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탠저 Ⅴ
포하트: 칠중적 하이어라키의 자식
1. 원초의 일곱 즉 지혜의 용의 첫 일곱의 숨들은, 이제 그들의 신성한 회전하는(두루 돌아다니는) 숨들에서 불의 회오리바람을 일으킨다(a).
(a) 아마도, 이 부분이 모든 스탠저 중에서 설명하기 가장 어려운 부분일 것이다. 동양의 우화와 의도적으로 애매모호하게 표현된 우화의 표현에 완전히 정통한 사람만이, 그 말을 이해할 수 있다. 다음과 같은 질문이 반드시 뒤따라 나올 것이다. “오컬티스트들은 건설자나, 리피카나 빛의 자식들을 실재적인 존재라고 믿을 것인가? 아니면, 단지 상상의 산물로 여길 것인가?” 이러한 질문에 대한 대답은 다음과 같이 명확하게 주어진다.
“인격화된 여러 힘들이 상상의 산물이라는 것을 당연히 고려한 후, 만약 육체적 인간 안에 영적인 인간이 존재함을 부정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이러한 실체들이 존재함을 인정해야 한다. 왜냐하면 이러한 빛의 자식들과, 미지의 전(全)(Unknown All)에서 시초로 현현한 광선의 ‘마인드를 통해 태어난 자식들(Mind-Born Sons)’로 이루어진 무리 전체가 바로 영적 인간의 뿌리이기 때문이다.” 인간이 태어날 때마다 특별히 창조된 혼이(이와 같이 새롭게 탄생한 혼들이) “아담” 이후로 매일 쏟아져 들어온다는 도리에도 맞지 않는 도그마를 믿고싶지 않다면, 우리들은 오컬트의 가르침을 받아들여야 한다. 이것에 관해서는, 적당한 곳에서 다시 설명할 것이다. 그러면 이 스탠저의 비교적인 뜻은 무엇인지를 알아보자.
하나의 신성한, 완전한 의식을 지닌 신이 되기 위해서는(최고의 신이 되기 위해서도) 영적인 시초의 지성적 실재들은 반듯이 인간의 단계를 거쳐야만 한다고 「씨크릿 독트린」에서 가르치고 있다. 여기서 인간이라 함은 지구상의 인간뿐만이 아니라 또 다른 세계의 인간들, 즉 우리들이 제 4라운드의 제 4근본 인종의 중기이후 이루었던 것과 같이 물질과 영 사이의 적절한 균형에 도달했던 모든 “지성이 있는 존재들”을 지칭하고 있다. 각각의 실재는, 스스로 경험을 통해서 신이 되는 권리를 자신의 힘으로 얻어내야 한다. 독일의 위대한 사상가 헤겔은, 무의식자(The Unconscious)가 우주를 진화시킨 것은 오직 “명확한(투명한) 자의식(self-consciousness)을 성취하기를 바랬기” 때문이었다고, 다시 말하면 인간이 되기 위해서였다고 말한 것으로 미루어 볼 때 아마 이 진리를 알고 있었으며, 직관적으로 느꼈음에 틀림없다. 왜냐하면, 이것은 브라흐마는 늘 “창조하려고 하는 욕망에 사로 잡혀있다”고 푸라나에서 자주 나오는 말의 숨겨진 뜻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또한 이것은 다음의 격언에 숨겨진 카발라적 의미를 설명해준다. “숨(Breath)은 돌이 되고, 돌은 식물이 되고, 식물은 동물이 되고, 동물은 인간이 되고, 인간은 영이 되고 영은 신이 된다.” 마음의 자식들이나 리쉬들이나, 건설자들 등은, 다른 세계와 이전의 만반타라들에서는 어떤 형상과 모습을 했든지 간에 모두가 인간이었다.
이 문제는 대단히 신비적인 것이므로, 세부사항과 관계를 전부 설명하기가 가장 어렵다. 그 속에는 진화적 창조의 모든 신비가 담겨져 있기 때문이다. 푸라나에 나오는 한 두 문장을 읽어보면, 카발라의 문장과 시편 작가인 다윗 왕의 표현 속에서(시편 104편) 유사한 문장들이 생생하게 떠오른다. 왜냐하면, 카발라와 시편에는 신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신이 바람을 사자(使者)로 삼고, “활활 타오르는 불을 자신의 하인으로 삼는다”고 말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비교에서는, 그것을 비유적으로 표현한다. “불의 바람(Fiery Wind)”은, 마치 쇳가루가 자석을 따라 가듯이, “창조적인 여러 힘들(Creative Forces)”에게서 나오는 통제하는 상념만을 자성(磁性)적으로 쫓아가는 백열광을 발하는 우주진이다. 그러나 이 우주진은 그 이상의 것이다. 왜냐하면 우주에 있는 모든 원자는 자기 의식이 발달할 가능성을 갖고 있으며, 라이프니쯔의 모나드처럼, 그 자체가 하나의 독립된 우주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하나의 원자이며 천사이다.
이와 관련하여, 근대 진화론 학파의 권위자의 한 사람인 왈리스(A.R. Wallace)씨는 육체적 인간의 발전을 설명하는 유일한 요인으로서 “자연도태"는 불충분함을 토의하는 것을 볼 때, 현재 우리가 여기서 논하는 요점을 사실상 전부 인정한다는 것은 주목할만하다. 인류의 진화는 더 높은 지성 있는 실체들에 의해서 지도 받고 촉진되었으며, 그들의 작용은 대자연의 계획에 절대 필요한 요소라고 그는 생각한다. 그러나 이와 같은 지성적 실재들의 활동이 일단 한 곳에서 인정되면, 다른 부분에서도 그들의 활동이 일어나고 있음을 인정하는 것은 당연한 귀결일 뿐이다. 어떤 명확한 선을 그을 수가 없다.
2. 그들은 그를 자신들의 의지의 사자로 삼는다(a). 쥬(Dgyu)는 포하트가 된다. 리피카들의 어버이인 신성한 자식들의, 날쌘 자식(포하트)은 심부름을 순환적으로 수행한다. 포하트는 말(馬)이고 생각은 기수인 것이다.(즉 아버지들이 지시하는 생각(뜻)에 영향을 받는다) 포하트는 번개불처럼 불의 구름(우주의 안개들)을 뚫고 나간다(b). 세 걸음, 다섯 걸음, 일곱 걸음을 걸어, 위로 7개의 영역과 아래의 7개의 영역―존재하게 될 세계―에 들어간다. 그는 목소리를 드높여, 무수한 불꽃들(원자들)을 불러서 함께 결합시킨다(c).
(a) 여기서 “원초의 일곱(Primordial Seven)”은, 그의 바하나(Vāhana, 탈 것 혹은 바한을 통제하는 권능의 상징으로 된 현현한 신하)으로서 포하트를 사용하고 있는 것을 나타내고 있다. 그러므로, 포하트는 그들의 “의지의 사자(Messenger of their will)" 즉 불의 회오리바람이라는 말로 표현된다.
“쥬(Dgyu)는 포하트가 된다”―이 표현 자체가 그것을 보여준다. “쥬”는 유일하게 참된 (마술적인) 지식이며, 오컬트 지혜이다. 영원한 진리와 근본 원인(Primal Causes)을 다루는 쥬는 올바른 방향으로 활용할 때 거의 전능하게 된다. 이와 정반대의 것은 쥬미(Dgyu-mi)이며, 현교적인 근대과학에서처럼 환영과 허상만을 다루는 것이다. 여기서 쥬는 디야니-붓다들의 통합적 지혜를 표현한 것이다.
(b) 독자들은 아마, 디야니-붓다들에 관해서 잘 알지 못할 것으로 생각되어서, 우선 다음과 같이 말해 두는 것이 좋을 것으로 생각된다. 동양학자들에 따르면, 다섯 디야니(Dhyānis)가 있으며, 그것들은 천상계의 붓다이며, 인간 붓다는 형상과 물질 세계에서 그의 현현인 것이다. 그러나, 비교적으로 말한다면 일곱 디야니-붓다가 있고, 지금까지 다섯 만이 출현했고, 앞으로 두 분의 디야니-붓다는 제6, 제 7근본인종의 때에 이르러 나타나게 될 것이다. 말하자면, 그들은 이 지상에 나타나는 붓다의 영원한 원형들이다. 예를 들면, 아미타바는 고타마석가모니의 디야니-붓다이며, 이 위대한 영혼(석가모니)이 화신할 때마다 언제나 그를 통해 현현한다. 쫑카파(Tzong-Kha-Pa)가 그러한 경우이다. 일곱 디야니-붓다의 총합인 아발로키테스와라(Avalokiteśvara, 관자재)가 최초의 붓다(로고스)인 것처럼, 아미타바는 고타마의 내면의 “신”이다. 중국에서는 이 내부의 신이 아미타-붓다(Amita-Buddha)라고 불린다. 리스 데이비스(Rhys Davids)가 정확하게 이야기하는 바와 같이, 디야니 붓다들은 지상에 화신한 모든 붓다의 “인간의 정신을 저하시키는 이 물질적 삶의 모든 상황에서 벗어난, 신비적 세계에서 존재하는 영광스러운 붓다들”이다. 이 지상에 화신한 붓다들은 해탈한 마누쉬-붓다(Mānush-Buddha)들이며 이번 라운드에서 지구를 통치하도록 임명되었다. 그들은 “선정불(禪定佛)들”이며, 모두가 아누파파다카(Anupapādaka, 어버이가 없는), 즉 신성한 에센스에서 스스로 탄생한 자이다. 모든 디야니-붓다는, 마누쉬(인간)-붓다들의 사후에 그들의 일을 계속해서 수행해 가는, 자신과 같은 신성한 천상의 자식(디야니-보디사트바)을 자신 안에서 창조해낼 수 있는 능력을 지니고 있다는 현교의 가르침은, 다음의 사실에 근거를 두고 있다. 요컨데, 동양학자들에 의하면 다섯 디야니 붓다를 창조했다고 하는 “붓다의 영”에 보호를(붓다의 영이 작용하는) 받는 사람에 의해 “최고의 이니쉬에이션(秘傳)”을 받기 때문에 입문자는 사실상 보디사트바가 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고위의 비전가”는 보디사트바(보살)를 창조한다.
