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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3.19 02:35

요 약(Summing u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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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 약(Summing up)

 

 

“세계창조 및 이 세계의 시작에서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의 역사는 7절(節)로 구성되어 있다. 제 7절은 아직 완성되지 않았다.”

―T. 수바로[신지학도] 3권,18881년 11월호, 44p

 

이 7절 중, 최초의 절이 시도되었고 이제는 끝을 맺었다. 해설로서는 불완전하며 설득력이 부족한 것이기는 하지만 어쨌든 수학적인 말을 빌어 쓴다면, 그 이후 모든 것들의 기초가 된 우주발생론의 가장 오래된 “근저”라고 말할 수가 있다. 주기적인 반복을 전개하는 모든 법칙이 우주의 마인드로부터 의식을 반영해낼 수 있는 존재들에 의해 감수성이 예민한 마인드에 인상을 주어 자리잡게 하였지만, 이와 같은 “대파노라마”를 서구의 말을 써서 표현해보려고 시도하는 것은 대담한 배짱인 셈이다. 신들의 언어인 산스크리트어(梵語)외에 인간의 언어로는 그것을 알맞게 묘사해낼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저작 안에서 잘못된 것이 발견되면 이러한 연유를 참작해서 너그럽게 용서해 주기를 바란다.

 

전체로서는 지금까지 설명해온 우주발생론이나 뒤에 저술한 인류발생론은 완전하게 저술한 것으로는 볼 수 없다. 인도의 육파철학 어디에도 이러한 가르침은 없다. 그것은 인도의 육파철학(六破哲學)의 총합체인 일곱 번째의 가르침에 속하는 것, 즉 오컬트의 가르침인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이집트의 헤어져 가는 파피루스에서도 찾아 볼 수 없으며, 앗시리아의 다이루나나 화강암의 벽에서도 흔적을 찾아 볼 수가 없다. 인류 지식의 극치인 베단타에서는 세계-우주발생론에 대해 전하고 있으나 이는 형이상학적인 측면일 뿐이다. 그리고 베단타파의 대단히 귀중한 지식의 정수인 우파니샤드의 참뜻을 완전히 파악해내려면, 그 창고를 열 수 있는 열쇠가 따로 있어야 한다. 우파니샤드는 복합어로서 “비밀의 영적 지식의 계시에 의해 무지를 정복하는 것”이라는 뜻이 있다. “우파니샤드”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앞서 말한 또 하나의 열쇠가 필요하다고 했는데 그 이유에 대해 대사로부터 배운 대로 여기에 서술해보겠다.

 

우파니샤드는 보통 “비밀의 가르침”이라 번역되고 있다. 이러한 논문은 스루티(Śruti) 즉 “계시된 지식”, 말하자면 하늘의 계시이다. 우파니샤드는 보통 세 부분으로 나누어진 베다 중에서 “브라흐마나(Brāhmaṇa)”에 속하는데 동양의 학자들은, “우파니샤드”는 150개 이상이나 있다고 말하고 있으며, 그중 가장 오래된 것은 기원전 600년쯤에 쓰여진 것이라고 한다. 그렇지만 원본 텍스트는 5분의1에도 못 미친다. 베다에 있어서 우파니샤드가 차지하는 위치는 유대 성서에서 카바라가 차지하고 있는 비중과 같다. 우파니샤드는 베다의 원전의 비밀을 신비적인 뜻으로 논하며 설명을 한다.

 

우파니샤드에서는 우주의 기원, 신의 성격, 영과 혼의 성질, 또 마인드와 물질의 형이상학적인 관계에 대해서도 이야기하고 있다. 간략히 말해서, 우파니샤드에는 인간의 모든 지식의 시작과 끝이 포함되고 있지만 부처의 시대 이후로는 더 이상 비밀을 누설하지 않았다.

 

만약에 그만두지 않았다면, 우파니샤드는 비교적이라고 말할 수가 없게 되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지금에 이르러서 우파니샤드는 바라문교의 성전에 공공연하게 나와 있으며, “카스트” 제도 외의 사람들이나 서구의 동양학자들에게도 손쉽게 얻어낼 수 있도록 되어버리고 있기 때문이다. 모두가 “우파니샤드”로 통한 일이지만 끊이지 않고 그러한 기원을 표시해서, (a)카스트 제도가 지금처럼 압제적인 제도가 되기 이전에 “우파니샤드”의 안에 어느 부분은 이미 쓰여져 있었다고 하는 것과 (b)우파니샤드의 내용의 반 정도는 빼내 제외해버리고, 어느 것은 고쳐서 써졌거나 요약돼 있었던 것을 증명하는 것은, 고급지식을 가지고 있었던 스승들이나 바라문들의 제자가 되기 위해, ‘크샤트리아’의 왕들에게로 간다”고 말한 것은 사실이다. 말하자면, 원본이 쓰여졌던 무렵에, 왕들은 바라문에 비해 지식을 가졌다고 인정받고 있었다. 엘핀스톤(Elphinstone)이 보다 합리적으로 설명하고 있는 것처럼 우파니샤드는 (다른 바라문저작물과는) 구별되는 정신 즉 리그베타의 찬가 외의 작품에는 알려져 있지 않는 사상의 자유정신을 나타내고 있다”. 또 하나의 사실은 석가모니의 생애에 관해서 기록된 사본의 전통에 의한 설명이다. 그것에 의하면 우파니샤드는 개정(改正)을 하면서부터 비로소 브라흐마나에 부속하게 된 것이고, 두 번 태어난 자(고급카스트의 사람 특히 바라문들의 별칭․역주)에 의해 인도를 침략한 후 2. 3세기가 지나고 “바라문”들 사이에서 현재의 카스트제도의 배타성에 빠져 버리게 한 것이다. 당시에는 우파니샤드는 완성되어 있었고, 이니쉐이션(秘傳)을 받을 준비를 하고 있던 제자들(첼라)의 교재로서 쓰여지고 있었다.

 

이러한 사실은 베다와 브라흐마가 오로지 사원에 속해있던 “바라문”만의 소유로 되어있는 동안, 말하자면 신성한 카스트 외에는 그것을 배우거나 읽어볼 수 있는 권리를 누구에게도 주지 않은 동안 계속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카필라바스투(Kapilavastu)의 왕자 석가모니가 태어났다. 라하스야(Rahasya) 즉 우파니샤드의 바라문의 지혜를 모두 배우고 난 후, 이와 같은 가르침이 눈(雪)으로 뒤덮인 히말라야에서 생을 보내고 있는 “생명의 스승들”의 가르침과 거의 틀린 점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바라문의 제자 석가모니는 신성한 지혜가 이렇게 바라문만의 것이 되어 있는 것에 격분을 느끼고 그것을 널리 세상에 알리고 온 세계를 구제하겠다고 결심하게 된 것이다.

 

이렇게 되자, 자신들의 신성한 지식과 오컬트의 지혜가 카스트가 아닌 믈레차차하스(Mlechchhas)들의 손에 들어가는 것을 본 바라문들은 원래 베다 및 브라흐마나(Brāhmaṇa)의 세배 정도가 되는 자료가 있었던 우파니샤드의 원전을 요약해 버린 것이다. 하지만 원문의 말은 한마디도 바꾸지 않았다. 그들은 존재의 신비의 최고의 가르침을 포함한 가장 중요한 부분을 사본에서 빼어버린 것에 지나지 않았다. 바라문교의 성전의 암호는 그후, 이니쉬이트(비교전수자)만의 것이 되고, 이러한 바라문들은 중요한 문제에 관해서는 영구히 침묵을 지켜온 우파니샤드에서 찾아보도록 하는 것으로, 석가모니의 가르침의 정확성을 부정하는 자세를 공공연하게 취할 수 있게 되었다. 이것이 히말라야의 저쪽에서의 비교전승에 의한 이야기이다.

 

유사 이래의 살아있는 최고의 비전가인 스리 상카라차리아는 우파니샤드에 관해서 많은 바샤(Bhāshya), 즉 주역서를 쓰고 있다. 그러나 그 원문은 세속의 손으로 넘어오지 않았다고 생각되는 이상한 징조가 있다. 그러한 것들은 그의 승원(僧原)에서도 아주 조심스럽게 지켜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바라문들 안에서도 가장 위대한 해설자, 상카라차리아에 의한 바라문의 비교(秘敎)에 관한 귀중한 주역서는 스마트라(Smārt) 바라문 외의 대부분의 인도인에게는 긴 세월동안 사문자로 그대로 있었다고 생각되는 중대한 이유가 있다.

 

수마루다 바라문이란 상카라차리아에 의하여 창시된 종파이고, 지금도 남인도에서 대단히 강력하다. 하지만 지금에 와서는 이 종파는 주역서의 사문자를 이해하는데 그치는 지식을 얻어낸 학도가 나오는 정도의 종파인 것이다. 그러나 그들만의 승원장에는 진정한 비전가가 있다고 한다. 예를 들어, 남인도의 미소루의 서쪽 가스산맥에 있는 스링가-기리(Śriṅga-giri) 승원과 같은 곳을 말한다. 한편, “바라문”이라는 대단한 배타적 카스트 안에서도, 이런 스마트라 만큼이나 배타적인 파는 없다. 그 신도들은 대단히 자존심이 강하고 학습이 훌륭하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그들은 오컬트 과학과 비밀의 가르침에 관해서는 어떠한 사실도 밖으로 들어내지 않는다. 따라서 필자는 이 저작 안에서 공표하고 있는 내용에 대해 상당한 반대나 부정적인 반응을 각오하지 않을 수 없다. 절대로 틀리지 않는다거나 여기서 말하고 있는 모든 것들의 세세한 점까지 완전하게 옳다고 결코 주장하지는 않지만, 동시에 여기서 말하는 것은 절대로 부정할 수가 없는 것이라는 점을 밝혀둔다. 말하자면, 취급하고 있는 주제가 본질적으로 어려운 것이기 때문에 어떤 개념을 표현하는데 있어서, 영어나 서구의 언어는 거의 극복할 수 없는 제한이 있다. 때문에 필자가 가장 합리적으로 명백한 설명을 하지는 못한다는 것은 확실하다. 그러나 가능한 것들은 어려운 여러 가지 역경 속에서 이루어져 왔다. 다른 어떤 사람일지라도 더 이상의 것을 기대할 수 없을 것이다. 해설하고 있는 주제가 너무나 광대해서 그것을 충분히 논한다는 것은 설사 불가능한 것이라 해도, 그것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가를 일일이 표시해가면서 이 책의 내용을 요약해보겠다.

