나와 해방되어있고, 의도(意圖)를 가지고 활동하는 원질은 인도에서 기원전 5세기 훨씬 이전에, 운동, 유일의 생명, 지바트마(Jīvātma)라고 말해지고 있었다. 아리아의 철학자만은, 그들에 있어서 무한의 것인 그 원리에 사고작용의 유한한 속성을 결코 부여하지 않았다.


이런 이야기를 말해가다 보면 당연히 헤겔(Hegel)과 독일 초월론자의 절대정신에 이르게 된다. 그들과 인도철학을 대비해보는 것도 도움이 될는지 모르겠다. 쉐링(Schelling)과 피히테(Fichte)의 학파는 절대적 원리라고 말하는 원래의 개념에서 많이 벗어나서 베단타 학파의 기본적 개념의 일면만을 그려냈다. 폰 하르트만(von Hartmann)이 염세적인 무의식철학 안에 어설프게 나타낸 절대정신(Absolute Geist)조차, 아마 서구인들의 사색에 의하여 힌두의 아드와이티(Adwaitee)의 교의에 가장 가까이 접근한 것이지만, 마찬가지로 실체와는 아주 동떨어져 있다.


헤겔에 의하면, 무의식자는 뚜렷한 자의식을 얻는 것을 기대해보는 것 외에는, 우주를 진화시키는 엄청나고 어려운 일을 결코 할 수 없다. 이것에 관련해서 서구인의 범신론자들은 파라브라흐만(Parabrahman)과 같은 것으로, 무의식으로서 영을 말하고 있지만, 그들이 영이라고 말하는 용어는 보통의 뜻으로 쓰고 있는 것이 아님을 새겨두어야 한다. 무의식이란 용어에는 심오한 신비를 상징하는데 있어 보다 적당한 말이 없기 때문에 쓰여지고 있는 것이다.


현상의 배후에 자리하고 있는 절대의식을 무의식이라고 말하는 것은, 첫째로 인격적 요소가 전혀 없고, 인간의 개념작용을 초월해있기에 그렇게 부른다. 현상을 경험함으로써만 개념을 만들어낼 수밖에 없는 인간으로서는, 자신의 심신의 구조만으로 절대자의 장엄함을 덮어 싸고 있는 베일을 걷어올리기에는 너무 무력하다.


해탈을 이루어낸 영들만이 겨우 자신이 어디에서 생겨났고 최종적으로 어디로 뒤돌아가야 하는가, 그의 근원의 성질을 미약하게나마 이해할 수가 있다. . . . . . 그렇기는 하지만, 최고의 디야니-초한일지라도 절대적 실재의 경외심을 일으키게 하는 신비의 앞에서는 자신의 무지를 인정함과 더불어 머리를 숙일 도리밖에 없다. 그래서 의식적 존재가 최고의 경지에 도달(피히테의 말을 빌리자면 “보편의식에다 개인의식이 용해되는 것”)할 때조차도, 유한 자는 무한 자를 생각해낼 수 없고, 자신의 정신적 경험의 기준을 무한 자에 맞추어 볼 수가 없다. 그러므로 “무의식자”와 절대자가 분명한 자의식을 얻어내 보겠다고 하는 충동이나 기대가 있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베단타 학파는 헤겔학파의 이러한 생각을 결코 받아들이지 않는다. 이런 생각은 눈을 뜬 마하트, 말하자면 변화하지 않은 절대자의 최초의 한 측면으로서 현상계에 이미 투사된 우주마인드에 완전히 적용되지만, 절대자 자체에는 결코 적용될 수 없다고 오컬티스트는 말한다. “영과 물질 또는 푸루샤(Purusha)와 프라크리티(Prakriti)는 유일무이한 존재의 원초의 두 가지 측면에 불과하다”고 우리들은 가르침을 받고있다.


물질을 움직이게 하는 누우스(Nous), 즉 생명을 주는 혼은 모든 원자 안에 있고, 인간으로서 나타나고, 돌 안에서는 잠재해 있으며, 각각에 알맞은 힘을 지니고 있다. 그리고, 대자연 전체에는 영-혼이 편만해 있다고 말하는 범신론적 생각은 모든 철학적 개념 중에서도 가장 오래된 것이다. 아루케우스(Archaeus)는 파라셀수스나 그의 제자 반 헬몬트(van Helmont)가 발견한 것이 아니었다. 왜냐하면 그가 말하는 아르케우스는 고대철학에 나오는 아루케우스 즉, “아버지-에테르”(무수한 생명현상을 현현시킨 기초와 근원)가 한정적으로 나타난 것에 불과한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종류의 무수한 추측은 모두가 이 주제의 변주곡에 지나지 않는다. 그의 주음(主音)은 시초의 대계시안에서 연주되고 있다.(Part Ⅱ "원초적 질료“를 보라) 

(b) 아누파다카(Anupādaka)는 “어버이가 없는” 혹은 “선조가 없는”의 뜻으로, 철학적으로는 몇 개의 의미를 가진 신비적인 용어이다. 이 이름은 천상의 존재들인 디야니-초한이나 디야니-붓다에게 일반적으로 붙인다. 그러나 이들은 마누쉬-(Mānushi, 인간)붓다로 알려진 화신한 붓다와 보디사트바에 신비적으로는 상응하기 때문에, 일단 전인격이 제 6원질과 제7 원질의 합성을 이룬 원질 즉, 아트마-붓디(Ātma-Buddhi)에 녹아 들어가고, 금강혼을 지닌자(바즈라사트바(Vajra-sattvas, 금강살타))로서 완전한 마하트마를 이루게되면, 인간 불타도 아누파다카라고 부르게 된다. “숨어 계시는 주(Sangbtai dag-po)”, 즉 “절대자와 융합한 자”는 자존하고, 스바바바트(Svabhavat)의 최고의 측면인 보편적 영(스바얌부Svayambhū)과 일체이기 때문에 어버이가 없다. 아누파다카의 하이어라키의 신비는 위대한 것이다. 그 정점에는 보편적 영-혼이고, 더 낮은 단계는 마누쉬 붓다이다. 또, 영혼을 지니고 있는 모든 인간은 잠재 상태에서는 아누파다카인 것이다. 따라서 건설자들에 의해 만들어지기 전의 형상이 없는, 영원하며 절대적인 상태에 있는 우주에 관해서 말을 한다면, “우주는 아누파타카였다”라고 표현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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