(c) 포하트는 비교의 우주발생론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지는 않을지라도 그 중의 하나이므로, 자세히 설명할 필요가 있다. 후세에 나온 신화와는 상당한 차이가 있지만, 가장 오래된 그리스의 우주 개벽 신화에 나오는 것처럼, 에로스는 카오스, 가이야(Gaea), 에로스(Erōs)로 이루어지는 태초의 삼위일체 중 세 번째이다. 이 셋은 카발라의 아인-소프(왜냐하면 카오스는 공간(空間), [카이노Chaino], 즉 “공허”이기 때문이다), 무궁한 전체(Boundless All)와, 쉐키나(Shekinah)와 지고의 날(Ancient of Days) 즉 성령(Holy Ghost)에 상응한다. 옛 신화의 에로스가 상당히 차이가 있는 것처럼, 미현현의 우주에서의 포하트와 현상적 우주세계에서의 포하트는 서로 다른 별개의 것이다.
현상 우주세계에서 포하트는, 창조적 로고스의 의지에 영향을 받아 모든 형체를 모아서 결합시키고, 얼마 후에는 법칙이 되는 최초의 자극을 주는 오컬트적, 전기(電氣)적 생명력이다. 그것은 마치 에로스가 후세에 빛나는 날개가 달린 사랑의 신 큐피드, 즉 사랑이 아닌 것처럼, 미 현현의 우주에서 포하트는 그러한 생명력은 아니다. 우주가 아직 생겨나지 않았고, 신들도 아직 “아버지-어머니”의 가슴속에서 잠을 자고 있으므로, 포하트는 아직은 우주와 아무 관계가 없다. 그는 철학적 추상적 개념이다. 그는 아직 자신 외에는 아무 것도 만들지 않았다. 단순히 잠재적인 창조력이며, 이 창조력의 작용에 의해 미래의 모든 현상의 본체는 말하자면 나누어지고, 신비적이고 초감각적인 어떤 작용에 의해 재결합해서, 창조적인 광선을 방사한다. “신성한 자식”이 나오게 되면, 포하트는 우주적 현현계에서 일자(一者:One)를 제2자(Two)와 제3자(Three)가 되게 하는 추진력이다. 삼중의 일자가 분화해서 다수로 되면, 포하트는 원소적 원자들을 함께 모아서 결합시키는 힘으로 된다. 그 옛날 태고의 가르침의 내용을, 초기 그리스 신화에서 찾아 볼 수 있다. 에레보스(Erebos)와 눅스(Nux)는 카오스에서 태어나서, 에로스의 활동에 힘입어, 각각 에테르(Aether)와 헤메라(Hēmera)를 낳는다. 에테르는 상위의 영역의 빛이며, 헤메라는 하위의 세계, 즉 지상계의 빛이다. 어둠은 빛을 낳는다. 푸라나(Purāṇas)에서 브라흐마의 창조하려는 “의지” 또는 욕망을 보고, 산쵸니아톤(Sanchoniathon)이 쓴 페니키아인의 우주발생론에서 욕망 즉 “포토스(πὸθος)”가 창조의 원리로 되어있음을 보라.
포하트는 유일의 생명(One Life)과 긴밀한 관계가 있다. 미지의 일자, 다시말해 무한의 전체로부터 현현해 있는 일자, 혹은 주기적으로 나타나는 만반타라의 신이 나온다. 이것은 우주적 마인드이며, 근원과 분리될 때 이 우주적 마인드는 데미우르고스(Demiurgos), 즉 서구 카발리스트들이 말하는 창조적 로고스이며, 혹은 힌두교에서 말하는 네 개의 얼굴을 가진 브라흐마이다. 전체적으로 볼 때, 현현된 신성한 생각이라는 비교적인 관점에서 볼 때, 그것은 더 높은 창조적 디야니-초한들의 집단 전체를 나타낸다. 우주적 마인드가 진화함과 동시에, 아디-붓다(Ādi-Budha, 지상의 영원인 유일자)의 숨겨진 지혜는 아발로키테쉬와라(Avalokiteśvara)(혹은 현현해 있는 이쉬바라)로 나타난다. 아발로키테쉬바라는 이집트의 오시리스, 조로아스터교의 아후라-마즈다(Ahura-Nazdhā), 헤르메스철학에 말하는 천상의 인간, 플라톤 학파의 로고스, 그리고 베단타의 아트만(Ātman)이다. 우주 안에 있는 이러한 무수한 영적 에너지의 중심들로 표현되는 현현해 있는 지혜 즉 마하트(Mahat)의 작용에 의해, 우주 마인드의 반영(우주적 관념작용과 그 작용에 수반되는 지적인 힘)은 객관적으로 볼 때 불교의 비교철학에서 말하는 포하트가 된다. 앞서 말한대로, 아카샤의 일곱 원질을 따라서 흐르는 포하트는 현현한 질료 즉 유일한 원소에 작용함으로써, 질료를 여러 다양한 에너지 중심으로 분화시켜 우주진화의 법칙을 시동시킨다. 그리고 우주진화의 법칙은 우주 마인드의 관념작용에 맞추어, 현현된 태양계의 여러 다양한 존재 상태를 나타나게 한다.
이러한 다양한 에너지의 센터들에 의하여 생겨나게 된 태양계는, 이 센터들 내에 있는 다른 모든 것들과 똑같이 일곱 개의 원질로 구성된다. 이것이 히말라야 전역에 있는 비교학파의 가르침인 것이다. 하지만 모든 철학은, 제 각기 나름대로의 방법으로 원질을 분류하고 있다.
그러므로, 포하트는 현현 세계에서나 눈에 안 보이는 세계에서도 똑같이 구체화된 전기적 생명력이며, 모든 우주적 에너지를 결속시키는 초월적 통일체이다. 그 작용은, 외견상 주관적인 것이 객관적인 것에 작용해서, 그 객관적인 것을 작용하게 하는 그러한 현상들에 있어, 의지에 의해 창조되는 하나의 살아있는 힘의 작용과 닮았다. 하지만 그 규모에서는 훨씬 광대한 것이다. 포하트는 그 힘을 나타내는 살아있는 상징이자 힘을 수용하는 용기일 뿐만 아니라, 오컬티스트들은 하나의 실재라고 보고 있다.
포하트는 그 힘들을 우주적 차원, 인간적 차원, 그리고 지상 계의 차원에 작용시키는데, 그 모든 계에 각각 힘의 영향이 미치게 한다. 지상계에서 포하트의 영향은, 자성(磁性)을 띠는 사람이나 사물의 강한 욕망에 의해서 생겨나는 자기력과 적극적인 힘 속에서 느낄 수가 있다. 우주적 단계에서의 영향은(혹성계로부터 개똥벌레와 데이지 꽃에 이르기까지) 만물을 형성할 때 그 하나 하나의 발육과 성장에 관한, 자연의 마음 혹은 성스러운 생각 속에 있는 계획을 실행해 가는 건설적인 힘 속에 있다. 형이상학적으로 말하자면, 포하트는 객관적으로 드러난 “신들의 생각”인 것이다. 좀더 낮은 단계에서는, 그는 “육신이 된 말씀”이고, 우주적 및 인간적인 관념작용의 사자(使者)이며, 우주의 보편적 생명 속에 있는 활동력이다. 이차적인 면에서는 볼 때, 포하트는 태양에너지, 즉 전기적 생명유동체이며, 만물이 지니고 있는 제4의 원질인 것이고, 대자연의 동물혼(annimal soul), 말하자면 전기인 것이다. 인도에서 포하트는 (최초의) 신이 초기에 등장했을 때의 비쉬누(Vishṇu)와 수리야(Sŭrya)와 관계가 있다. 왜냐하면, 리그베다에서 비쉬누는 높은 신이 아니기 때문이다. 비쉬누는 “스며들다, 충만하다”라는 뜻의 어근 vish에서 왔으며, 포하트는 “편재자(Pervader)”와 제조자라고 불린다. 왜냐하면 원자를 원질(crude material)에서 만들어 내기 때문이다. 리그 베다의 성구(聖句)에서, 비쉬누는 역시 “태양 에너지의 나타남”이며, 우주의 일곱 영역을 세 걸음으로 지나간다고 묘사하고 있다. 역시 베다의 신은 후세의 비쉬누와는 공통점이 거의 없다. 그러므로 이런 주안점에서 볼 때 포하트와 비쉬누는 동일하며, 하나가 다른 것의 복사판이다.