 

1) 「비경(Secret Doctrin)」은 고대의 지혜를 모아놓은 것으로, 1부의 우주발생론만으로도 광범위하고 정교한 체계이다. 이것은 현교의 푸라나(Purāṇas)조차도 마찬가지이다. 진화의 과정에서 당혹할 정도로 긴 체계를 정연하게 나열해 써가면서 설명한다는 것은 무수한 세대에 걸쳐 비전가의 예언이 필요한 것이었으나, 오컬트 상징의 신비적인 힘의 덕으로, 이 사실을 불과 몇 장의 기하학적인 기호와 그림문자로 기록되어 있다. 보통의 세속의 사람으로서 제아무리 박학한 인물일지라도 물건의 바깥쪽의 움직임과 행동밖에 인식하지 못한다. 앞에 말한 오컬트의 예언자의 반짝이는 응시는 물질의 핵심까지를 통찰해내서 그것에 있는 모든 정수(精髓)를 기록했던 것이다. 그러나 근대과학은 “사물의 정수”를 믿지 않는다.

그러므로 고대의 우주발생론의 전 체계를 부정하는 것이다. 이러한 체계가 몇 사람의 개인적인 공상(空想)을 모아 놓은 것이 아니라는 것은 말할 나위도 없다. 이것은 인류의 요람기를 지켜 보아왔던 상위의 존재들의 가르침으로서 하나의 초기의 인종에서 다음의 다른 인종으로 구두로 전해지는 전통을 확인하고 테스트해보고 확증하는 것을 통해서 해왔던 것이다. 위대한 아데프트들은 육체적, 지적, 사이킥적, 영적으로 여러 기관(器官)을 최고의 영력(靈力)으로 발달시켜 완성시킨 존재들이다. 여러 아데프트들의 비전과 몇 세기동안의 경험에 의한 조합(照合)으로 확증(確證)을 얻어내기 전까지는 비록 아데프트의 비전일 지라도 받아드려지지 않았다.

 

2) 모든 것들이 그것(거기)에서 나와서, 모든 것들이 그것(거기)둘레를 회전하고, 그것(거기)을 향해 끌어 당겨져 간다. 다른 것들의 도리(道理)는 모두가 그것(거기)에 의존하고 있다. 「비경(Secret Doctrin)」의 그와 같은 우주체계의 기본적 법칙은 유일의 동질이고 신성한 실질 원리인 것이며, 유일의 근본적인 원인이다.

 

보다 밝게 반짝이게 해오고 있던 몇 안 되는 자들이

원인으로부터 원인으로, 대자연의 비밀의 뿌리에로 인도되었다.

그리고 유일의 최초의 원리가 있었던 것을 알게 되었다.

 

그것을 “실질-원리”라고 말하고 있다. 이것은 현현 우주, 즉 환영에서는 “실질”이 되지만 처음도 끝도 없는 추상이며 눈에 보이지 않는 공간에서는 “원리”로 남는 것이다. “실질․원리”는 편제해 있는 실재이며 모든 것들을 포함한 비인격적(非人格的)인 것이다. 이런 비인격성은 이 체계의 기본적 개념인 것이다. 그것은 모든 우주의 원자 안에 잠재해 우주 바로 그것들이다.

 

3) 우주는 이 미지의 절대적 에센스의 주기적 나타남이다. 그렇지만 그것을 “에센스”라고 말하는 것은 그 도리의 진수(眞髓)에 반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 명사 “Essence”는 동사 esse, 즉 “있다(有)”라는 동사로부터 온 것이지만, <그것>은 인간의 지성에 의해 생각해내는 어떤 존재와도 동일시 할 수 없는 것들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영이나 물질이 아니다. 그 양쪽이라고 말하는 것이 가장 적절한 것이다. 파라브라흐만과 물라프라크리티는 실제에 있어 일체인 것이나, 현현해 있는 우주의 개념에서는, 또한 유일의 “로고스”라는 개념에 있어서는 둘인 것이다. 유능한 강연자인 수바 로우가 「바가바드」기타 강연집 안에서 말하고 있는 것처럼 파라브라흐만의 시초의 현현인 유일의 로고스의 객관적인 견지에서 말을 한다. <그것>은 파라브라흐만으로가 아니고, “물라프라크리티”로 해서 나타난다. 말하자면, 조건이 붙어져 있지 않고 절대인 것들의 배후에 숨겨져 있는 유일의 실재로서가 아니고, 그의 베일로서 나타나는 것이다.

 

4) 우주와 그 안의 모든 것들을 마야(MĀYĀ)라고 한다. 개똥벌레의 보잘 것 없는 수명(命)에서부터 태양의 생명에 이르기까지 우주 안에 있는 일절의 것들은 일시적인 것들이기 때문이다. 유일인 자(者)의 영원한 불변성과 그의 원칙의 무변화성에 비할 것 같으면 보잘 것 없고 늘 변화하고 있는 것들을 포함한 우주를 철학자의 입장에서 본다면 필연적으로 도깨비 불과 별다른 차이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우주 바로 그것과 마찬가지로 비현실적인 우주 안에 있는 의식적 존재물은 충분히 현실적인 것이다.

 

5) 우주 안에 그리고, 자연계에 존재해 있는 모든 것들은 의식이다. 말하자면 존재 자체의 그리고 그것 자체의 인식수준에 알맞게 의식이 주어져 있는 것이다. 예를 들어, 돌 속에는 우리들 인간이 알아낼 수 있는 정도의 의식을 인식할 수 없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돌에는 의식이 없다고 말할 수는 없다. 맹목적 혹은 무의식적 법칙은 없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생명이 없는 물질이나 맹목적인 물질은 있을 수 없다. 그와 같은 것은 오컬트 철학 안의 어디에도 없다. 오컬트 철학은 표면적인 나타냄만으로 멈추어 버리지 않는다. 오컬트 철학에 있어서, 본질적인 에센스는 그의 객관적인 면보다 더 현실성이 있는 것이다. 이 점에서 이 철학은 중세의 유명론에 가깝다. 유명론자에 있어서는, 보편적 개념이야말로 실재인 것이고, 개별의 사물은 명칭은 인간의 공상 속에서만이 존재할 뿐이다.

 

6) 우주는 안에서 바깥으로 펼쳐지고 이끌어져 있다. 위에서와 같이 아래에서도 역시 그러하며,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그러하다. 소우주이며, 대우주의 축도로 된 인간은 이런 우주법칙과 우주의 활동양식의 살아있는 증거인 것이다.

 

모든 외적인 운동, 행위, 몸놀림은 그것이 자발적인 것이든 기계적인 습관이든, 또한 육체적이든, 지적이든 내부에서 일어나는 감정이나 의지, 결단, 생각이나 마인드에 의해서 생겨난다는 것을 우리들은 알고 있다.

 

앞에서 말하는 감정, 의지, 생각의 3가지 기능의 어느 것을 통하여 주어지는 내적 충동에 의해 자극 받지 않고서는 인간의 외적인 체에 외적인 운동이나 변화가 생기지 않는다. 외부 우주 즉 현현 우주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전(全) 코스모스는 유정의 존재인 하이어라키의 거의 무한에 가까운 연속체계에 의하여 지켜지며, 통제 받으며, 움직여지고 있다. 유정의 존재들은 그러한 것을 행하는 사명을 지니고 있다. 우리들이 그들에게 어떤 명칭을 붙여도, 예를 들어, 디야니-쵸안이나, 천사(天使)라고 불러도, 그들은 카르마의 법칙과 우주의 법칙을 실행한다는 의미로 메신저인 것이다. 그들의 각각의 의식의 단계와 지식의 단계는 매우 다양하다. 그리고 그들을 세속적인 것이 전혀 섞여져 있지 않는 순수한 영으로서 “시간의 흐름에 예속되지 않는다”라고 하는 것은 시적인 공상에 불과한 것일 뿐이다. 이와 같은 존재들은 비록 지금은 아닐지라도 과거에 인간이었거나 또는 미래의 주기(만반타라)에서 인간이 되려고 준비하고 있다. 지금부터라도 인간으로 되는 것이라면 이미 그들은 완성된 인간인 것이다. 완성된 인간은 이승의 인간처럼 물질적이 아닌 보다 높은 영역에 있으며 이승의 인간과는 정신적으로 차이가 있다.

 

말하자면 그들에게는 2가지의 완전히 세속적인 성질을 지닌 인격의식과 인간적인 정서가 없어져 버리는 것이다. “완성된 인간”은 이와 같은 감정으로부터 해방되어 버린 것이다. 왜냐하면 (a) 그들은 혼을 마비시키는 무거운 짐이 되는 육체를 더 이상 가지고 있지 않다. 또 (b) 순수한 영적 요소에 제약이 가해지지 않기에 이승의 인간보다는 훨씬 자유롭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이승의 보통인간처럼 마야의 영향을 덜 받는다. 만약 자신의 영적 인간과 육체인간이라 말하는 두 가지의 면을 완전히 떨어지게 할 수 있는 아데프트라면, 마야에 좌지우지 당하는 일은 없다. 지금부터 인간의 모나드로 될 모나드들은 지금까지는 이승의 인체를 가져 본적이 없으므로 그들 자신은 개별의 인격이나 에고가 있다는 감각을 느끼지 못한다. “인격”이라는 언어는 제한과 관계를 의미한다. 말하자면 코울리지(Coleridge)가 정의하고 있는 것처럼 인격이란 “그 자신 안에 존재하고 있는 개체성이지만 땅으로서의 자연과 함께 하는 것”이다. 물론, 이 말은 인간 이외에는 적용되지 않는다.

 

그러나 대대로 현자들에 의하여 강하게 주장되어 온 것처럼 이러한 존재는 고급이거나 저급이거나 간에, 분리된 실재로서는 개성이나 인격을 지니고 있지 않다. 즉, 그들은 인간들이 “나는 나 자신일 뿐, 다른 누구도 아니다”라고 말하는 의미로서의 개성은 없다. 다른 말로 바꾸어 말한다면, 그들은 지구에서 인간이나 사물에 있는 것 같은 확실한 분리를 의식하지 않는다. 개성이란 그들 각각의 하이어라키의 특성인 것이고, 그 하이어라키를 구성하는 단원의 특성은 아니다. 또 그의 특성은 각 하이어라키가 속해 있는 계층의 높고 낮음에 따라 여러 가지이다. 동질이며 유일의 신성의 영역에 가까우면 가까울수록 하이어라키의 개성은 순수한 것이며 모나는 일은 거의 없다. 그들은 모든 점에서 유한인 것이다. 단, 그들의 고급원질만은 유한이 아니다. 보편적이고 신성한 불꽃을 반영시키고 있는 불사의 불꽃인 것이다. 단지 환영의 영역에서만 그곳에 있는 다른 것들과 마찬가지로 환영적인 분화에 의하여 개별화되어 분리되고 만다. 그들은 절대적 생명에서는 환영이라고 말하는 우주의 스크린(Kosmic screen)에 투영되는 흐름이기 때문에 “살아있는 자들”이라고 말한다. 이와 같은 “생명들”을 의식하는 무지의 불이 타기 전까지, 그러한 존재의 생명은 결코 꺼지지 않는다. 그들은 창조되지 않고 있는 광선에 활기를 주는, 즉 생명의 강의 강기슭에서 반짝거리는 위대한 중심태양의 반영으로서 태어난 것이다.

 

그들의 분화된 옷이 인간의 몸처럼 소멸되어 가는 반면, 그들 안에 있는 내부의 원리는 불사의 물에 속해 있다. 에드워드 영이 말한 것처럼 “천사는 뛰어난 인간”일 뿐 더 이상은 아니다. 그들은 “구원의 천사”도, “보호의 천사”도 아니다. 또“지고한 신의 선구자들”도 아니고 더불어 인간의 환상이 만들어 낸, 신들의 “노여움의 사자들”도 아니다. 그들에게 보호를 청원하거나 기분을 맞추어 주어 호의를 얻을 것이라고 믿는 것은 우둔하고 어리석은 짓이다. 그들은 인간과 똑같으며 불변의 카르마의 법칙과 코스모스의 법칙 안에 매어있으며 살아가고 있다. 그 이유는 명백한 것이다. 그들의 원질 안에는 인격의 요소가 없기 때문에 현교(現敎)에서 말하는 신인 동형론의 신과 같은 인격적인 요소를 그들에게서 찾을 수는 없는 것이다. 인간들이 만들어내 신은 질투심이 깊고, 배타적이고, 기뻐하고 노하기도 하며 노했다가도 공양물을 바치면 즐거워하는, 어리석은 인간보다도 훨씬 제멋대로 이고 허영심이 강하다. 2권에서 밝히고 있는 것처럼, 인간은 이러한 천상의 하이어라키의 모든 에센스의 복합체인 것이라, 어떤 면에서는 특정 하이어라키나 저급 천사들 또는 그 조합보다도 높은 단계를 이루어낼 수 있다. “인간이 데바들의 기분을 맞추거나 그들의 명령을 따를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러나 자신이 저급인격을 마비시켜서, 고급아의 유일의 절대아로부터 분리되지 않은 완전한 지식을 이루어냄으로서, 이승의 지상생활동안에도 “진아의 일인”이 될 수도 있다. 이와 같이 인간이 엘로힘, 즉 디야니가 되려면 무지를 쫓아내는 지혜의 나무의 열매를 먹어야 한다. 그리고 일단 그런 세계에 이르면, 모든 하이어라키에는 통일의 정신, 완전한 조화가 그 사람 위로 내려와서 어느 때일지라도 그 사람을 보호해 준다.

 

과학자가 자연령과 신을 믿지 않는 가장 큰 이유는 유물주의 때문이다. 오컬티스트들과 카발라 학자들을 제외한 심령주의자들이 죽은 자의 영은 맹목적으로 믿으면서 자연령과 신을 믿지 않는 가장 큰 이유는 물질의 진정한 에센스와 성질에 관한 일반적인 무지 때문이다.

 

죽은 자의 령 외에 우리들을 둘레에 싸고있는 다른 의식적인 것들의 존재를 믿고, 안 믿고는 그의 궁극적 에센스에 있어서의 자연계에의 만물의 유일한 이론을 받아들이느냐, 안 받아들이느냐에 달려있는 문제이다. 학도가 “오컬트”의 우주발생론을 마음속에서 확실하게 지니고 그 다음에 연구의 지침이 되는 유일의 확실한 실마리는 령, 물질과 그의 진정한 “에센스”에 관한 원초의 진화에 관해서 바르게 이해하는 것이다.

지금까지 설명한대로, 사실 소위 “영”은 모두가 육체에서 이탈해 나온 인간이거나 미래의 인간이거나, 둘 중의 하나인 것이다. 최고의 대천사(디야니-초한)에서부터 최후의 의식적 “건설자”(보다 하위에 위치하는 영적 존재)에 이르기까지 모두는 다른 “만반타라(顯現期)”의 어느 영역에서, 즉, 수없이 긴 세월 이전에 살아왔던 인간인 것이다. 또는 낮은 단계의 반지성적인 존재나, 지성을 갖지 않는 엘리멘탈들은 모두가 미래의 인간인 것이다.

 

영에게 지성이 주어져 있다고 하는 사실만으로 그의 실재는 인간이었던 것임에 틀림없다. 인간의 주기(윤회: 바꾸어 태어난다)를 거쳐 지나면서 지식과 지성을 얻었다고 하는 것을, “오컬티스트”는 충분히 이해를 할 것이다. 우주에는 분할할 수 없는, 단 하나의 절대적인 전지와 영지가 있다. 그리고 이것은 유한의 코스모스의 모든 원자와 무한소의 점을 통하여 진동한다. 우주는 무궁한 것이다. 그 속에 무엇이 포함되어 있는가는 별개로 하고, 사람들은 이것을 공간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현현세계에서 그 공간의 태초의 분화는 순수한 영적인 반영물이었다. 그리고 그 안에서 생겨난 실재에는 우리들이 지금 생각하고 있는 “의식”과 관계가 있는 의식이 주어지지 않았다. 그것들이 하나씩, 하나씩, 개별적으로 그러한 것을 얻어내기 전까지는 인간적 의식을 가질 수가 없는 것이다. 이것은 불가사의할지는 모르지만 비교철학에서는 사실인 것이고, 더불어 아주 명백한 것이다.

 

자연의 전 질서는 한층 더 높은 생명을 향하여 점진적인 행진을 하고 있다. 하지만 겉으로 보기에는 가장 엉망으로 힘이 작용하도록 되어 있다. 끝없이 순응성을 갖추고 있는 진화의 전과정은 이러한 사실을 뒷받침하는 증거가 된다. 강한 종자에게 여유를 갖도록 만들어 주기 위해 약한 종자를 뽑아내는 불변의 법칙은 적자생존을 확실히 하는 것들로서 그러한 직접적인 행위는 너무도 잔혹한 것이지만 모두가 장대한 목적을 향해서 일하고있는 것이다. 생존경쟁에서 적자가 살아남도록 순응하는 사실은 “무의식의 자연”이라고 말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고급의 혹성 영들(디야니-초한들)에 의해 지도를 받고 있는 반지성적 존재물(사대령들)에 의하여 조작되고 있는 힘의 집합체가 있다는 것을 나타내 주고 있다. 혹성영들의 집합체는 미현현의 “로고스”의 현현된 언어이며, 동시에 우주의 “마인드”와 그의 불변의 법칙을 구성한다.

 

비교철학에서 우주에 관한 3가지 면을 3가지의 차이로 설명하는 것은 우리들에게 깊은 인상을 주고 있다. 말하자면 상주하는 것들(로부터의 진화한) 앞서(存在)있었던 것들과 그의 반영 혹은 그림자(影) 인 현상, 즉 환영의 세계이다.

 

“만반타라”라고 알려진 생명의 대 신비와 위대한 “드라마”가 진행되는 동안에, 진정한 “코스모스”는 환등기에 의하여 그림자가 나타나오는 흰색(白)의 “스크린”의 뒤에 놓여져 있는 것과 같다. 실제의 형이나 물건들은 보이지 않지만, 진화의 실(糸)은 보이지 않은 손에 의하여 당겨지고 있다. 그러므로 사람들이나 물건들은 “마하-마야”, 즉 대환영의 올가미 뒤에 있는 실재, 즉 “흰 스크린”에 반사되어 있는 반영일 뿐이다.

이와 같은 일은 대홍수 후에나 그의 전에서도, 모든 철학 모든 종교에서, 그리고 인도나 칼데아 또는 중국이나 그리스의 성자들에 의하여 가르쳐졌다. 인도나 칼데아에서는 이러한 3개의 우주를 중심의 영원한 씨앗에서 발산해, 그것과 같이 하나의 지고의 통일체를 만들어내는 3개의 삼위일체(三位一體)로 상징하여 현교적으로 가르쳐졌다.

 

그것은 시초의 것들, 현현 되어버린 것들, 창조하는 것의 3개조, 말하자면 하나 속에 있는 셋인 것이다. 창조하는 것들이란 최초의 이상적인 시초의 것을 말한다. 이것은 인도의 육파철학 모두가 같이하는 견해이다. 육대파란 것은 지혜의 통일체의 6개의 원질이고 그 지혜에 감추어진 지식, 즉 그노시스는 7번째이다.

 

7개의 “스탠저”의 주석은 표면적으로 취급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S.D에서 말하고 있는 태고의 가르침은 문자 그대로 이해한다해도 우주발생론에서 나오는 내용은 현교적인 면에서 검토해온 다른 어떤 고대의 성전보다도 근대적인 의미로서 과학적인 것이라고 필자는 생각한다. 그렇지만, 앞에서도 말한 것처럼, 이 저작에서도 나와 있듯이, 설명을 보류하거나 머뭇거리는 경우가 훨씬 많이 있으니, 학도들은 자기자신의 직감을 써서 탐구하기를 기대한다. 우리들의 주된 목적은 이미 공표되어 버린 것, 그리고 유감스럽게도 대단히 부정확하게 공표되어 있는 것을 설명하는 것이다. 그리고 거기에 담겨진 어설픈 실마리의 지식을 보충해주거나, 또, 근대 종교의 파멸주의 특히, 잘못되어 있으면서도 멋대로 과학이라고 우기는 현대유물주의의 강한 공격으로부터 우리들의 가르침을 지키는 것에 있다. 실제에 있어서 소위 말하는 과학자들과 사이비 학자들은 지금까지 세상에 내놓은 많은 비논리적인 이론에 책임을 져야 할 것이다.

 

심각한 무지로 인하여 일반사람은 권위에서 내놓는 모든 것들을 맹목적으로 받아들인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은 과학자에서 나온 말이라면 마치 증명된 사실처럼 생각해버리는 것이 당연한 의무인 것처럼 느끼고 맹목적으로, “이교"라 말하는, 뿌리에서 온 모든 것을 조소(嘲笑)하도록 가르쳐진다. 이와 같은 유물론자는 의논과 논쟁이라고 하는 자기 자신들의 무기를 가지고 싸움을 해가고 있다. 그리하여 우리들의 생각과 유물론자의 생각을 비교해가면서 위대한 권위자들이라 할지라도 어떤 잘못을 범하는 경우가 있는 지를 표시하기 위해 각 권에 보유를 첨가해 놓고 있다. 이렇게 해서 우리를 반대하는 사람들의 취약점을 밝히고, 또 과학적이라는 이유로 그들이 얼마나 자주 부정확한 궤변을 늘어놓는지 증명함으로서 권위자의 잘못을 정확하게 나타낼 수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들은 보편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는 헤르메스의 가르침과 “지혜”를 고수한다. 유물주의의 과학자들은 아리스토텔레스를 고수함으로 해서 직감이나 옛날부터 내려오는 경험을 반대하고 있으며 진리란 것을 서구에서만 독점하는 재산으로 생각한다. 그러므로 우리들과 그들은 일치하지 않는다. 헤르메스가 말한 것처럼, “지식(knowledge)과 감각(sense)과는 대단한 차이가 있다. 감각은 감각을 넘어선 것들과 관계가 있으나, 지식(gyi)은 감각을 얻기 위한 목적인 것이다”. 말하자면, 지식은 우리들의 육체의 뇌의 환영이고 뇌의 지성(intellect)인 것이다. 이와 같이 감각이나 마인드(마나스)가 고생 끝에 얻은 지식과, 직관적이며 전지한 영적 신성혼 사이에 놓인 대비를 강조하는 것이다.