“세 걸음과 일곱 걸음”은 지구의 일곱 개의 영역뿐만 아니라 비교에서 말하는, 인간이 살고 있는 일곱 천체를 언급한다. 소위 동양학자들이 빈번하게 이의를 제기하고 있지만, 힌두교의 현교적 성전에서는 우리의 혹성체인의 일곱 개의 천체 혹은 세계가 분명히 이야기되고 있다. 그러므로 이러한 수(數)들 모두가 다른 우주 발생론이나 상징에 나오는 수와 불가사의할 정도로 관련되어 있음은, 고대 종교학도들에 행한 비교(比較)와 유추에서 살펴볼 수가 있다. 리그베다에서 비쉬누가 “세 걸음”으로 “우주의 일곱 영역”을 지나간다는 문구는, 여러 주석자들에 의해서 다양하게 해석되어 왔다. 우주적으로 말하면, 세 걸음은 “불, 번개와 태양”을 뜻하고, 지구, 대기와 천공의 의미로, 또 비쉬누의 화신인 난쟁이의 “세 걸음”이라고 말해왔다. 하지만, 이 세 걸음은, 더욱 철학적으로(그리고 천문학적 의미로는 더 정확하다) 태양의 위치 즉, 일출, 정오, 일몰에 상응한다고 아우르나바바(Aurṇavābha)는 설명한다. 비교철학만이 그것을 분명히 설명하며, 조하르는 그것을 좀더 철학적 관점에서 포괄적으로 주장했다. 거기에는 다음과 같은 말로서 명료하게 설명되어있다. 처음에는, 엘로힘(Elōhīm 혹은 Elhim)은 에코드(Eḥād), 즉 “하나(One)”였다. 말하자면 “신은 많은 것 안에 하나”라고 말했었다. 이것은 범신론적 구상에서 대단히 단순한 개념인 것이다. (물론 철학적인 의미에서 범신론적이지만) 또, 그후 다음과 같이 변화가 생겼다. “여호와는 엘로힘이다.” 이리하여 그 다양성을 통일시켜서, 일신교로의 첫걸음을 내딛는다. 다음에 “어떻게 여호와 엘로힘인가?”하는 질문이 나온다. 그 대답은 아래로부터 “세 걸음에 의해”라는 말이 나온다. 그 의미는 분명하다. 그것들은 모두 상징이며, 서로 상관관계적으로 영, 혼 그리고 몸(인간)을 나타낸다. 즉, 원이 영과 세계의 혼과 그 몸(지구)으로 변형된 것을 나타낸다. 아무도 이해할 수 없는 무한의 원안에서 걸어나올 때, 아인-소프(파라브라훔이나, 제르반 아카라나(Zervān Akarana)나, 다른 곳에서 이야기하는 어떠한 “알 수 없는 미지의 존재”에 대한 카발라의 용어)는 “하나”(에코드(Eḥād), 혹은 에카(Eka)나, 아후(Ahu))로 된다. 그리고 그(혹은 그것)는 진화에 의해서 많은 것들 안에 하나(One in many), 즉 디야니-붓다들이나 혹은 엘로힘 혹은 배화교에서의 암샤스펜즈(Amshāspends)들이 된다. 그의 세 번째 걸음은 “인간(육체)”을 생성하는 것이다. 그렇게 돼서, 인간 즉 야-하바(Yāh-Ḥavāh), 혹은 “남성-여성”으로부터, 내면의 신성한 실체는 극히 추상적인 세계에서 또다시 엘로힘이 된다.
이런 카발라적 개념은 고대의 비교와 아주 일치하는 것이다. 이런 비교는 인류의 공동재산이며, 제5의 아리안 인종의 것도 아니고, 그에 속한 여러 아인종(Sub-race)들의 것도 아니다. 우랄알타이족(Turanians), 이집트인, 중국인, 칼데아인들이나, 하여간 제 5근본인종의 일곱 아인종 누구도 자신들의 것이라고 주장할 수 없다. 사실상 그것은 제3, 4 근본인종의 것이다. 그들의 자손은 제 5 근본인종의 종자(씨)인 가장 초기의 아리아인 중에서 발견할 수 있다. 어느 나라에서나 원(圓)은 미지(“끝없는 공간”, 영원히 편재해 있는 추상개념의 추상적인 옷인 것, 인식이 불가능한 신)의 상징이었다. 원은 영원 속의 무한한 시간을 표시한다. 제르반 아카라나 또한 “미지의 시간의 무한한 원”인 것이다. 그 원 속에서 나오는 찬란한 빛(우주적 태양 즉, 오르마즈드)인 것이다. 오르마즈드는 크로노스(Kronos)와 동일한데, 소아시아 북서부의 아이올리안(Aeolian)인들이 상징한 것을 보면, 원의 형태를 하고 있다.
왜냐하면, 원은 사르(Sar)이고, 사로스(Saros) 즉 주기이며, 바빌로니아의 신이기 때문이다. 바빌로니아 신의 원형의 수평선은 비가시적인 것에 대한 가시적인 상징이었다. 반면에 태양은 우주의 모든 천체들이 생겨나는 (근원에 해당하는) 유일한 원(One Circle)이며, 또한 그들의 지도자로 여겨졌다. 제르반(Zervān)는 “차크라” 혹은 비쉬누의 원이다. 어느 신비가의 정의에 의하면, 불가사의한 상징인 차크라는 “어떠한 부분도, 심지어 상상할 수 있는 가장 작은 부분의 곡선도 어느 한 쪽 길로 연장할 수 있다면, 그 부분은 계속 나아가서 결국에는 자신 위로 되돌아서 동일한 곡선(원)을 형성하게 되는 그러한 성격을 가지는 곡선이다. 자연계의 사물로 빗대어 표현한 신성의 상징과 신성의 명확한 성격(신의 원주는 어디에나 있으며(무한하며), 그러므로 그 중심도 또한 어디에나 있다. 다시 말하면, 우주의 모든 지점(point)에 존재한다)을 더 이상 잘 정의할 수는 없을 것이다. 따라서 보이지 않는 신은 또한 디얀 초한들, 즉 리쉬들이며, 최초의 일곱이며, 자신들의 통합인 하나를 포함하지 않으면 아홉이고 포함하면 열이다. 거기에서 그것(IT)은 한 발짝 나와서, 인간의 단계에 들어간다. 스탠저Ⅳ의 주석(4)으로 되돌아가면, 히말라야 전 지역에 있는 챠크라는 그 안에 △│□│(삼각형, 첫 번째 선, 입방체, 두 번째 선, 와 같이 중앙에 점이 있는 별 모양, 혹은 그의 변형들)이 그려져 있지만, 카발라적인 원(圓)인 엘로힘은, 단어 엘로힘םיהלא을 구성하는 글자를 숫자로 읽을 때, 그 유명한 13514를 그리고 그 숫자의 위치를 바꾸면 31415를 나타내는 지를 이해할 것이다. 이것은 바로 천문학용의 파이(π)이며, 디야니-붓다들, 게베르(Geber)들이나, 기보림(Gibbōrim)이나, 카비리(Kabiri)나, 엘로힘에 대한 숨겨진 의미가 있다. 그들 모두는 “거대한 인간”이나 “타이탄(Titans)”이나, “천상의 인간”을 의미하며 또 지상에서는 “거인”을 뜻한다.
7은 모든 민족에게 신성한 수의 하나였다. 그러나 히브리 민족만큼 생리학적 관점에서 물질적 의미로 사용한 민족도 없었다. 그들에게 7은 무엇보다도 생식(生殖)의 수였고, 9는 남성적인 원인의 수였다. 카발리스트들이 표시한 것처럼, 이 둘이 오쯔(צ90ע70Otz) 즉 “에덴 동산의 나무”를 형성했으며, 이것은 제 4 근본인종의 “이중적 양성(兩性)의 막대”이다. 한편, 힌두인과 아리아인에게는 일반적으로 그 의미는 여러 가지가 있으며, 거의 모두가 순전히 형이상학적 및 천문학적인 진리와 관계가 있다. 그들의 리쉬들과 신들, 악마들과 영웅들에게는 역사적이고 윤리적인 의미가 있으며, 아리안들은 고대의 히브리인들이 했던 것처럼, 자신의 종교를 단순히 생리학적인 상징에 토대를 두지 않았다. 힌두교의 현교적 경전에서 이것을 발견할 수가 있다. 경전의 이야기가 서로 모순되고, 거의 모든 푸라나와 서사시에서 다른 해석이 발견되는 것을 볼 때, 이 모든 설명이 진정한 뜻을 감추기 위한 눈가림(방편)이라는 사실이 드러난다. 비교의 입장에서 읽어보면, 모두가 같은 의미가 되고 말 것이다. 예로, 어떤 이야기에서는 지하 세계(명부)들(그 수가 또한 일곱이다)을 제외한 일곱 개의 세계를 열거한다. 이 14개의 상계(上界)와 하계(下界)는 칠중적인 연쇄를 분류한 것과는 전혀 관계가 없으며, 눈에 보이지 않는 정묘한 세계만을 언급한다. 다른 곳에서, 이러한 세계들을 언급할 생각이다. 여기서 지적하고 싶은 것은, 이 일곱 세계들은 7중적인 체인과는 아무 관계가 없는 것인데도, 마치 그 체인에 속하는 것처럼, 의도적으로 언급되고 있다는 점이다. “일곱개의 세계를 땅(earth), 창공(sky), 천(heaven), 중간영역, 탄생장소, 축복 받는 자의 저택, 진리의 집(abode of truth)으로 열거하는 곳도 있다. 브라흐마의 자식들은 여섯 번째 세계에 있고, 다섯 번째 세계인 자나-로카(Jana-Loka)는 큰 화재로 불타 죽은 동물들이 다시 탄생하는 곳이라고 말한다. “상징학” 속에는 진정한 비교적 가르침이 주어지고 있다. 이 가르침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있는 사람은 그 숨어있는 뜻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3. 그(포하트)는 불꽃들을 인도하는 영이자, 지도자이다. 그는 일을 시작할때, 저급계의 불꽃들(광물 원자들)을 나누어 놓는다. 그때 불꽃들은 자신들의 찬란하게 빛나는 집(기체의 구름들) 안에서 떠돌아다니며, 기쁨에 전율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는 그것들을 써서 차륜(車輪)의 “씨눈”을 만든다. 그는 차륜을 공간의 여섯 방향에 놓고, 하나는 중앙(중심의 차륜)에 놓는다(a).