 

먼 미래에는 이와 같은 실제적인 저작이 어떻게 평가받을 지 모르지만, 적어도 다음의 사실은 입증돼야한다고 생각한다.

 

(1) 내스티카(nāstika)라고 말하는 인도어의 뜻은, 인격화된 모든 신과 우상을 거부하는 자라는 뜻이다. 「비경(The Secret Doctrine)」에서는 그와 같은 뜻 외의 무신론을 가르친 일이 없다. 이런 뜻에서는 모든 오컬티스트는 내스티카인 것이다.

 

(2) 「비경(The Secret Doctrine)」은 로고스 즉 우주의 집합적 “창조주”를 인정한다. “건축가”는 건축물에 있는 돌 하나도 만지지 않지만, 플랜을 제공한다. 그리고 건물을 짓기 위한 실제적인 일은 석공에게 맡긴다. 이처럼 건물의 창조자라는 뜻을 지닌 우주의 창조자 데미오우르고스(Demiourgos, 건축가)를 인정하는 것이다. 우리의 경우 플랜은 우주의 관념화에 의하여 공급되고 건축의 노동은 지성을 갖춘 힘의 세력에게 맡겼다. 그런데, 데미오우루고스는 인격신이 아니다. 말하자면 불완전한 우주 너머에 있는 신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디야니-초한과 그 외의 다른 힘의 집합체인 것이다.

그 외의 다른 힘은―

 

(3) 이중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다. 그러한 힘은 (a) 물질 고유의 성질에 내재되어 있는 비이성적이고 맹목적인 에너지와 (b) 그런 에너지를 지도하고 이끌어주는 지적 혼, 즉 우주의식으로 구성되어 있는, 그리고 우주심의 관념을 반영하는 디야니 초한의 사고가 합쳐진 것이다. 이것은 만반타라 동안, 지구에서 물리적 현상과 정신적 결과가 부단히 연속되는 결과이고 그 모든 것은 카르마에 따르고 있다. 그 과정이 언제나 완전한 것은 아니다. 그처럼 지도적 지성이 있다는 증거는 얼마든지 있다. 또한 그런 과정에는 갭이나 갈라진 틈이 있으며 실패인 경우도 자주 있다. 그러므로 집합적 지표인(데미오우르고스)나, 개별로 나누어서 일하고 있는 여러 힘은 신성한 영접과 예배의 대상은 아니다. 그렇지만 인류로부터 감사와 경의를 받을 권리는 있다. 그리고 인간은 자신의 힘을 다하여 그런 주기적인 일을 이루어내도록 자연과의 협력자가 되어 “이데아”의 신성한 진화를 도와주도록 늘 노력하여야만 하는 것이다.

 

언제나 알 수 없고 인식 할 수 없는 “카라나(Kāraṇa)”만이 즉, 모든 것 원인의 원인없는 원인만이 우리들 하트(heart)의 신성한 미로의 땅에 사원과 제단을 쌓아올려야 할 것이다. 말하자면 그것은 눈에는 보이지 않고 만져볼 수도 없는 것으로 영적 의식의 “조용하고 작은 소리”를 통하지 않는다면 결코 말하지 않으며 우리들의 하트에 있는 것이다. 그의 앞에 예배하는 사람들은 침묵 속의 자신들의 혼 이 신성한 고독 속에서 예배해야 하는 것이다. 그와 같은 예배자에 있어서 자신과 보편 영(Universal Spirit) 사이의 유일한 중개자는 자기자신의 영이 되어야 하고 현존 앞의 유일한 승려는 자신의 선한 행위이며 죄 많은 생각은 눈으로 볼 수 있으며 객관적인 유일한 제물이 된다.

 

(4) 물질은 영원한 것이다. 물질은 유일 무한의 보편적 마인드가 그의 개념을 구성하기 위한 우파디(Upādhi, 물질적 기초)인 것이다. 그러므로 비교학도는 자연계의 모든 물질은 유기적이며 살아있다고 주장한다. 과학에서는 행하는 유기적 물질과 비유기적 물질의 구별은 근거가 없으며 이치에도 맞지 않으며 독단적인 것들이다. 과학에서 어떻게 생각하든지 간에(우리들 모두가 경험에 의하여 알고 있는 것처럼, 엄격한 과학은 변덕스러운 편이다) 오컬티즘는, 마누(Manu), 헤르메스(Hermes)로부터 파라셀수스(Paracelsus)와 또 그들의 후계자에 이르기까지 태고로부터, 과학과는 차이가 있다고 알고 있었고 또 가르쳐 오고있었다.

그리하여 위대하고 위대한 헤르메스 트리스메기스투스는 말했다.

 

오, 나의 아들이여. 물질은 생겨나는 것이다. 이전물질이 있다. 물질은 생겨난다는 것의 매체이기 때문이다. 생겨난다고 하는 것은 창조되는 것이 아니고, 예견돼 있는 신의 활동 양식인 것이다. 생겨난다는 것의 배아(씨앗)를 통해 물질(客觀的)은 생겨난다. 창조자는 이상적인 형체에 따라 그것을 형으로 만들고 있기 때문이다. 물질이 아직 생겨나지 않았을 때에는 형체는 없었다. 그것을 움직이게 했을 때 생겨나는 것이다.

모두가 하나(一)의 보편적 창조의 노력에서 온 소산(所産)이다. 자연계에는 죽은 것은 아무 것도 없다. 모두가 유기적이면서 살아있고, 따라서 전세계는 살아있는 유기체로 보인다.

 

(5) 우주는 자신의 이성적 계획에 의해서 진화했다. 그것은 베단타학파에서 파라브라만이라고 부르는, 무의식 안에 있는 영원을 통해서 펼쳐진 것이다. 이 플랜은 플라톤의 “내재되어 있으며 영원자재의 이데아”와도 같은 것이다. 현재는 하트만(von Hartmann)의 철학에 반영되어 있으며 스펜서가 말하는 “알 수 없는 것”이 오컬티스트가 믿고 있는 초월적 실재와 약간 닮은 정도이다. 그것은 “현상의 배후에 있는 힘”, 말하자면 만물(萬物)이 나오게 되는 뿌리인 영원무한의 에너지를 인격화한 것에 불과하다고 보는 견해가 많다. 그러나, 「무의식의 철학」의 저자 하트만은 이 점에 있어서, 죽어야만 하는 인간으로서 다다를 수 있는 대 신비에 가까워졌다. 고대, 중세를 불문하고, 이 문제에 가까이 다가간 적도 없을 뿐더러 힌트를 제시한 철학자조차 거의 없었다. 파라셀수스가 그것을 추론적으로 말했다. 그의 생각을 F 하트만 박사가 「파라셀수스의 삶」이라는 책에서 훌륭하게 매듭을 짓고 있다.

 

기독교의 모든 카발라학도들은 동양의 근본사상을 잘 이해하고 있었다. 활동력 즉 “커다란 숨의 부단한 운동”은 새 주기의 밤이 세는 새벽에 코스모스를 깨어나게 해주는 것뿐이고, 2개의 상반된 힘에 의해 그것을 활동시켜서 코스모스가 환영의 세계에서 객관적으로 되게끔 한다. 말을 바꾸어 설명하면, 이런 이중의 운동이 “코스모스”를 영원의 이상세계로부터 유한의 현현 세계로, 즉, 원체의 세계로부터 현상계로 옮겨간다.

현재와 과거와 미래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이 현재에 영원히 존재하고 있다. 그 영원한 현재 속에서 셀 수 없는 무수한 형체들이 사라져 가는 것은 오로지 그 객관세계에서 뿐이다. 그러한 것은 영원히 이데아로서 존재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것들이 소멸할 경우에는 반영으로 존재한다고 본다. 인간의 형체도, 어떠한 동물, 식물, 광물의 형체도 창조되었던 일은 없었다. 그것이 ‘생겨나는 것’ 즉, 현재의 물질성으로 객관화를 시작한 것은 우리들의 이 세계에 있어서였다. 즉, 가장 순화되고 초감각적인 에센스가 안에서부터 농밀하게 펼쳐지며 밖으로 향했다. 따라서, 우리들의 인간의 형체는 아스트럴적 즉, 희박한 원형으로서 영원 속에 존재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 원형을 객관화시켜, 이승에 생명을 가지는 것을 의무로 지니고 있던 영적 실재(신)들은 그의 원형에 맞추어 자기자신의 에센스를 미래의 자아의 원질적인 형체로 진화 시켰다.

 

이런 인간의 우파디, 즉 인간의 기초적인 형태를 준비 한 다음에, 이 세상의 자연력은 이와 같은 초감각적 원형에 맞추어 일을 하기 시작했다. 원형에는 자기자신의 독특한 요소 외에, 이 구체의 과거와 미래의 식물과 동물 형체의 모든 요소가 포함된다.

이와 같이 현재의 인간의 형태를 입기 전에, 모든 식물체와 동물체를 거쳐 온 것이다. 이에 관해서는 2권의 스탠저 및 주석에서 충분히 설명하고 있으므로 여기서는 더 이상 언급할 필요가 없다.

 

파라셀수스의 헤르메스-카발라 철학에 의하면 코스모스의 그 자체에서 전개시킨 것은 “일리아스터(Yliaster)” 즉 윌리암 크룩스가 화학에서 생성시킨 “프로타입”의 선조, 즉 원초의 “프로토머티리아(원질료)”인 것이다.

 

창조가 행하여지면, 일리아스터는 스스로 분해한다. 말하자면 녹아들고 분해가 되어 그것 자체에서 이데오스(ldeos) 즉 혼돈(Mysterium magnum, Iliados, Limbus major) 또는 원초질료를 발전시켜간다. 원초의 에센스는 일원적인 성질로서, 생명전지, 영적 힘, 눈에 보이지 않는 것, 이해할 수 없는 것, 그리고 묘사할 수가 없는 힘으로서만이 아니고, 살아있는 것들의 실질을 구성하는 생명이 있는 질료로서 모습을 나타낸다. 경계(Limbus) 혹은 원초질료[또는 프로토하일(prōto-hylē)]의 이데오스 안에는 모든 창조물의 유일의 모체, 즉 만물의 실질이 포함되어있다. 고대인은 그것을 카오스(Chaos)라 부르고 씨눈의 저장소라 여겼다. 그곳에서 대우주가 나오고 후에 미스테리아 스테셜리아(Mysteria specialia)에서의 분할과 진화에 의하여 개별의 것들이 존재해 있다. 모든 것들과 모두의 기본적 실질은 그 속에 잠재적으로 포함되었던 것이지 실제에 있던 것은 아니었다. 말하자면, 예술가에 의하여 창조된 형태가, 나무 조각 안에 포함돼 있었던 것처럼, 또한 강철에 조약돌을 두들기면 스파크를 일으키며 그 에센스인 불꽃을 일으키는 것과도 같은 원리이다.

 

역자인 프란쯔 하르트만 박사는 “파라셀수스가 300년 전에 물질의 잠재력에 관한 근대의 발견을 이미 예상하고 있었던 것 같다”라고 정확하게 짚어내고 있다.

 

그러므로 이 메이거스 림버스(커다란 경계, 대극) 또는 파라셀수스의 일리아스터란 스탠저Ⅱ와 다른 여러 스탠저에서 여러 번 보아온, 공간 안에 나타내기 이 전에, 내부에 있었던 “아버지-어머니”인 것이다. 그것은 “아디티 프라크리티(Aditi-Prakriti)” 말하자면, 영적 물질적 자연에 의하여, 대우주와 소우주(또는 우주와 우리의 구체)라고 말하는 이중성격에 표현도 있었던 코스모스의 보편적 모체인 것이다. 「파라셀수스」에는 다음과 같이 설명되어있다.

 

나무는 작은 씨에서 생겨난다는 것과 같은 뜻으로, 메이거스 림버스는 모든 살아있는 것들의 양성소인 것이다. 그렇지만 대(大) 림버스는 신의 말에 그 기원을 두고 있으며 소(小) 림버스(이승의 종자 또는 정자)는 지구에 기원을 두고 있다. 대 림버스는 모든 것이 나오는 뿌리이며 소 림버스는 대 림버스에 의하여 만들어진 각각의 궁극는 것들이다. 자식은 아버지의 유기적인 특징을 따서 유기체가 만들어지듯이 소 림버스에 대 림버스의 특성을 모두를 지니고 있다. 일리아스터가 용해되어 갈수록, 분할되고 분화하고 개별화되는 힘[이미 익히 알고 있는 포하트를 말함]인 “아레스(Ares)”가 행동을 시작한다. 모든 생산은 분리의 결과에서 생긴 것이다. 이데오스로부터 지, 수, 화, 풍의 원소가 생겨났다. 그러나, 그 탄생은 물질적인 양식, 혹은 단순한 분리에 의하여 행하여진 것이 아니고 영적이며 역학적으로 [가령, 화학의 결합처럼 서로 다른 기계적 혼합의 복잡한 짜임이 아니다] 행하여졌다. 마치 조약돌에서 불꽃이 나오고 종자에서 나무가 나오지만, 원래 조약돌에는 불이 없고, 종자에는 나무가 없었던 것과 같은 것이다. “영은 살아있고, 생명은 영인 것이다. 생명과 영[프라크리티-푸르샤(?)]은 만물을 만들지만, 그러한 것들은 원질에서는 둘이 아니고 하나인 것이다”. 원소에도 또한 각각, 자신의 일리아스터가 있다. 모든 형체 내부에 있는 질료의 모든 활동은 같은 샘에서 흘러나온 것에 불과하다. 종자에서 섬유질로 되어 있는 뿌리가 생겨나고, 그 다음에 가지와 입이 있는 줄기가 자라고 나중에는 꽃과 종자가 되는 것처럼, 만물은 원소에서 생겨나고, 자신들의 어버이의 성질을 띄우고 있다. 다른 여러 형체를 생겨나게 할 수가 있는 기본적 성질로서 이루어진다. 모든 살아있는 것들의 어머니로서, 원소는 눈에 보이지 않는 영적 성질의 것들이며, 혼이 있는 것이다. 여러 원소는 모두 “미스테리움 마그넘”으로부터 나온다.

 

이것을 「비쉬누 프라나(Vishṇu-Purāṇa)」와 비교해 보라.

 

. . . 혼, 즉 “크쉐트라즈나(Kshetrajňa)”[구현된 영]에 의하여 통제 받았던 “프라드하나(Pradhāna)”[원초의 질료]에서 여러 가지 특성의 반정도가 발달된다. 대 원칙(마하트)[보편적]으로부터 지성[즉 마인드]가 생겨난다. 그곳이 정묘한 원소와 감각기관의 뿌리인 것이다. . .

 

이와 같이 고대에서는 자연의 기본적 진리가 모두 보편적이었으며, 또, 영, 물질, 우주, 그리고 신, 질료, 인간에 관한 기본적 개념도 동일했다는 것을 입증할 수가 있다. 지구상의 가장 오래된 철학인 힌두교와 헤르메스 철학을, 인도와 이집트의 성전에서 각각 살펴본다면 두 가지는 동일한 사상인 것을 쉽게 인식할 수 있다.

이것은 앞서 말한, 우리들의 친구인 고(故) 안나 킹스포드 박사의 「헤르메스의 단편」의 최근의 번역과 해석을 읽어본 사람은 명백히 알게된다. 이 단편은 당파심이 강한 그리스인과 기독교 교인에 의하여 왜곡되어 가치를 상실해 있었다. 역자는 아주 훌륭하게 직감을 활용해서 저서의 취약점을 들춰내서 설명하고 각주를 넣는 방법으로 수정하고자 했다. 박사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눈에 보이는 세계의 창조가 지고의 신의 대리자인 “일하고 있는 신들” 즉, 타이탄들에 의해 이루어진다는 생각은 모든 종교체계에서 인식되고 있으며 완전히 헤르메스적인 생각 방법이다. 모든 곳에 있는 신성한 힘이 자연의 여러 힘을 통해 뒤에서 모르게 일하고 있는 것을 표시한 근대과학의 연구(?)와 일치하고 있다.

 

헤르메스는 말한다.

 

모든 것을 포함하며 그 모든 것 자체인 그의 보편적 실재는, 혼과 세계 즉 자연을 포함하고 있는 모든 것을 움직이게 하고 있다. 통일체에서 보편적 생명의 다양성을 띄우며 무수한 개체로 구별되지만, 그럼에도 전체로서는 하나인 것이고. 모든 것은 통일체에서 나오고 있다.

 

그리고 계속해서 말한다.

 

신은 마인드(a mind)는 아니지만 위대한 마인드(the Mind)의 원인이며, 영(a spirit)은 아니지만, 신성한 영(the Spirit)의 원인이며, 빛(light)은 아니지만 찬란한 광채(Light)의 원인이다.

 

위의 것은 “신성한 포이만드레스(Poimandrēs)”가 기독교의 “희석시키기”에 의해 몇몇 부분에 왜곡을 가하기는 했지만, 진정한 철학자에 의하여 쓰여진 것이라는 것이 명백히 나타나고 있다. 한편 「헤루메스 철학의 단편」은 신인동형론적인 지고 자를 실재라고 믿는 당파심이 강한 이교도들에 의하여 생겨난 산물이다. 그러하지만, 양쪽 모두 비교철학과 힌두교의 프라나에서 나온 반영인 것이다.

두 가지의 기원을 비교해보자. 하나는 헤르메스학파의 “지고의 모든 것”에 기원을 두고 있고 또 하나는 후세 아리아인들의 “지고의 모든 것”에 기원을 두고 있다. 다음은 수이다스(Suidas)가 인용하고 있는 「헤르메스 철학의 단편」 중 일부이다.

 

위대한 신의 성스러운 작품, 하늘이여, 나, 그대에게 간절히 원한다. 우주적 세계가 만들어졌을 때, 처음의 말씀은 아버지의 소리였나니, 나, 그대에게 간절히 원한다. 그대, 만물을 유지하시는 아버지의 독생자, 그 말씀으로서 간절히 원한다. 도와주소서, 도와주소서.

 

그 이전에는 다음과 같은 말이 있었다.

 

이와 같은 이상적인 빛은, 이상적 빛의 앞에 있었다. 지성의 반짝이는 지성은 언제나 있었으며 통일체는 우주를 포함한 영에 불과한 것이었다. 거기에서는, 신이나 천사나 그 외, 다른 어떠한 본질적 요소도 나오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것은 만물의 주이고, 힘이며 빛이고, 모두가 그에 의존해, 그의 안에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다음 말과는 서로 상충되는 의견을 보이고 있다.

 

신들에 관해 말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물질적인 것으로는 비물질적인 것을 표현할 수 없으며, 체(體)를 지니지 않고, 외양이나 형태, 질료가 없는 것들을 감각으로 이해할 수는 없는 것이다. 나는 이해한다. 오, 타티오스여! 정의를 내릴 수 없는 것, 그것은 신이라고 나는 이해한다.

 

위 두 개의 견해는 명백한 모순이다. 그것은 다음과 같은 것을 표시하고 있다. (a) "헤르메스”란 몇 세대동안 모든 단체의 신비가들에 의해 쓰여진 가장 보편적인 필명이었다는 것과, (b) 「단편」이 논쟁의 여지가 없는 고전이라는 이유로 비밀의 가르침으로 받아들여지기 이전에는 예리한 식별력을 지니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러면 앞의 기원문과 비교해보자. 그것 역시 「단편」과 같이 고전인데 어쩌면 「단편」보다도 훨씬 더 오래된 것인 지도 모른다. 마이트레아를 가르치는 아리안의 헤르메스이며, 인도의 아스클레피오스인 파라사라(Parāśara)는 삼위일체의 하나로서 비쉬누(Vishṇu)를 부르고 있다.

 

변하지 않으며 영원한 유일의 보편적 자연, 만물을 능가하는 힘을 지닌 자, 지고 자인 비쉬누에 영광있으라. 히란야가르바(Hiraṇyabarbha)이고 하리(Hari)이고 삼카라(Śaṃkara)[브라흐마, 비쉬누, 시바]이며 세계의 창조자, 유지자, 파괴자, 그에게 영광이 있으라. (자신을 따르는 자들의) 해방자인 바수데바(Vāsudeva), 그의 원질은 하나이기도 하고 각양각색이기도 하다. 정묘한 것이기도 하면서 물질적이고, 지각이 없으면서도 있다. 궁극의 해탈(解脫)의 원인, 창조, 존재, 세계의 끝나는 원인이고, 세계의 뿌리이며, 세계에서 구성하는 비쉬누에 영광이 있으라.

 

이것은 풍부한 철학적 뜻을 기저에 깔고 있는 장엄한 기원(祈願)이다. 그러나, 세속적인 일반인에게 있어서는 시초의 「헤르메스철학의 단편」과 마찬가지로 신인동형의 실재를 암시하는 것과 같다. 우리들은 양쪽 모두를 설명해야 하는 느낌을 존중하지만, 내적 뜻과는 전혀 조화를 이루지 못하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심지어 같은 헤르메스의 논문에도 다음과 같은 모순이 있다.

 

트리스메기투스 : 나의 아들아, 진실은 지구상에 없다. 진실이 있을 수가 없는 것이다. 지구상에 진정한 것들은 아무 것도 없다. 있는 것은 환상뿐이다. 인간은 인간으로서는 진실이 아니다. 나의 자식이여, 진정한 것은 그것 자신의 안에 있으며, 있는 그대인 것이다. 인간은 일시적인 것이다. 그러므로 진짜는 아니다. 그것은 외형일 뿐이고, 외형은 말할 것 없이 환영인 것이다.

타티오스 : 그러면 나의 아버지여, 천체 그것들은 변화가 있음으로 진짜가 아닙니까?