(a) 앞에 이미 설명한 대로, “차륜”은 힘의 중심인 것이다. 그 힘의 중심 둘레로 근원적 우주 질료가 팽창해서, 여섯 단계의 강화과정을 모두 거치면서 타원형체가 되고, 그 마지막에는 구체로 변형된다. 휴식기 동안 “잠자고 있는 원자의 하나 하나를 통해 맥동치며, 진동하고 있는”(「잔의 서」의 주석) 운동(Motion)은 코스모스가 새로운 날에 눈을 뜰 때부터 생명이 활동하는 칼파 기간동안에, 원형의 회전운동(circular movement)을 하려는 경향이 점점 더 강해져간다는 것이, 바로 비교 우주발생론의 기본적 가르침 중의 하나다. “신은 소용돌이 바람으로 된다.” 그것들은 또한 로테(Rotae) 즉 세계 창조에 참가하는 천체들의 움직이는 차륜으로 불린다. 이 말이 의미하는 것은 모든 별들과 혹성들에 생명을 불어넣는 원질이라는 뜻이다. 왜냐하면 카발라에서 그들은 오파님(Ōphanīm) 즉 천체들과 별들의 천사로 표현되기 때문이다. 그들은 천체와 별들에 (생명을) 불어넣어 주는 혼인 것이다.
근원적 질료의 소용돌이 운동이라는 이 법칙은 그리스 철학의 가장 오래된 개념의 하나이다. 그리스 철학사에 등장한 초기의 현자들은 거의가 신비지혜에 입문한 비전가였다. 그리스인은 이집트인에게 비전을 받았고, 이집트인은 칼데아인에게 받았으며, 칼데아인들은 비교학파에 속한 브라만들의 제자였던 것이다. 루시푸스(Leucipus)와 아브데라의 데모크리투스(마기(Magi)의 제자였다)는 원자와 천체의 회전운동은 태고부터 존재했다고 가르쳤다. 하이스타스, 헤라클라이데스, 엑판투스, 피타고라스와 피타고라스의 모든 제자들은 지구의 자전을 가르쳤다.
그리고 인도의 아리야바타와, 아리스타쿠스, 셀레우쿠스, 아르키메데스는 현대의 천문학자만큼이나 과학적으로 지구의 공전주기를 계산하였다. 아낙사고라스(Anaxagoras)는 원소적 소용돌이 운동의 이론을 알고 있었으며, 기원전 500년에 그것을 주장했었다. 그 후 약2000년이 지나서야 갈릴레오, 데카르트, 스웨덴 보르그 등은 똑같은 이론을 채택했고, 마지막에 톰슨(W. Thomson)경은 그것을 약간 수정하여 제창했다. 이와 같은 지식은 올바로 평가할 수 있다면, 모두가 고대의 가르침의 반향이다. 그 고대의 가르침을 이제 설명하려고 한다. 지난 2, 3세기 동안에 사람들이 어떻게 된 연유로 해서, 몇 만년 전에 비밀의 성소(聖所)에서 자명한 진리로서 가르치던 것과 똑같은 생각과 결론에 도달했는지는 별도로 다루어야 할 문제다. 얼마의 사람들은 물질과학의 자연스러운 발전에 의해, 혹은 자신의 독자적인 관찰에 의해서 그러한 결론에 다다르게 되었다. 코페르니쿠스와 스웨덴 보르그와 그 외 소수의 사람들은, 대단한 학식이 있었지만, 통상의 학습과정의 발달로 습득한 생각이라기보다는, 직관적인 개념에 그 지식의 바탕을 두었던 것이다.(「붓다에 관한 신비」참조)
“공간의 여섯 방향”이란 여기에서는 순수한 영과 물질, 아루파와 루파(각각은 하나의 삼각형으로 상징된다)의 결합과 융합을 나타내는 “이중의 삼각형”을 의미한다. 이 이중의 삼각형은 비쉬누의 기호이고, 또 솔로몬의 봉인(Solomon's seal)이고, 브라만들의 스리-얀타라(Śrī-yntara)이다(편주 16).
4. 포하트는 그 여섯을 일곱 번째, 즉 왕관(Crown)에 합치기 위해 나선형의 선(spiral line)들을 그린다(a). 빛의 자식들로 이루어진 한 군대가 각각의 모퉁이에 서고, 중심의 차륜에는 리피카(Lipika)들이 선다. “이것은 훌륭하도다”라고 그들은 말한다(b). 첫 번째 신성한 세계는 준비가 되었고, 첫 번째 (세계)는 이제 두 번째 세계가 된다. 그리고 “신성한 아루파”(형상이 없는 생각의 우주)는 “츠하야로카(Chhāyāloka)”(최초의 형상인 그림자 세계, 곧 지성의 세계) 다시 말하면, 아누파다카(Anupādaka)의 최초의 옷(garment) 속에 자신을 비춘다(c).
(a) “나선형의 선(Spiral lines)들을 그린다”는 것은 대자연의 원질뿐만 아니라, 인간의 원질의 진화를 표시해 이야기하고 있다. 자연의 모든 것이 그러하듯이 인간 원질의 진화는 서서히 일어난다. (2권 "제인종의 기원"에서 알게 될 것이다) 인간의 제 6원질(붓디, 신성한 혼)은 우리의 개념에서 보면 단순한 숨 같은 것이지만, 부디를 매체로 하는 혹은 타고 다니는 신성한 영(아트마)에 비하면 어느 정도 물질적인 것이다. 신성한 사랑(에로스), 즉 친화성과 공감의 성질을 띠는 전기적인 힘으로서의 포하트는 유일의 절대자로부터 분리될 수 없는 광선인 순수한 영을 혼과 결합시키려고 애쓰는 모습이 우화적으로 표현되어 있다. 영과 혼은 인간 안에서는 모나드를 구성하고, 자연계에 있어서는 결코 제한될 수 없는 것과 현현한 것들 사이에 있는 최초의 연결고리이다. “최초의 (신성한) 세계가 이제 두 번째 세계, 즉 리피카의 세계가 되었다”라는 말은 같은 뜻을 언급한다.
(b) 각각의 모서리에 있는 “군대”는 천사적인 존재(디얀 초한)들로 이루어진 천군(天軍)이다. 그들은 만반타라의 처음부터 끝까지 각각의 영역을 지키고 지도하도록 임명되었다. 그들은 크리스챤의 카발리스트들과 연금술사들이 말하는 “신비의 파수꾼”들이고, 우주발생론뿐만 아니라 상징학에서 우주의 수의 체계와 관계가 있다. 이러한 천상의 존재들과 관련된 수(數)를 설명하는 것은 매우 어렵다. 왜냐하면 각각의 수는 어느 “천사군”을 표시하려고 하느냐에 따라 별도의 개념을 띠는 몇몇 그룹을 언급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상징학 연구에 있어 어려운 점이다. 헝클어진 매듭을 풀듯이 그 어려움을 해결할 수 없기 때문에, 많은 학자들은 알렉산더 대왕이 고르디언의 매듭을 머리 아프게 해결하기보다는 칼로 잘라버렸듯이, 그와 같이 해결하기를 더 좋아했다. 그래서, 상징에 관한 여러 가지의 잘못된 개념과 가르침이 그 결과로 생겨났다.
“최초의 세계는 두 번째 세계가 된다(The first is the Second).” 왜냐하면 “첫번째 세계”는 최초로 현현한 본체의 영역이므로, 사실 첫번째라고 셀 수도 없으며 또한 첫째로 여길 수도 없기 때문이다. 그 영역은, 진리 즉 사트(Sat)의 세계로 통하는 입구이며, “유일의 실재” 즉 이름을 붙일 수 없는 신에게서 직접 방사되는 에너지가 이 입구를 통해서 우리에게 도달한다. 또한 번역이 불가능한 용어인 사트(Be-ness)는, 자칫하면 그릇된 개념이 될 수 있다. 왜냐하면 현현된 것은 무엇이든지 사트가 아니고 현상적인 것이며, 불멸이거나 영원한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최초의 세계는 “둘이 아닌 것”인 유일한 생명과 같은 시대에 함께 존재하고 있으나, 현현한 것으로서의 그것은 다른 모든 것들과 마찬가지로 하나의 “마야(Māyā)”인 것이다. 이런 “진리의 세계”는 주석서에서 말하는 것처럼 “영원의 심장부에서 떨어진 환하게 밝은 별 하나, 이것은 희망의 횃불이며, 그 횃불에서 방사되는 일곱의 광선에는 일곱개의 존재계가 매달려 있다”라고만 묘사할 수가 있다. 정말로 그렇다. 이 7개의 광선은 일곱의 빛이며, 이 빛들의 반영이 인간의 (내부에 있는) 불멸의 모나드, 즉 아트마이자, 인간계의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빛을 비춰주는 영인 것이다. 최초에, 이 칠중적인(일곱 겹의) 빛이 있었고, 다음에는. . . . .
(c) “신성한 세계”는, 원초의 빛 속에서 빛나는 무수히 많은 빛들이며, 마지막 아루파계(무형상의 세계)의 붓디들 혹은 형상없는 신성한 영혼들이다. 고대의 스탠저에 나와있는 신비적인 용어를 사용하면, “총계”인 것이다. 오컬트의 교리 문답서에서, 스승이 제자에게 다음과 같이 묻는다.
“머리를 들어라 오 제자여, 깊은 밤중 어두운 하늘에, 불타고 있는 하나의 빛 아니 무수한 빛들이 그대 머리 위에 있는 것을 보느냐?”
“저는 하나의 불줄기로 느낍니다. 오, 스승(Gurudeva)이시여. 떨어져(분리)있지 않은 무수한 불꽃들이 그 불줄기 속에서 빛나고 있는 것을 봅니다.
“참 장하도다. 그러면, 그대의 주위를 둘러보고 그대 자신 속을 들여다 보라. 그대 안에서 타오르는 빛, 그 빛은 그대의 형제들 안에 빛나는 빛과 어떠한 차이라도 있다고 느껴지느냐?”
“그 빛은 전혀 다른 것이 아닙니다. 설령 죄수같이 카르마(Karma)의 속박에 갇혀있어도, 겉옷들로 인해 속아서 무지한 자들이 ‘너의 혼(Thy Soul)’과 ‘나의 혼(My Soul)’이라고 말을 하지만, 전혀 다르지 않습니다.