트리스메기투스 : 태어난 것들, 변화하는 것들은 진짜가 아니다. 천체에도 너무나 변화가 많음으로, 그 안에는 어떤 허위가 있다. 오, 타티오스야, 유일하고 그것 외에는 없는 것, 물질로도 되어있지 않고, 어떤 물체 안에도 없는 것, 색이나 형도 없고, 변화도 하지 않고, 변질되지도 않고 늘 있는 것이다.

 

이것은 베단타학파의 가르침과 일치하고 있다. 주된 사상은 오컬트인 것이다. 「비경(The Secret Doctrine)」에는 「헤르메스 철학의 단편」안에 나오는 부분이 많이 있다.

 

아주 시초부터 말해오던 것처럼, 전 우주는 지적 및 반 지적인 세력에 의하여 지배당하고 있다고 「비경(The Secret Doctrine)」은 가르치고 있다. 기독교 신학은 이러한 신념을 인정하고 때로는 그 이상으로 밀어붙이기조차 해보지만, 뚜렷한 근거 없이 천사나 악마로 구별지어 말한다. 과학은 이와 같은 존재를 부정하고 그러한 존재에 대해 조소를 보낸다. 심령주의자들은 죽은 자에게 영이 있다는 것을 믿고 있으나 그 범주를 넘어선 것과 눈에 보이지 않는 존재들을 모두 부정한다. 오컬티스트와 카발리스트 만이 한편에서는 아주 독단적인 신앙으로 되고, 다른 편에서는 독단적 부정으로 되어 있는 고대의 가르침을 이성적으로 해설한다. 믿는 것과 불신하는 것은 각각 무한히 펼쳐진 영적 현상과 물질현상에서 겨우 한 모서리를 받아들이고 있는 것에 불과한 것이다. 양쪽이 각기 자기의 견해가 바르고 또 양쪽 다같이 자신들만의 특수하고 좁은 울타리 안에서 얻어진 것뿐이라는 것을 모르고, 자신이 믿고 있는 것으로 전체를 감쌀 수 있다고 생각한다. 과학, 신학, 또 심령주의조차도 이 점에서는 타조정도의 지혜밖에 없는 것이다. 타조가 발 밑의 모래에 머리를 박고 숨어 있는 것은 어리석고 제한된 자신의 관점에서 보아 아무도 그 공간을 넘어 오지 않을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와 같은 주제에 대해 서구의 문명화한 인류에게 손은 뻗쳐서 잡을 수 있는 작품 중에 현존하고 있는 것은 앞서 말한 「헤르메스의 서」와 「헤르메스 철학의 단편」뿐임으로 현재의 비교철학의 가르침과 그러한 것들을 비교해보면 좋다. 그러한 목적으로 다른 곳에서 인용해보았자 그것은 헛수고가 된다. 일반 사람들은, 아라비아어로 번역된 칼데아의 저서나 또는 회교의 수피(Sūfí) 비전가의 작품에 관해서는 아무 것도 모르기 때문이다. 신지학 협회의 일원이었던 고(故) 안나 킹스포드 박사가 편집하고, 해설한 「아스클레피오스의 정의(Definitions of Asklepios)」는 동양의 여러 곳에 흩어져 있는 비밀의 가르침이 놀라울 정도도 일치하고 있다는 것을 비교해 보기 위해 써볼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적지 않은 문장에서 후에 기독교도의 손으로 들어갔다는 강한 인상을 주고 있지만, 그래도 지니(genii)와 신들의 특징은 거의 동양의 가르침과 같다. 그러나 다른 것에 관해서는 우리들의 가르침과는 상당히 틀린 문장도 있다. 다음에 표시한 것이 그 두 번째, 세 번째의 예이다.

 

지금까지 비밀로 되어있으며, 공개되지 않았던 주석에서 발췌.

 

(vii) 「브라흐마의 각 시대의 다음에 오는 마하 프랄라야가 지나간 후」, 마하 만반타라의 시초의 날이 새기 시작하는 새벽 어둠 속에서 시초의 존재는 의식적인 영적 특질인 것이다. 현현세계[태양계]에서, 그것은 객관적 주관성의 상태에 있고, 광휘 상태의 투시가의 눈에는, 신성한 숨에서 나오는 엷은 막과 같은 것이다. 그것은 라야에서 발생하고, 무색의 유체로 되어 무한하게 모든 곳으로 넓게 퍼져간다. 그것은 우리들의 혹성세계의 안에서는 제 7계의 일곱 번째 상태에 있는 것이다.

 

(viii) 그것(시초의 존재)은 우리들(我)의 영적 시력에서는 질료인 것이다. 깨어있는 상태에서는 그것을 질료라고 말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래서, 무지(無知)하기 때문에, 그들(사람)은 그것을 “신, 영”이라고 이름을 붙여 왔던 것이다.

 

(xix) 그것(시초의 존재)은 모든 곳에 존재해 있고, 우리들의 세계[태양계]를 만들기 위한 시초의 우파디가 된다. 우리들의 세계 바깥쪽에서는, [태양계 또는] 우주의 별들의 사이에서만이 미분화 상태의 정정함이 있으나, 이미 형성되었거나, 형성 중에 있는 세계에서는 그렇지 않다. 또 “라야” 상태의 별들은 미분화의 청정함이 가슴 안에 간직된 채 쉬고 있다. 시초의 존재의 질료는 지구상에서 알려져 있는 질료와는 다른 종류의 것들임으로, 지상에 살고 있는 자들은 그것을 바라보면서, 그것이 텅 비어 있는 공간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무한[우주]속 어디에서나, 손톱 폭 정도의 공간도 없다.

 

(xx) 이 세계를 넘어선 세계와 같이, 우리들 세계에서도 물질 즉 질료는 칠 중이다. 거기에다, 그의 일곱 상태 즉 일곱 원질의 하나, 하나에는 농밀도에 따라 7 개의 등급이 있다. 눈에 보이는 “수리야(태양)”는 눈에 보이는 것으로는 최고의 반영, 혹은 제 7 상태를 구성하는 7 등급 중에 최저의 것, 말하자면 7 등급 중 첫 번째의 것을 표시하고 있다. 그의 제 7 상태란 것은 청정한 것들 중에 가장 청정한 것이 되는 보편적 존재(Presence)의 최고상태인 것이고, 영구히 미현현의 사트(SAT)[Beness]가 시초로 현현한 숨(息)인 것이다. 중앙의 물질적인 객관적 태양은 모두가, 그의 실질의 숨(息)의 제일 원질의 최저(最低)상태인 것이다. 그러한 태양은 모두가 그의 뿌리가 되는 “근원적 태양(太陽)”(Primaries)이 시초로 현현한 숨(息)인 것이다.

근원적 태양은 디야니-초한 외에는 눈으로서는 볼 수가 없는 것이다. 디야니-초한의 체를 구성해 있는 질료는 어머니-질료의 제 7원질 중 제 5등급에 속해 있으며, 따라서 태양에 반영되어있는 질료보다는 4등급 높다. 7중의 다투(Dhātu)[인체내의 주된 실질]가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인간과 전자연계에는 7중의 힘(Forces)이 있다.

 

(xxi) 숨어 있는 (태양)의 진정한 질료는 어머니-질료의 핵인 것이다. 그것은 우리들의 태양계 우주 안에 살면서 존재하고있는 모든 것의 힘의 중심이고, 모체인 것이다. 원자에서 기능적인 의무를 실행시키는 모든 힘은, 이러한 씨앗으로부터 나와서, 그의 주기적 여로에서 확장해 가지만, 11년마다 제 7원질에서 다시 이 초점에 모여든다. 만약, 누구인가 태양을 보았다고 말하면, 태양이 정말로 매일 올라왔다 사라져가다 하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비웃음을 살 것이다.

 

(xxiii) 태양은 베다의 운율(韻律)과 같이 칠 두의 말에 이끌려가는 자들이라고 고대인들은 말했고, 또 태양은 자신의 영역 안에서의 칠 개의 가나(Gaṇa)[존재의 종류]와 같다고 말하고 있지만 동시에 가나와는 다른 것이다. 그리고 7개의 광선을 가지고 있다고도 말하고 있다. 그것은 모두가 태양에는 칠 중의 성질이 있기 때문이다.

 

(xxv)최고의 태양 안에 있는 7개의 존재는 내재되어 있는 어머니-질료의 모체 안에서 스스로 태어난다. 광선이라고 말하는 7개의 주된 힘을 보내주는 것은 이들이다. 7개의 주된 힘은 프랄라야의 시초에, 다음 번의 만반타라를 위해 새로운 태양이 되려고 모여들 것이다. 모든 태양 안에서 의식적 존재로서 나타내기 위한 에너지는 비쉬누(주36을 보라)라고 부르고 있는 절대자의 숨(息)인 것이다.

“우리들은 그것을 현현한 유일의 생명이라 말한다. 그 자체로서 그것은 절대자의 반영인 것이다.”

 

(xxvi) 절대자를 결코 언어로써 말해서는 안 된다. 그 상태를 열망하며 행하고 있는 우리들의 영적 에너지의 일 부분이라도 감소시켜버려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우리들의 영적 에너지는 그것을 향해서 언제나 영적으로 이끌려 가지고 있는 것이다. 전우주가 그 현현중심을 향해서, 우주적으로 끌려가면서 움직이고 있는 것과 꼭 같은 것이다.

 

(xxvii) 전자 즉 시초의 존재는 이런 상태에 있는 동안은 유일의 생명이라고 부를 수가 있고 앞서 설명한 것처럼 창조 또는 형성목적을 위해 엷은 모양의 형태로 되어 있다. 그것은 7개의 상태로 나타나고 그 7개의 상태 하나 하나는 칠 등급으로 구별되는 것으로 합계에서는 신성한 책에 나와 있듯이 49의 불이다.

 

(xxix) 시초의 것은 “어머니”[프리마 마태리아(prima MATERIA), 원초의 실질]인 것이다. 시초의 7개의 상태는 분화하면서, 그것이 주기적으로 내려간다. 그의 마지막의 원질이 농밀한 물질로 되어 굳어졌을 때, 어머니는 자전해서, 최후의 원질의 제 7발산(發散)에서, 제1의 최조(催租)의 원소에게 생명을 불어넣는다[자신의 꼬리(尾)를 물고 있는 뱀]. 하이어라키, 말하자면, 존재의 계제에서는, 그녀(母)의 최후의 원질의 제 7발산(發散)이란 것은 다음과 같은 것이다.

(a) 광물에서는 광물 안에 잠재하는 불꽃인 것이다. 그의 꺼지기 쉬운 존재는, 소극적인 것들을 깨어나게끔 적극적인 것들에 의해 불려 일으켜진다.

(b) 식물에는, 그것은 종자를 만들고 풀잎이나, 뿌리, 묘로 그것을 발달시키는 생명이 있는 지성적인 힘이 있다. 그것이, 삶(住)을 하고 있는 것들의 7개의 원질의 우파디가 되는 씨의 종(胚種)인 것이다. 식물은 성장해서 발달해 갈수록 7개의 원질를 사출하는 것이다.