대자연을 복합적으로 구성하는 각 부분들(별에서 광물원자에 이르기까지, 최고의 디얀 초한부터 가장 작은 적충(滴蟲)에 이르기까지, 일반적으로 우리가 이해하는 바로서의 자연 그 자체와 그리고 영적인 세계, 지적인 세계, 물리적인 세계에서도)의 궁극적인 에센스가 근본적으로 하나라는 것은 오컬트 과학에서 유일한 기본법칙이다.
“신은 끝이 없고 무한한 확장(팽창) 그 자체다.”라고 오컬트의 금언에서는 말한다. 그러므로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신의 이름이 브라흐마(Brahmā)이다.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숭배, 즉 태양과 불의 숭배는 그 바탕에 대단히 깊은 철학을 담고 있다. 자연과학에 알려져 있는 4대원소 중에서 지금까지 명확하게 분석할 수 없었던 유일한 원조가 바로 불이다. 공기는 산소와 질소를 포함하는 어떤 혼합물이다라고 사람들은 자신있게 주장한다. 현대인들은 우주와 지구는 일정한 화학적 분자들로 구성된 물질이라고 생각한다. 10개의 원시시대의 지구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각각에게 그리스어 혹은 라틴어로 이름을 붙이곤 한다. 또, 물이 화학적으로는 산소와 수소의 화합물이라고 우리는 말한다. 그러나 불은 무엇인가? 불은 연소의 결과라는 근엄한 대답을 우리는 듣는다. 불은 열과 빛과 운동이며, 일반적으로 물리적 힘과 화학적 힘들이 상호 관계한 것이다. 또 이러한 과학적인 정의가 부족한 부분은 웹스터 사전에 있는 신학적인 정의를 통해 철학적으로 도움을 받고 있다. 웹스터 사전에서는 불을 “죄를 뉘우치지 않은 자들을 또 다른 상태에서 처벌하는 수단 혹은 처벌”로 설명하다. 그런데 그 “상태”란 영적인 것으로 여겨지는데, 그러나 애석하게도 불이 존재한다는 것은 불이 물질적 성격을 가지고 있다는 것에 대한 설득력 있는 증거인것 같다. 그러나, 현상들이 우리에게 친숙하다고 해서 그 현상들을 단순하게 생각하는 그러한 환상에 대해서 베인 교수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잘 알려져 있는 친숙한 사실들은, 그 자체를 전혀 설명할 필요가 없는 것 같고, 그 사실에 비유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이든 설명할 수 있는 수단처럼 느껴진다. 예를 들어, 액체가 끓고 증발하는 것은 더 이상 설명이 필요 없는 매우 단순한 현상이며, 더욱 희귀한 현상을 설명하는데 큰 도움이 될 것으로 생각이 든다. 교육을 받은 적이 없는 사람에게는 물이 증발한다는 것은 아주 이해하기 쉬운 것이지만, 물리과학을 아는 사람에게 있어서, 액체 상태란 예외적 현상으로 이것은 설명할 수가 없다. 불꽃에 접촉함으로 불이 붙는 현상은 과학적으로 설명하기가 상당히 어려운 문제이지만,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비교(秘敎)에서는 불에 관해 무엇이라 말하고 있는가? “불은, 지상에서와 같이 하늘에서도, 유일한 불꽃(One Flame)의 가장 완벽하고 가장 순수한 반영이다. 그것은 생명이자 죽음이며, 모든 물질적인 것의 시작이자 끝이다. 그것은 신성한 실질이다.”라고 말한다. 그래서 불을 숭배하는 조로아스터교의 파르시(Pārsī)와, 자신들은 “불에서 태어났다”고 하는 방랑하는 미국의 야만족들의 교리와 미신 속에는, 현대 물리학과 학문의 모든 추론보다 과학성과 진실이 더 많이 있음을 보여준다. “신은 하나의 살아있는 불”이라 말하고, 오순절에 하강한 성령이 “불의 혀들”과 같다고 이야기하고 모세의 “불타는 가시덤불”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크리스트교도는 “이교도”와 마찬가지로 불을 숭배하는 사람이다. 모든 신비가들과 카발리스트들 중에서도 불을 가장 정확하게 정의했던 사람들은 장미십자단이었다. 6페니짜리 램프를 하나 사서, 그것에 기름을 넣어두기만 하라. 그 불꽃이 전혀 줄어들지 않으면서 전 세계의 모든 램프와 초에 불을 붙이고, 전 세계의 모든 불을 밝힐 수 있을 것이다. 만일 근본적인 유일자인 신이 영원하며 또한 하나의 무한한 실질이고(“여호와 너의 하나님은 하나의 소멸하는 불이시니라”), 결코 소멸하지 않는다면, 오컬트의 가르침이 다음과 같이 말한다고 해서 비철학적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는 것 같다. “이와같이 아루파의 세계와 루파의 세계가 형성되었다. 하나의 빛에서 일곱개의 빛이 나왔다. 그리고 일곱의 빛 각각에서 49개의 빛이 나왔다.”
5. 포하트는 크게 다섯 걸음을 걷는다(이미 세 걸음을 내디딘 후이다)(a). 그리고 넷의 신성한 존재들과 . . . . 그리고 그들의 군대를 위하여 정방형(정사각형)의 각각의 모서리에다가 날개가 달려있는 차륜을 하나씩 만든다(b).
(a)이미 설명한 대로(스탠저 Ⅳ의 주석 참조) “큰 걸음”이란, 우주의 원질과 인간의 원질의 양쪽을 지칭한다. 현교적으로 나누면 인간의 원질은 셋(영, 혼, 몸)이고, 비교적인 관점에서 계산하면 7개, 즉 에센스의 3개의 광선과 4가지의 측면으로 구성되어 있다. 씨네트씨의 「에소테릭 부디즘」을 연구한 사람들은 그 용어를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히말라야 너머에는, 두개의 비교학파(오히려 한 학파에 두 개 부분으로 나누어진 것이다)가 있는데, 하나는 내적인 제자(라누)들을 위한 것이고, 또 다른 하나는 외부 제자(첼라) 또는 속가(俗家)제자들을 위한 것이다. 전자는 7중적인 인간의 원질을 가르치고, 후자는 6중적인 인간의 원질을 가르친다. 우주적 관점에서 보면, “크게 다섯 걸음”을 걷는 포하트는 의식과 존재의 일곱 계 중 상위 다섯 계를 언급한다. 그리고 여섯 번째와 일곱 번째(위에서 아래로 셀 때)는 두개의 하위계인 아스트럴계와 지상계이다.
(b)“정방형의 각 모서리에 날개가 있는 수레바퀴를 넷의 신성한 존재와 그들의 군대를 위해 만든다.” 이들은 “넷의 마하라자(Mahārāja, 사천왕)” 즉 디야니-초한들의 대왕이며, 각각이 네 지점 중 한 곳을 주재하는 데바들이다. 그들은 동, 서, 남, 북의 우주적 힘을 지배하는 통치자 혹은 천사들이다. 동서남북의 힘은 각각 오컬트적 속성을 지니고 있다. 이 존재(Beings)들은 카르마와 관계가 있다. 카르마가 작용하기 위해서는 물질적 대행자를 필요로 한다. 예를 들면, 네 개의 바람이다. 좋건 나쁘건 4개의 바람은 인간과 살아있는 모든 것의 건강에 영향을 준다고 과학이 인정하게 되었다.
전쟁이나 전염병 등의 여러 가지의 국가적 재난을 북쪽과 서쪽에서 온 보이지 않는 “사자들(Messengers)”의 탓이라고 하는 로마 카톨릭교의 가르침에는 오컬트 철학의 요소가 들어있다. 에스겔은 “신의 영광은 동쪽에서 온다”고 말하며, 예레미아, 이사야와 시편의 작가는 태양 아래 있는 모든 악은 북쪽과 서쪽에서 온다고 말하고 있다. 이 주장은 유태인들에게 있어서는 부정할 수가 없는 예언처럼 들린다. 성 앰브로스(St.Ambrose)가 다음과 같이 말하는데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다. “우리들은 북풍을 저주하고, 세례식 때 먼저 서쪽으로 향하는 것은, 그 방향에 살고 있는 자를 더 잘 거부하기 위해서다. 그리고 나서, 우리는 동쪽을 향해 돌아선다.”
“마하라자” 즉 동서남북 기본방위를 지배하는 왕에 대한 신앙은 보편적이었고, 지금의 크리스트교에도 있다. 크리스트교도는 성 어거스틴을 따라 자신들은 그들을 “역천사(力天使)”와 “영들”이라고 부르지만, 이교도가 언급할 때는 그들을 “악마”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이교도와 크리스트교의 차이점은 대체 어디에 있는 것일까? 플라톤을 뒤이어, 아리스토텔레스는 그 용어(στοιχεία)를 우리 우주의 4대 지역을 감독하기 위해 각 지역에 놓여있는 무형의 원리를 의미하는 것으로만 이해하고 있다고 설명한다. 그러므로 기독교도들이나 이교도들은 4대(원소)와 (가상적인) 네 방위를 동경하고 숭배한 것이 아니라, 이들을 각각 지배했던 “신들”을 모시거나 숭배했던 것이다. 로마 카톨릭교에는, 두 종류의 정묘한 존재, 천사와 악마가 있다. 그러나 카발리스트들과 오컬티스트들에게는 한 종류만이 있다. 로마 카톨릭 교회는 “빛의 지배자”를 자신들이 붙여 둔 이름과 틀린 이름으로 부르면, 즉각 그것은 “어둠속의 지배자” 즉 악마라고 생각해 버리지만, 카발리스트들이나 동양의 오컬티스트들은 “어둠 속의 지배자들” 즉 이교(異敎)의 우주 지배자들 및 “빛의 지배자”를 구별을 하지 않는다. “신”의 허가나 명령이 있든 없든, 인간에게 상벌을 주는 것은 “지배자”나 “마하라자”가 아니고, 바로 인간 자신이다. 즉, 개인적인 행위의 결과인 카르마가 개인과 집단에게 (때때로 전 민족들에게) 온갖 종류의 불행과 재난을 끌어당긴다. 우리는 원인들을 만들어 내고, 원인들은 정묘한 세계에서 그 원인에 상응하는 힘들을 불러일으키게 한다. 그러한 힘은, 자기(磁氣)적으로 아무런 저항도 받지 않고 원인을 만들어 낸 사람들에게 끌려간다. 다시 말하면 그 사람에게 반작용을 하게된다. 설령 그 사람들이 실제로 악행을 저지른 사람들이거나, 그저 머리 속으로 나쁜 생각을 꾸몄던 사람이었거나 상관이 없다. “생각은 물질인 것이다”라고, 근대과학은 우리들에게 가르치고 있다. 그리고 제본스와 바비지 박사가 「과학의 원리」에서 우리들 일반 사람에게 말한 것처럼, “존재하는 물질의 각 입자는 일어났던 모든 일들을 기록하는 장부가 틀림없다.” 근대과학은 날마다 오컬티즘의 소용돌이 속으로 점점 들어서고 있다. 그것은 물론 무의식적으로 일어나기는 하지만, 의심할 여지없이 우리는 느낄 수 있다. 정신과 물질의 관계에 있어서 두 가지의 주된 과학이론은, 일원론(一元論)과 유물론(唯物論)이다. 독일의 범신론적 학파의 준 오컬트적인 견해를 빼고는, 이 두 이론이 부정적 심리학의 모든 영역을 포괄한다.
클레멘스 알렉산드누스(Clemens Alexandrinus)에 의하면, 이집트의 사원에서는, 성소(聖所)와 회중이 모이는 장소 사이에 거대한 커텐이 처져 서로가 분리되어 있었다. 유태인들도 마찬가지다. 양쪽 모두 커텐(혹은 장막)은 다섯 개의 기둥(5각형의 별) 위로 드리워져 있었으며, 그 기둥들은 우리의 다섯 가지 감각과 다섯 근본인종을 상징했다. 그리고, 커텐의 네가지 색은 4방위와 지상의 사대 요소를 나타내고 있다. 그 전부가 비유적인 상징이었다. 4방위와 사대를 관장하는 넷의 높은 지배자를 통해서만 우리들의 오감은 대자연의 숨겨진 진리를 인식할 수 있다. 바로 이 사대 원소 자체가 이교도들에게 신성한 지식 혹은 신의 지식을 제공해준 것이라는 클레멘스의 해석은 완전히 잘못 되었다. 이집트인들의 상징은 영적인 것이었지만, 유태인들의 상징은 순전히 물질적이었으며, 그들은 자신들이 알지도 못하는 사대원소와 가상적으로 생각한 “4방위”를 숭배했던 것이다. 만약 모세가 광야에서 세웠던 정방형의 성소에 그와 똑같은 우주적인 의미가 없었던 것이라면, 그 휘장으로 세운 성소는 어떤 의미가 있었을까? “당신은 청사(絲), 자사(絲), 진홍실로서 막(Hanging)을 만들고, 그의 구별을 위해 막을 걸칠 아카시아 나무재료로 만들어진 다섯 개의 기둥. . . 또 그 기둥을 위해 청동의 촤리 다섯 개를 구워 만들고. . . 네개의 모서리에 네개의 청동고리를, 신전의 동, 서, 남, 북, 사방을 위해 좋은 재질의 석가래(boards)를 만들어. . . 그것에 케루빔을 직조해내야 했다.” 그 장막으로 만든 성소와 정사각 모양의 안 마당, 그리고 케루빔과 모든 것이 이집트인들의 사원에 있는 것들과 정확히 똑같다. 성소의 정방형의 형태는, 오늘날 중국과 티벳의 현교적 신앙에서 의미하는 것과 완전히 같다. 4방위는 피라미드와 오벨리스크 그리고 그외 사각형의 건조물의 4면이 의미하는 것을 뜻한다. 죠세푸스(Josephus)는 장막으로 만든 성소 전부를 신중하게 설명한다. 성소의 네 기둥은 4대 요소에게 바치기 위해 티레(Tyre)에 세웠던 기둥들과 같다고 그는 단언한다. 티레의 기둥들은, 네 모서리가 4방위를 향해있는 받침대들 위에 놓여져 있었다. 그리고, 그 받침대 네 모서리에는 12궁도의 그림 중 같은 방향을 나타내는 궁도가 넷이 그려져 있었다.”(Antiquities I., VIII., ch. xxii.)
현재까지 남아 있는 고대의 모든 신성한 사각형의 건축물들에서와 마찬가지로, 조로아스터교인들의 동굴 속에서, 바위를 잘라내 만든 인도의 성전에서도, 똑같은 개념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레이아드(Layard)는 이것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그는 4방위(점)과 사대 원소가 모든 나라의 종교에 사각형 오벨리스크와 피라미드의 4면, 등등의 모습으로 있음을 발견하였다. 넷의 마하라자는 이 4방위점과 사대원소의 지배자이자 감독인 것이다.
이에 대해 좀 더 알고싶은 학도들은 에스겔서 1장의 환상과 (현교적 가르침이라도 좋으니) 알려져 있는 중국 불교를 비교해 보고, 이 “위대한 왕들(4천왕)”의 외모를 조사해보면 좋다. 조셉 에드킨스(Joseph Edkins) 신부의 의견에 따르면, 사천왕은 “힌두인들이 세계를 4개의 대륙으로 나누는데, 그 각각의 대륙을 주재하는 데바’”들이다. 각 천왕은 인류와 불교를 지키기 위해 영적인 존재로 형성된 군대를 이끌고 있다. 불교에 대한 편애를 하지 않고 보면, 이것이야말로 4천왕에 대한 정확한 묘사인 것이다. 그들은 인류의 수호자이며, 지상계에 있어 카르마의 실행자(Agent)이지만, 반면 리피카들은 인간의 내세와 관계가 있다. 그와 동시에 그들은 에스겔의 환상에 나오는 “사람의 모습을 한 네 생물”이다. 그들은 성서 번역자들에 의해 “케루빔”, “세라핌” 등으로 불리며, 오컬티스트는 “날개를 지닌 구체(winged globes)”라든가, “불의 수레바퀴”라고 부르고, 또 힌두교의 만신전에서는 많은 다른 이름으로 불린다. 간드하바스(Gandharvas)(“아름다운 노래를 부르는 자”)들, 아수라들, 긴나라(Kiṃnaras)들와 나가(Nāga)들 이 모두가 “넷의 마하라자”를 우화적으로 묘사한 것이다. 세라핌(Serāphīm)은 하늘에 있는 거대한 불의 뱀들이며, 메루(Meru)산을 묘사하는 한 구절에서 다음과 같이 나와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메루산은 높게 솟아있는 영광스러운 곳이고, 신들이나, 천상의 성가대가 즐겨 가는 곳이다. . . 거대한 뱀들이 지키고 있기 때문에 죄가 많은 인간은 못가는 곳이다.” 그들은 보복자들이나 “날개가 있는 수레바퀴”라고 불린다.
그들의 역할과 성격을 설명하고 있으므로, 기독교의 성서 해설자가 케루빔(Cherubim)에 대해 말하는 것을 살펴보도록 하자. “케루빔이라는 말은 히브리어로 ‘지식이 가득함’을 말한다. 탁월한 지식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이 천사들은 “게루빔”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그래서 케루빔은 신성한 지식에 침입하는 인간에게 벌을 줄 때 사용되었다.” 아주 훌륭하다. 그리고 그 정보가 애매모호한 점이 있기는 하지만, “타락”후에 에데동산의 문에 놓였던 케룹(Cherub)이 덕망 있는 해석자들에게 금지된 학문 혹은 신성한 지식과 관련된 징벌이라는 개념을 연상시켰음을 보여준다. 이 신성한 지식은 일반적으로 인간의 생각으로는 또 하나의 “타락”, 즉 신들이나 “신”의 타락을 초래한다. 그러나 해설자 크루덴(Cruden)은 카르마에 관해서 전혀 알지 못했기 때문에, 관대히 봐줄 수가 있다. 그러나 비유는 암시적인 것이다. 신들의 거처인 메루산과 에덴동산은 서로 비슷하며, 힌두교의 거대한 뱀들과 오파이트(Ophite)의 케루빔(일곱개 중 세번째가 용)은 더욱 유사하다. 왜냐하면, 그 둘은 비밀의 지식의 영역으로 들어가는 입구를 지키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에스겔은 우주의 천사 넷을 다음과 같이 분명하게 묘사한다.
내가 보고 있노라니, 보라, 회오리바람이 그 커다란 구름의 무리가 북에서 몰려오는데, 그 주위에는 반짝임이 생겨나고 불을 불어내고 있었다. . . . 또 그의 속에서 네 개의 살아 있는 것들의 형(形)이 나왔다. . . . 그들은 인간의 모습을 지니고 있는 것이었다. 그들 하나 하나에 따른 네 개의 얼굴을 가졌고, 또 그 하나마다 날개를 가지고 있었다. . . . 사람의 얼굴, 사자의 얼굴. . . . 소의 얼굴. . . 독수리의 얼굴”(여기서 “용”은 “인간”으로 대체되었다. “오파이트의 영들”을 보라.) 그들의 꽃은 불타는 탄(炭)의 불처럼 되어 있다. 내가 살아있는 그것들을 보고 있으면, 살아있는 것들의 모습은 땅 위에서의 륜(輪)이었다. 네 가지의 살아있는 것들의 하나 하나의 륜이다. . . 륜의 가운데에는 륜이 있는 것처럼 보인다. . . . 살아있는 것들의 영이 륜의 안에 있는 것인 까닭이기 때문이다. 그들의 모습은 탄(炭)숯불 같다....”