(c) 모든 동물도 마찬가지이다. 그것은 동물의 생명 원질이고, 활력이며 본능이며, 여러 성질이고 특이성인 것이다.

 

(d) 그것은 자연계에 현현해 있는 생물에게 주어지고 있는 모든 것들을 인간에게 주어지게 하면서 더불어 인간 속에 있는 49의 불을 발달시킨다. 인간의 7 개의 원질은 각각 “위대한 어머니”의 7개의 원질의 완전한 상속자이고 참가자인 것이다. 어머니의 제 1원질의 호흡은 인간의 영[아트마]인 것이다. [우리들은 “아트마”를 잘못 알고, 제 7원질이라고 말하고 있다.―H.P.B] 어머니의 제2원질은 부디(魂)인 것이다. 제3원질은 인간의 유기체의 수용력에 따라, 인간에게 (a)물질계에서의 뇌 재료와 (b)뇌를 움직이게 하는 마인드를 공급한다. [그것이 인간 혼인 것이다.―H.P.B]

(e) 그것은 우주와 이승(世)의 엘리멘탈을 지도하는 힘(力)인 것이다. 그것은 잠재상태로부터 활동적인 상태로 자극을 받고있는 불 속에 있다. 일곱으로 분화된 모든 * * *원질은 이승의 불안에 살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불어오는 바람 안에서 선회한다. 허리케인처럼 불고, 공기를 움직인다. 바람이라 말하는 원소도 그 칠 원질 중 하나이다. 주기적으로 전진하면서 물의 움직임을 조절한다. 일정한 법칙에 따라 물결을 끌어당기기도 하고, 물리쳐 버리기도 한다. 이 일곱의 원질에 대한 법칙에 따르면 그것은 혼을 불어넣어 주는 에센스인 것이다.

 

(f) 그것의 4개의 고급본질은 우주의 신들로 되는 씨눈(胚種)이 포함되어있다. 3개의 저급 원질은 원소의 생명들[엘리멘탈]을 태어나게 한다.

(g) 우리들의 태양계에서, 유일의 존재는 하늘과 땅이고, 뿌리와 꽃이고, 행위라고 생각하고 있다. 그것은 태양 안에 있고, 또 조그만 벌레 안에도 있다. 그것이 없는 원자란 단 하나도 없다. 그래서, 고대의 현명한 성자들은 그것을 자연계에 현현해 계시는 신이라 말했다. . . .

 

이와 관련해서, 수바 로우에 의한 신비주의적 정의는 독자의 흥미를 유발시킬 것이다.

 

카냐(Kanyā)[황도대의 제6 사인(sign), 즉 처녀궁]는 처녀라는 뜻으로, 샥티(Śakti) 또는 마하-마야를 상징하고 있다. 이 사인은 . . . . 여섯 번째 라시(Rāśi), 즉 제 6궁을 나타내며 자연계에서는 6개의 힘이 있다는 것을 나타내고 있다.[일곱 번째 것으로 종합되어 있다.]

 

그러한 샥티는 다음과 같다.

(1) 파라샥티(Parāśakti): 문자 그대로 위대한 힘. 그것은 光과 열의 힘을 표시하고, 또 포함시키고 있다.

(2) 지나나샥티(Jñānaśakti): 문자 그대로 지성 즉 진정한 지혜 또는 진정한 지식의 힘. 여기에는 두 가지 면이 있다. 물질상태의 영향 아래 놓였을 때 또는 영향을 줄 때 샥티의 몇 가지의 나타냄은 다음과 같은 것이다. (a)우리의 감각을 판단해내는 마인드의 힘. (b)과거의 생각을 해내는 능력회상과 미래를 기대하는 마인드의 힘. (c)근대 심리학자가 “연상의 법칙”이라고 말하고 있는 능력. 말하자면, 감각 및 감각의 가능성의 여러 가지 무리들(그룹) 사이에서 지속적인 관계를 만들어서, 외면에 관한 개념 또는 생각을 만들어 내는 능력. (d)기억이라 말하는 신비적인 테두리에 의해 우리들의 생각을 맺어주고, 자기 즉 개성이라 말하는 개념을 생겨나게끔 하는 마인드의 힘. 물질의 테두리에서 벗어났을 때의 그 힘에 대해 몇 가지 말한다면, (1)투시력, (2)싸이코메트리라고 할 수 있다.

(3) 이츠차샥티(Ichchhāśakti): 문자 그대로 의지의 힘. 이 힘이 나타나 있는 가장 보편적인 것은 필요한 근육을 움직이게 하는 신경의 흐름이다. 이것은

(4) 크리야샥티(Kriyaśakti): 그것 자체의 고유의 에너지에 의해, 외부에서 지각이 가능한 현상적 결과를 만들어 낼 수가 있다는 생각을 불러일으키는 신비한 힘이다. 고대인의 가르침에 의하면 어떤 생각에 주의력을 깊이 집중시켜보면, 어떤 생각이든 바깥으로 나타난다고 말한다. 그와 같이, 강력한 의지력은 바램의 결과로 생긴다.

 

요기는 보통 이츠차샥티와 크리야샥티에 의하여 기적을 행한다.

 

(5) 쿤다리니-샥티(Kuṇḍalinī-śakti): 문자 그대로는 뱀처럼 굽어서 움직이는 기의 힘이다. 그것은 자연계[어디서든지 나타난다]의 보편적인 생명원리이다. 이 힘은 견인과 반발이라 말하는 두 개의 커다란 힘을 포함시키고 있다. 전기와 자기란 것은 그것이 겉으로 나타난 것에 불과한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허버트 스펜서가 생명의 원질이라고 생각했던, “외적관계에 대한 내적 관계의 연속적인 조정”의 힘이고 해탈을 성취하려면, 이 힘을 완전하게 마스터하지 않으면 안 된다.

(6) 만트리카-샥티(Māntrikā-śakti): 문자 그대로는, 문자 또는 말(언어), 음악의 힘이다. 「만트라 사스트라(Mantra Śāstra)」의 주제는 모든 현현된 곳에 있는 이 힘이다. [멜로디]의 영향은 이 샥티의 현현 중 하나이다. 이름이 지니고 있는 힘은 이 샥티의 극치이다.

근대과학은 위 (1), (2), (5)의 힘을 부분적으로 조사해 본 것에 불과하다. 나머지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밝혀지지 않았다. . . . 6개의 힘은 “아스트럴광(光)” [제 7번째의 다이비프라크리티(Daivlprakriti), 로고스의 빛]에 의해 통합된 것 속에 있다.

 

위의 문장은 같은 문제에 관해서 힌두교의 진정한 생각을 나타내기 위해 인용한 것이다. 비록 이 문제에 관해서 말할 수 있는 것들의 10분의 1정도도 나타내지 못했지만, 모두가 비교적인 것이다. 10분의 1정도 밖에 나타내지 못했다고 하는 것은, 예를 들어 6개의 명칭은 우주 대자연의 제 5원질 즉 신비적인 뜻에서의 “어머니”의 제 5원질을 인격화한 것이고, 그들의 시초의 것들, 제 7원질에 의하여 총합된 디야니-초한의 6개의 하이어라키의 명칭인 것이다. 요가의 힘을 열거하는 것만으로도 10권 정도의 책이 필요할 것이다. 이와 같은 각각의 힘의 우두머리에는 살아있는 의식적 존재가 있으며 힘은 그런 존재의 발산인 것이다.

그러나, “삼중의 위대한” 헤르메스의 말을 지금 인용한 설명과 비교해 보자

 

태양에 의한 생명의 창조는 태양의 빛(光)처럼 끊일 날이 없다. 그것을 정지하거나 제한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곳에도 없다. 태양의 둘레에는, 위성의 군대처럼 수를 헤아릴 수 없는 지니들의 성가대가 있다. 이들은 “불사인 자들” 가까이 삶을 하며, 거기에서 인류를 지켜보고 있다. 그들을 폭풍우나 불, 지진으로 변화해가면서, 신[카르마]의 의지를 이루어 낸다. 이는 불신에 대한 벌로서 기아와 전쟁에 의해서 신의 뜻을 성취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이상적인 세계는 감각의 세계를 둘러싸고, 어디서든지 다종다양한 형태로 충만하고 태양은 만물을 보호하고, 기르고 자신의 빛 속에 모두를 포용하고 모든 곳에서 살아가는 것들의 탄생과 발달을 이루어 내는 것이다. 태양의 명령아래 지니의 성가대가 여러 가지의 합창으로 노래부른다. 지니의 성가대는 다종다양해 그 수가 헤아릴 수 없는 별과 같다.

 

어떤 별이거나 모든 별에는 지니가 있다. 성질에 따라, 혹은 성질이라기 보다는 오히려 활동에 따라 선과 악으로 나누어진다. 활동이야말로 지니의 본질이다. . . . 이와 같은 지니는 이승의 일들을 맡고 있다. 그들은 나라(國家)나 개인의 조직체를 흔들어 버리거나, 뒤집어 버리기도 한다. 그들은 우리들의 혼에 자신들의 모습을 각인시킨다. 그들은 우리들의 신경이나 골수, 정맥, 동맥, 그리고 바로 우리들의 뇌의 실질 속에 존재한다. . . . 우리들 한사람 한사람이 생명과 존재를 받게되는 순간에 지니[엘리멘탈]의 책임 하에 들어간다. 그들은 우리들의 탄생을 지도하는데 아스트럴 힘[초인간적인 아스트럴 영]의 아래로 분류된다. 지니는 끊임없이 변화하기 때문에 언제나 똑같이 않으며 원을 그리면서 회전하고 있다. 혼이 사대령[엘리멘탈] 각각으로부터, 에너지의 인상을 받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사대령들은 체(體)를 통하여, 혼의 두 부분으로 침투한다. 그러나, 이성이 있는 부분에서는 지니에 따르지 않는다. 그것은 태양의 광선으로 혼을 비추어 주는 신을 받아들이기 위해서이다. 이렇게 개화된 사람들은 그 수가 적으며, 지니는 그런 사람들을 경원하는 것이다. 지니나 신들은 신의 유일 광선 앞에서는 아무런 맥도 못 추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외의 대부분의 사람들의 혼이나 체는 지니에 의하여 지도되고, 그들은 지니에 따라붙어서 지니에게 영향을 미친다. 그렇기 때문에 지니는 이 세계의 것들을 통솔하게 되는 것이고 우리들의 체를 도구로 이용하는 형태가 되는 것이다.