건설자와 혹성영과 리피카는 각각 세 개의 주된 그룹이 있고, 그룹은 일곱 개의 하위그룹으로 나누어진다. 이 책처럼 방대한 저작에서조차, 세 개의 주된 그룹만이라도 자세히 설명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그렇게 하자면, 또 다른 한 권 분량의 책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건설자들”은 최초로 “마인드에서 태어난” 실재(존재)들의 대표자이며, 따라서 원초의 리쉬-프라자파티(Ṛishi-Prajāpati)들의 대표자이고 또한 오시리스를 우두머리로 하는 이집트의 일곱의 위대한 실들의 대표자이며, 오르마즈드를 우두머리로 하는 조로아스터교의 일곱 암샤스펜드(Amshaspend)의 대표이며, “얼굴의 영들”, 그리고 최초의 3개조에서 분리된 일곱 개의 세피로트 등등의 대표자인 것이다.
“밤”이 지난 후에 그들은 모든 “체계”를 건설한다. 다시 말하면, 재건한다고 할 수 있다. 두 번째 그룹의 건설자들은 특별히 우리의 혹성 체인의 건축가이다. 세 번째 그룹은 우리 인류의 선조, 즉 소우주인 인간의 대우주적인 원형인 것이다.
혹성 영들은 일반적으로는 별(태양)들에 생명을 불어넣는 영이며, 특히 혹성에 생명을 불어넣은 영이다. 그들은 자신들의 성좌 아래 태어나는 모든 사람들의 운명을 지배하게 된다. 다른 시스템(혹은 계)에 속하는 두 번째와 세 번째 그룹들도 같은 기능을 담당하고, 모두가 대자연의 여러 가지의 부문을 통치하는 것이다. 힌두교의 현교적인 만신전에서 그들은 나침반의 여덟 방향(기본 4방위와 그 중간의 방향점(北東,北西,南東,南西))을 관장하는 수호신이며, 로카-팔라(Loka-Pāla)들, 다시말해 “(우리 눈에 보이는 우주에서) 세계의 지지자들 혹은 수호자들”이라고 말한다. 그 중에 인드라(Indra, 동), 야먀(Yama, 남), 바루나(Varuṇa, 서)와 쿠베라(Kuvera, 북)가 주된 수호자이다. 그리고 그들의 코끼리와 배우자는 물론 공상과 뒤늦게 생각된 것이지만 모두가 각각 오컬트적이 의미를 지니고있다.
리피카는(이에 대한 설명은 스탠저 Ⅳ의 주석 6에 나와 있다) 우주의 영들이며, 건설자들은 단지 우리 혹성의 신들이다. 리피카는 우주발생론의 가장 오컬트적 부분에 속하므로 여기서는 설명할 수가 없다. 아데프트들(심지어 최고의 아데프트들까지도)이 3등급으로 이루어지는 이 천사단을 완전하게 알고 계시는 것인지, 우리 세계에 대한 기록과 관련된 낮은 등급만을 알고 있는지는 필자 자신도 잘 모르지만, 아마도 후자가 아닐까 생각한다. 최고의 등급 혹은 단계에 관해서는 단지 한가지 사실만 가르치고 있다. 리피카는 카르마와 관계가 있으며, 카르마를 직접 기록하는 기록자들이다.
6. 리피카들은 삼각형, 첫 번째 하나(수직선 혹은 숫자 1), 입방체, 두 번째 하나, 오각별(五茫星)을 알(원)안에 내접시킨다(a). 이것은 하강했다가 상승하는 자들에게는 “넘지 말라”라고 이야기되는 그 윤(ring, 輪)이다. (그리고 또한) 그 위대한 날, “우리와 함께 있으라”라고 말하는 그 날을 향하여 칼파(Kalpa)의 기간동안 진보하고 있는 자들에게도 그렇게 불린다(b). . . . 이렇게 아루파(Arūpa)와 루파(Rūpa)(무형의 세계와 형상의 세계)는 만들어졌다. 말하자면 하나의 빛에서 일곱 개의 빛이 나왔으며, 일곱 개의 빛 하나 하나에서부터 일곱의 칠 배수의 빛이 나왔다. 그 “차륜들”이 그 윤을 지키고 있다.
이 스탠저는 천사 하이어라키 계급에 대한 자세한 분류에서 시작된다. 넷과 일곱으로 된 그룹에서 열, 열둘, 스물하나 등등의 “마인드가 생겨난” 그룹이 나오는데, 이 모두는 또 다시 7조, 9조, 20조 등의 더 작은 그룹들로 나눠지기 때문에, 천상의 군대와 존재들을 끊임없이 열거하는데 당황하게된다. 각자가 존재하는 동안에는 눈에 보이는 우주를 통치하는데 있어 명확한 자신의 업무가 있다.
(a) 이 구절의 첫 문장에 대한 비교적인 뜻은, 리피카 혹은 카르마의 원장을 기록하는 분들이 개인적인 자아(Ego)와 이 자아의 본체이자 어버이-원천인 비개인적인 자아 사이에 넘어갈 수 없는 하나의 장벽을 만든다는 것이다. 그래서 비유로 표현되었다. 그들은 현현한 물질 세계를 “넘지 말라”라는 윤(輪)에 내접시킨다. 이 세계는 환상적인 모든 계들, 즉 “아디”계들 혹은 “에카(Eka, 하나)”계들에서 많은 것으로 나누어진 유일자의 (객관적인) 상징이다. 이 에카 혹은 하나는 눈에 보이는 우주의 주된 창조자들 및 건설자들의 집합적 총계, 그 전체인 것이다. 히브리의 오컬티즘에서 그들의 이름은 “아카트(Aḥath)”이자 “에하드(Ehād)”이다. 그 둘은 뜻이 같은 “하나”를 의미한다. 그리고 전자는 여성명사이며 후자는 남성명사이다. 또 일신론자들은 카발라의 깊은 비교적인 뜻을 이용했으며 지금도 이용하고 있다. 유일한 최상의 에센스를 알 수 있는 통로인 그 이름을 그 에센스의 현현인 세피로트-엘로힘(Sephīrōth-Elōhim)에 붙여서 그를 여호와라고 부른다. 그러나, 이것은 완전히 독단이며 모든 이성이나 논리에 반한다. 왜냐하면, 엘로힘은 복수명사 “하임(Ḥayīm)”과 동일시되는 복수명사이기 때문이다. 하임은 때때로 엘로힘과 결합되어 복합명사를 형성한다. 엄밀히 말하자면, 오컬트 형이상학에서는, 두 개의 “하나(ONE)”가 있다. 즉, 그 어떠한 사색도 불가능한, 우리가 이를 수 없는 절대성과 무한의 세계에 있는 “하나”와, 발산의 세계에 있는 두 번째의 “하나”이다. 전자는 영원하고 절대적이며 불변한 것이기 때문에, 발산하지 않고 나누어질 수도 없다. 후자는, 말하자면 첫 번째 하나의 반영(환영의 우주 안에 있는 로고스 즉, 이쉬바라Īśvara)이기 때문에 그 모든 것이 가능하다. 세피로트의 상위의 3개조가 하위의 세피로트 일곱을 발산하듯이, 두 번째의 하나는 자신에게서 일곱 광선인 디야니-초한들을 발산한다. 바꾸어 말하면, 동질적인 것은 이질적인 것이 되고, “원시물질(Protyle)”은 모든 원소들로 분화된다. 그러나 이 것들은 원시적 원소로 되돌아가지 않는 한, 결코 “라야(Laya)” 혹은 “영점(Zero-Point)”을 넘어설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비유를 쓰는 것이다. 리피카는 순수한 영의 세계(혹은 영계)와 질료의 계를 분리시킨다. “내려갔다가 올라가는 자들”(육체로 화신하는 모나드들과 정화하기 위해 고군분투하며 “올라가고 있지”만, 아직 목표에 이르지 못한 자들)은 “우리와 함께 있으라(Be-With-Us)”고 말하는 날에, 바로 그날에 비로소 “넘지 말라”고 이야기한 그 원을 넘어서게 될 것이다. 그때는, 무지의 속박에서 해방되어, 자신의 것으로 잘못 생각했던 인성 내에 있는 자아(Ego)가 우주적 자아(Anima Supra-Mundi)와 전혀 분리되어 있지 않음을 충분히 인식하기 때문에, 인간은 유일한 에센스 속으로 융합되어 들어가 “우리와”(“한” 생명으로 존재하는 현현된 우주적 생명들) 하나가 될 뿐만 아니라 바로 그 생명 자체가 된다.
천문학적으로 말하면, 리피카가 삼각형, 첫 번째 수직선(1), 입방체, 두 번째 수직선과 오각별의 한계를 정하기 위해 이 도형들 둘레에 그리는 “링-패스-낫(Ring Pass-Not)“(”넘지 말라“고 정한 한계)는 이와 같이 31415, 곧 수학의 여러 계산표에 항상 사용되는 계수(파이π 값)를 포함하고 있는 것을 알 수가 있다. 여기에서의 기학적인 도형들은 숫자를 나타낸다.
일반적으로 알려져 있는 철학에 따르면, 이 수레바퀴(Ring: 고리, 한계, 영역)는 소위 성운(星雲)의 영역 너머에 있다. 그러나 이런 개념은, 푸라나와 다른 현교적 성전에 나와있는 데바로카(Devaloka)의 세계들과 하늘들로 이루어진 1008 세계에 대한 지형과 세부적 설명에 대한 개념과 똑같이 잘못된 것이다. 물론, 세상 과학의 가르침에서와 같이 비교의 가르침에서도 헤아릴 수 없이 먼 거리에 떨어져 있는 세계들이 있다. 너무나 멀리 떨어져 있어, 막 현대의 천문학자(점성가)에 도달한, 가장 가까운 세계의 빛은 “빛이 있으라”라는 말씀이 있기 오래 전에 그 세계(별)를 떠났던 것이다. 그러나 이 세계들은 데바로카계에 있는 세계들이 아니라 우리 우주에 있는 세계들이다.
화학자는 자신이 다루는 물질계의 라야(Laya) 혹은 제로포인트까지 가서 더 이상 앞으로 나가지 못한다. 물리학자들이나, 천문학자는 수십억 마일을 단위로 하여 성운의 저편까지 계산하지만, 그들도 더 이상 나아가지 못한다. 어느 정도 비전을 전수 받은 오컬티스트는 이 라야점(laya-point)을 비록 물질적 세계는 아니라도 인간의 지성으로 상상할 수 있는 어떤 세계에 존재한다고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완전한 비전을 받은 자라면 이 링-패스-낫은 어떤 장소가 아니고 거리를 잴 수 있는 것도 아니라, 무한의 절대성 속에 존재하고 있음을 알고 있다. 완벽한 비전가가 말하는 이 무한 속에는 높이나, 폭, 두께도 없고, 모두가 헤아릴 수 없는 깊음이며, 물질계부터 형이상학계를 초월하고 또 초월하는 데까지 내려간다. “내려간다”라는 말을 할 때, 물질의 깊이를 뜻한 것은 아니고 “어디에도 없고 동시에 어디든지 있는" 본질적인 심오한 깊이를 의미한다.
일반 종교의 현교적이며, 조잡한 신인동형적 우화를 주의 깊게 살펴보면, 심지어 그 안에도 리피카가 지키는 “넘지 말라”라고 말하는 원(영역)에서 구체적으로 표현된 가르침을 어렴풋이 나마 느낄 수 있는 것이다. 심지어 인도에서 가장 완고하게 신인동형론을 주장하는 비시쉬타드바이타(Viśishṭādvaita) 베단타 학파의 가르침에서도 이것을 발견할 수 있다. 왜냐하면 우리는 해방된 영혼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는 것을 보게 된다. 모크샤(Moksha)(반다(bandha), 즉 “속박으로부터의 자유“를 의미하는 지복의 상태)에 도달한 후, 파라마파다(Paramapada)라 불리는 곳에서 혼은 지복을 누린다. 그곳은 물질적인 것이 아니며, 수다사타와(Śuddhasattva)(이쉬와라의 체를 형성하는 원질)로 이루어져 있다. 거기서, 모크샤를 성취한 무크타(Mukta) 혹은 지바트만들(Jīvātmans)(모나드들)은 결코 다시 물질이나 카르마의 특성에 지배되지 않는다. “단지, 세계를 유익하게 하기 위해 원한다면, 그들은 지구상에 다시 화신할 수 있다.” 이 세계로부터 파라마파다 혹은 비물질적 세계들에 이르는 길을 데바야나(Deváyāna)라고 부른다. 사람이 모크샤를 성취하고 몸이 죽을 때,
. . . 지바(Jiva,혼)는 수크쉬마-사리라(Sūkshma-śarīra)을 입고, 수슘나(심장과 브라흐마란드라를 연결하는 신경인)를 통과하여 심장에서 정수리에 있는 브라흐마란드라(Brahmarandhra)로 간다. 지바는 브라흐마란드라를 뚫고 나와서, 태양광선을 통해 태양의 영역(수리아만달라Sūryamaṇḍala)로 간다. 그리고 태양의 흑점을 지나, 파라마파다로 간다. 혼은 요가를 통해 얻은 지고의 지혜에 의해 이러한 길로 인도된다. 이와 같이 혼은 아치(Archi), 아하스(Ahas), 푸르바파크샤(Pūrvapakasha), 우타라야나(Uttarāyaṇa), 삼바트사라(Samvatsara), 아디트야(Aditya), 챤드라(Chandra), 바이드유타(Vaidyuta), 바루나(Varuṇa), 인드라(Indra), 프라자파티(Prajāpatis) 그리고 마지막으로 아만나바(Amānava, 비쉬누의 화신)의 조력자의 이름으로 알려진 아티바히카(Athivāhikas, 여행할 때의 짐꾼)의 도움으로 파라마파다로 나아간다. 여기서 말하는 아르치들은 말 그대로 어떤 깨끗한 혼들이다.
기록자들(리피카)을 제외하고는 지금까지 누구도 그 금지된 선을 넘은 적이 결코 없었으며, 다음의 프랄라야의 날까지는 어느 누구도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유한(설사 인간의 눈으로는 아무리 무한한 것으로 보일지라도)과 진정한 무한을 구별하는 경계선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올라가고 내려가는” 존재들로 언급된 영들은, 쉽게 말해 “천상계에 살고 있는 자들”의 무리들인 것이다. 그러나 사실, 그들은 “천상계에 살고 있는 자”는 아니다. 그들은 존재의 하이어라키에 있어 더 높은 세계에 살고 있는 실재들이고 우리들보다는 헤아릴 수 없이 높기 때문에, 우리들에게는 신들로, 혹은 집합적으로 (유일한) 신(God)처럼 보이는 것이다. 그러나 죽어야만 하는 우리 인간들도, 자신의 고유한 능력에 따라 사유하는 개미의 눈에는 신처럼 보일 것이다. 수 주일에 걸쳐 고되게 일한 결과(곤충 세계의 관점에서 보면 수년에 걸친 역사이다)인 개미집을 장난기가 발한 개구쟁이가 한 순간에 파괴할 때, 개미는 그 개구쟁이의 손에서 어떤 인격을 가진 신의 보복하는 손길로 볼 수도 있다. 개미는 심한 고통을 느끼고, 그 원하지도 않는 불행을 하늘의 뜻과 죄악의 탓이라 하면서, 인간처럼 그것이 개미의 원죄의 결과라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누가 그것을 알겠는가? 누가 단언한다거나, 부정할 수 있겠는가? 전 태양계에서 인간을 제외한 인간 수준의 이성과 지성을 갖춘 다른 존재들이 있음을 허용하지 않으려는 것은 우리 시대가 갖는 오만의 극치이다. 과학이 단언할 수 있는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 어떠한 지성적 존재들도 우리들과 똑같은 조건하에 살고 있지는 않다는 것뿐이다.
우리들이 살고있는 세계의 여러 가지 상태와는 전혀 틀린 상태의 세계가 있을 가능성을 딱 잘라 부정할 수 없다. 또한 과학은 그러한 세계 중 얼마와 우리 세계 사이에 제한된 커뮤니케이션의 가능성을 부정하지 못할 것이다. 최고의 세계에는 지극히 신성한 영들이 일곱 종류가 있다고 우리는 배운다. 종종 인간이 보거나 들을 수 있고, 지상에 있는 그들의 자손들과 실제로 커뮤니케이션을 하는 하이어라키들은 바로 보다 낮은 여섯 세계에 속하고 있다. 그 자손들은 그들과 끊을래야 끊을 수 없도록 연결되어 있다. 왜냐하면 인간 안에 있는 각각의 원질은 그 위대한 존재들의 본질에 직접적인 근원이 있으며, 그들은 우리 속에 있는 각각의 눈에 보이지 않는 원소들을 제공하기 때문이다. 물질과학은 생물의 생리적 메커니즘에 대하여 추측하기를 좋아하며, 우리의 감정, 정신적 및 영적 감각들을 무기질(무기적 매체)의 작용으로 귀착시키려고 계속해서 노력하지만 아무런 성과도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방향으로 과학이 이룰 수 있는 모든 성과는 이미 다 이루었으며, 과학은 이제 더 이상 나아갈 수가 없을 것이다.
과학은 현재 막다른 벽에 직면하고 있으며, 그 벽에다가 자신이 상상하는 대로 위대한 생리학적 및 심령적인 발견들을 그리고 있지만, 그 모든 것이 나중에는 과학적 공상과 환영들로 짜여진 거미집에 불과하다는 것을 발견할 것이다. 생리학의 분석과 연구의 대상이 되는 것은 우리 신체의 조직뿐이다. 그의 조직 안에 더 높은 여섯 개의 원질은 오컬트 과학을 고의로 무시하고 부정하려는 사람의 손을 영원히 피하게 될 것이다.
(b) “우리들과 함께 있으라는 말을 듣는 그 위대한 날”은 이 표현을 통해서만 뜻하는 의미가 그대로 전달되기 때문에 글자 그대로 번역할 수밖에 없다. 오컬티즘 혹은 오히려 비교의 지혜(Esoteric Wisdom) 또는 “부디즘(Budhism)”을 모르고 있는 일반 대중에게는 그의 의미가 그렇게 쉽게 드러나지 않는다. 이것은 비교의 독특한 표현이며, 일반 사람들에게는 이집트인들이 말하는 “‘우리에게 오라라고 말하는 날”과 같이 그 의미가 명확치 않다. 이 말(Come-To-Us)은 앞의 말(Be-With-Us)과 같은 뜻이지만, 이 의미로 볼 때 동사 be를 머무르다나 휴식하다로 바꾸어 우리와 함께 머무르자(Remain-with-us) 혹은 우리와 함께 쉬자(Rest-with-us)라고 말하는 것이 더 좋았을 것이다. 왜냐하면 이 “날”은 파라니르바나(Paranirvāṇa)라고 하는 긴 휴식기를 이야기하고 있기 때문이다. 비교에서는 각각의 모나드는 3000번의 생존주기를 거친 후에야 비로소 운명적으로 혼이 진짜 오시리스화된다고 항상 가르쳤지만, 이집트 의식을 현교적으로 해석하면 신비의식의 사제로부터 신성한 암소 아피스(Apis)에 이르기까지, 모든 사자의 혼은 오시리스와 같은 존재가, 말하자면 오시리스화된다고 했던 것처럼, 현재도 똑같은 상황이다. 일곱의 본성과 에센스(이 에센스의 가장 높은 원질은 곧바로 제 7우주원소 속에 소중히 안치된다)에서 태어난 모나드는 가장 높은 데서 가장 낮은데에 이르기까지, 또 인간에서 신에 이르기까지, 존재와 형태의 주기동안 칠중적 선회운동을 해야한다. 파라니르바나의 문턱에서 모나드는 원초의 에센스를 다시 취하고 절대자와 다시 하나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