 

위의 인용문은 몇 개의 파벌을 제외하고는, 일세기 전까지도 모든 나라에서 공통적이었던 보편적 신념이었음을 나타내고 있다. 소수의 유물론자와 과학자를 빼고서는 이교도에게도 기독교도 사이에서도 대략적인 윤곽과 특징은 정통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헤르메스에서 말하는 지니나 신들, 기독교에서 말하는 암흑의 세력들 및 천사, 심령주의에서 말하는 “사자의 영” 또는 인도나 회교도들이 말하는 부다나 데바, 샤이탄(Shaitan)이나 진(Jinn), 그것들 모두는 똑같이 환영인 것이다. 그렇지만, 베단타 학파의 위대한 철학이론이 최근 서구의 학파에 의하여 곡해되어 있듯이 이를 잘못 이해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있는(有在) 것들은 모두 절대자로부터 발산한다. 절대자는 그의 절대성으로만이, 유일의 실재라는 것을 알 수가 있다. 그러므로 이 절대에서 나온 것으로 발생능력이 있고 원인이 되는 요소(엘리멘트)는 전혀 논쟁의 여지가 없이 환영이 분명한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순수한 형이상학적의 견지에서만 이다. 자신은 정신적으로 건전하다고 생각하며, 옆에서 보는 사람도 그러하다고 생각하고 있는 사람은, 미친 사람의 “비전”을 환영이나 환상이라고 말한다. 미친 사람의 환각은 그때 그때의 사정에 따라 그 사람에게 행복을 주기도 하고 아주 비참하게 만들기도 한다. 그러나 광인의 마음속에서 있는 아주 심각한 그림자, 즉 환영은 그에게 있어서는 당분간은 의사나 그를 지켜보는 사람이 보는 세계와 마찬가지로 생생한 실제가 아니겠는가? 이 우주에 있는 모든 것은 상대적이고 환영이다. 그러나, 어는 계에서의 경험이든 그 계에서 지각하는 존재에게는 사실적인 것이다. 순수한 형이상학적 견지에서 생각을 해보면, 그런 경험은 아무런 객관적 현실성이 없는 것이다. 그러나, 비교적 가르침에서의 싸움의 상대는 형이상학자는 아니라. 물리학자나 유물론자인 것이다. 그들은 생명력, 빛(光), 소리(音), 전기에 대해서, 심지어 객관적으로 사물을 끌어당기는 자력조차, 어떤 객관적인 것들은 없으며, 단순히 “운동의 양식”이나 “물질의 감각과 감성”으로 존재하는 것일 뿐이라고 한다.

 

근대과학자들의 견해나 학설이 신지학에 반대하고 있기 때문에, 일반적인 오컬티스트나 신지학도들도, 그와 같은 견해에 반대하는 것이라고 어떤 사람들은 잘못 생각하지만 신지학의 첫 번째 법칙은 ‘카이사르의 것은 카이사르에게 바치라’는 것이다. 따라서 신지학도는 우선, 과학의 본질적인 가치를 인식하는 것이다. 그러나 과학의 높은 수준을 뇌의 회백질에서 나온 분비물로, 자연계의 모든 이치를 “운동 양식”으로 몰아버린다면, 우리들은 그 학설에 대하여 비교(秘敎)지식의 오컬트적 입장에서가 아니라, 과학적 견지에서 철학적이고 자기 당착적인 바보 같은 것이라고 항의할 것이다.

웃음거리가 되고 있는 카발라학도들이 말하고 있는 “아스트럴 빛(光)”은 그것을 볼 수 있는 사람들에 있어서는 참으로 불가사의한 미지의 신비이다. 하지만 유물론자나 그것을 비웃는 사람들에게는 그칠 틈 없이 동요하는 파동 속으로 그 신비가 가라앉는다. 다른 많은 신비와 함께 이와 같은 비밀은 이 시대의 유물론자들은 존재해 있는 것 그대로인 것이다.

마찬가지로 중세 초기의 서구인들은, 미 대륙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고, 꿈속의 동화 같은 것이었지만, 스칸디나비아인이나 노루웨이인들은 수세기전에 아주 오랜 대지의 신세계에 실제로 정착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콜롬버스가 미 대륙의 여러 나라를 재발견함으로 해서 그 존재를 믿게끔 한 것처럼, 현재의 오컬트스트들이 주장해오고 있는, 사람들 눈으로 안 보이는 에테르의 여러 영역 안에 존재물이 있다는 놀라운 사실을 발견할 과학자가 태어날 것이다. 그렇게 되면 싫든 좋든, 과학은 그의 오래된 옛 미신을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지금까지 다른 미신을 받아드리게 되었을 때처럼, 과거의 경험으로 미루어 판단해보면, 일단 그것을 무리하게 받아들일 때는 아마 박식한 교수들은 이름만 새롭게 바꾸어 자신이 그 창시자라고 주장하게 될 것이다. 모울스코트(Moleschott)가 이전에 "(과학적) 뇌의 신경 섬유 사이의 자동적, 생리적 과정“이 “운동양식”이라는 명칭으로 바뀌어 붙어졌지만, 아카샤나 에테르의 새로운 명칭은 아마 이름을 붙이게 될 학자의 두뇌 속의 ‘운동양식에 의한 것일 것이고, 또 이름 붙이게 되기 직전에 먹은 식사에 좌우될 것이다. 새로운 물질 이상주의체계의 창립자에 의하면, 뇌를 써먹는 것은 소화와 같은 류(類)의 것이 때문이다. 이와 같은 형편없는 이론을 믿는다면, 옛 것들의 새로운 명칭은, 이름을 붙이는 자의 간장(肝)의 상태에 따라서이고, 어느 진리를 과학적인 것이라고 인정하는가 혹은 인정하지 않는가는 이름 붙이는 자의 소화의 정도에 따르는 셈일 뿐이다.

 

그러나 진리가 일반의 무지한 사람에게 있어서, 아무리 불유쾌한 것이라 할지라도, 진리를 위해 죽을 각오를 한 투사는 언제, 어느 시대에서도 늘 있었다. 그 진리가 어떤 새로운 이름으로 과학이 채택됐어도, 많은 오컬트 진리는 심령 현상이나, 또 다른 싸이킥 현상으로 취급당하는 것처럼 별도리가 없는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진리는 늘 앞에서 비난을 해온 자들에 의하여 사용된 것으로 오르내릴 것이다. 질소의 발견은 화학지식을 상당히 증진시켰다. 그러나, 그 발견자인 파라셀수스는 오늘날까지도 “엉터리 의사”라고 불려지고 있다. 「영국 문명사(History of Civilization in England)」에서 말한 H. T. 버클(Buckle)의 말에는 대단히 깊은 진리가 포함되어있다.

 

아직 알려져 있지 않은 사정[카르마적 규정-H.P.B] 때문에 자신의 인생을 단 한가지의 목적에 바치는 위대한 사상가가 때때로 나타난다. 그런 사람들은 인류의 진보를 야기해 낼 수가 있고 중요한 결과를 가져다주는 종교나 철학을 만들어 낼 수가 있다.

그러나 역사의 실마리를 풀어보면, 새로운 의견의 샘터는 한사람의 인간에게 있을는지 모르나, 그 의견을 만들어 낸 후의 결과는 널리 퍼져서 있는 사람들의 상태에 따른다는 것은 명백한 사실이다. 만약 어떤 종교와 철학이 국민의 의식에 비해서 너무나 앞선 것이라면 사람들의 마음이 그것을 받아드릴 정도로 익어갈 때까지는, 쓸모 없는 것으로 취급받으며 때를 기다려야 한다. 어느 과학에서도, 어느 종교에서도 순교자는 있었다. . . 역사의 흐름음 볼 것 같으면, 2, 3세대가 지나간 다음에는 그와 같은 진리가 당연한 사실로 받아들여지게 된다. 그로부터 좀 세월이 흐르고 또 다른 세대가 와도 그 진리는 필연적인 것으로 선언되고 가장 아둔한 사람조차 어째서 옛사람들은 그것을 부정했는지 모르겠다고 의아해한다.

현 세대 사람들의 마음은, 오컬트 진리를 받아드릴 정도는 아니다. 오컬트 진리가 어떻게 해서, 충분히 무제한으로 받아들여지게 되었나 하는 경과를 돌이켜 보게되는 것은 미래의 제6근본 인종의 시대의 진보된 사상가들에게서나 가능할 것이다.

그렇지만, 우리들 제 5근본 인종의 세대는 편견과 선입감 때문에 계속 쳇바퀴만 굴리는 일이 될 것이다. 오컬트 과학은 모든 동네에서 웃음거리로 손가락질을 당할 것이다. 그리고 유물주의와 그 외 소위 과학의 이름과 그 영광을 위해 누구나 오컬트 과학을 조소하고, 부셔 버리려고 할 것이다. 그러나 S.D의 각 권의 제3부는 과학에서의 몇 가지의 반대를 예상해서의 답(答)안에 피고와 원고의 상오적 위치을 정확히 표시해 놓고 있다.

신지학도와 오컬티스트는 지금은 귀납적(歸納的)인 과학의 깃발을 높이 들고 있는 대중(大衆)의 의견에 의하여 비난을 받고있다. 다음에서는 귀납적인 과학에서 조사를 받아야 할 차례가 된다. 그래서 과학자들의 성숙과 자연 법칙의 발견이 우리들이 주장하는 사실과 어떤 모순이 있는가 제시해야 할 것이다. 과학의 성벽은 대단히 견고해서 흔들리지 않지만, 오컬트의 나팔을 강하게 불었을 때도 그 성벽이 무너져 내리지 않는 가를 확인하는 때가 온다.

빛(光)과 전기를 앞세우고 있는 소위 여러 힘이나, 태양의 구조를 주의 깊게 조사해 보아야한다. 중력과 성운의 이론도 역시 그러하다. 에테르 및 다른 원소의 성질도 논해야할 것이다. 이와 같은 과학적인 가르침과 오컬트의 가르침을 비교하면, 지금까지 비밀이었던, 오컬트 과학의 가르침의 몇몇 것들이 드러나게 된다.

약 15년 전 필자는 카발라학도의 뒤를 이어서 비교문답의 현명한 계율을 반복하였다.

 

입을 다물라. 이것(神秘)에 관하여 말하지 못하게 하였으니. 그대의 마음을 다물라. 생각하는 것들을 이야기하지 못하게 하였으니. 그대의 마음이 그대로부터 도망친다면, 원래의 곳으로 돌아 오라. 이것은 우리들의 서약의 목적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렇게 계속된다.

 

이것은 죽음에 주어지는 비밀인 것이다.

입을 다물라. 세인들에게 그것이 밝혀지지 않도록.

뇌를 압축하라.

뇌에서 무엇인가 도망쳐서 바깥으로 떨어지지 않도록.

 

그로부터 2, 3년 후에 이시스의 한 모퉁이의 베일을 올려놓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지금, 또 하나의 더 큰 틈이 만들어져있다.

그러나 날마다 눈에 띄게 달라져 보이는 예로부터의 잘못이 지금도 여전히 전투태세를 갖추고 맹목적인 보수주의나 편견에 의해 배치되어 있다. 그리하여 그것들을 끝없이 감시하고 긴 잠에서 눈을 뜨고 승인을 얻어보고자 문을 두들기고 있는 모든 진리를 부셔버리려고 한다. 인간이 동물이 된 이후 언제나 이와 같았다. 모든 경우에서 확인되는 것과 같이 오래된 옛 진리를 밝혀보려고 하는 계시자들에게는 비록 도덕적인 죽음이 따르지만, 얼마 안 되는 가르침 만으로서도 덕을 얻은 사람들에게는 생명과 재생을 가져다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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