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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자를 애통해하는 이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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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일들은 죽은 자가 지내고 있는 삶에 대해 생각해 보게 한다. 거기에서의 생활에는 많고 큰 변화가 있지만, 적어도 지상의 생활에 비하면 거의 모든 면에서 더 행복한 편이다.

 

오래된 경전에는 다음과 같은 말이 있다. ‘바르게 살아온 인간의 혼은 신의 손안에 있으며, 어떠한 고통도 그에게 닿을 수 없다. 우둔한 자의 눈에는 그들은 죽어있는 것처럼 보이고, 그 죽음으로 인해 비탄에 빠지며, 우리에게서 떠나간 그들은 완전히 절멸되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들은 평안함 속에 있다.’

 

우리들은 케케묵은 이론으로부터 진실의 인간상에 눈을 뜨고 깨어나야 한다. 죽은 자가 있지도 않는 천국에 갑자기 뛰어드는 것은 아니며, 더욱이 지옥 같은 곳으로 떨어지는 것도 아니다. 실제로, 케케묵은 나쁜 의미에서의 지옥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자신이 창조한 것들 외에는 어디에도 지옥 같은 것은 없다.

 

여기에서 확실히 이해해야 할 것은 죽음은 인간에게 변화를 가져다 주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갑자기 위대한 성자나 천사가 되는 일도 없으며, 몇 시대에 걸쳐서 얻어지는 지혜의 모든 것을 한꺼번에 몸에 지니게 되는 경우도 없다.

 

죽어서도 죽기 전과 똑같은 감정, 똑같은 성질, 똑같은 지성을 지닌 인간이다. 단지 다른 점은 육체만 없을 뿐이다.

 

이것이 정확하게 무엇을 뜻하고 있는지를 생각해 보라. 그것은 고통과 피곤한 가능성으로부터의 완전한 자유를 뜻한다. 모든 싫은 의무에서의 자유, 즉 (아마, 그는 생애 처음으로) 자기가 가장 좋아하는 일을 할 수 있는 완전한 자유를 의미한다.

 

물질계에서 인간은 언제나 구속받고 있다. 충분한 재산을 지닌 소수의 사람을 제외하고는, 늘 재산을 얻기 위해 일을 해야 한다. 자신이나 부양 가족을 위해서 의식주를 충당하는데 필요한 돈을 끊임없이 벌어야 한다. 예술가나 음악가처럼 일을 하는 것을 낙으로 삼는 드문 경우를 제외하고, 그것은 대체로 자기가 원치 않는 노고이다.

 

영계에서 돈은 쓸모가 없다. 음식이나 주거도 더 이상 필요가 없다. 그곳의 주민들은 그곳의 영광과 아름다움을 돈이나 대가 없이도 누릴 수 있기 때문이다.

 

순화된 물질인 영체 안에서, 그는 원하는 곳이면 어디든지 갈 수 있다. 그가 아름다운 숲과 바다와 하늘을 사랑했다면 지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곳을 모두 가볼 수가 있다.

 

그가 예술을 사랑했다면 모든 위대한 작가들의 걸작을 감상하기 위해 주어진 시간을 다 써버릴 것이다. 만약 그가 음악가였다면 전 세계의 가장 위대한 오케스트라의 곡들을 모두 들으며 돌아다닐 수도 있고, 가장 뛰어난 연주가들의 연주를 들으면서 자신의 시간을 보낼 수도 있다.

 

지상에서는 그의 즐거움 혹은 취미라 말할는지도 모르지만 그것이 어떤 것이든 간에, 그는 이제야 그것에 몰두해 그것을 궁극까지 추구해 가는 완전한 자유를 가지고 있다.

 

단지 한가지 조건은 그런 즐거움은 지적인 것들 내지는 높은 정서에 관련해 있는 것들이고, 그의 만족을 위해서

육체를 가질 필요는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모든 것에 분별 있고 고결한 인간이라면 그의 사후는 전보다 무한히 행복하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단순한 즐거움만이 아니라 더욱 흥미를 느낄 수 있는 방향을 향해 진정으로 만족할 수 있는 진보를 위한 시간이 충분히 주어져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 세계에는 불행한 사람이 없는가? 있다. 왜냐하면 거기에서의 삶도 없어서는 안될 이승에서의 생애의 연속이고, 그들은 모든 점에서 육체를 벗어 던지기 전과 같은 인간이기 때문이다.

 

만약 그의 이승에서의 즐거움이 저속하고 천한 것들이었다면, 그러한 욕망을 만족시킬 수 없는 곳이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폭음을 하면서 살아왔다면 가시지 않는 목마른 갈증으로 인해 괴로움을 받을 것이다. 이 목마름을 채울 수 있는 육체를 지니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과식을 했던 사람이라면 식탁의 즐거움을 맛볼 수 없을 것이고, 수전노는 모아둔 금화를 찾아 볼 수 없을 것이다.

 

이승의 생활에서 쓸데없이 날뛰는 격정에 몸을 맡겨온 사람은 아직도 그러한 것이 자신의 마음 속에 퍼져 있는 것을 알 것이다.

 

호색가는 도저히 만족할 수 없는 욕망에 더욱 흥분할 것이다. 질투심이 강한 사나이는 아직도 그의 질투에 끌려 지쳐가고 있다. 목표로 삼아야 할 행위를 얻을 수 없어서 그것은 점점 격해진다.

 

이러한 사람이었다면 틀림없이 고통을 받는다. 그러나 그것은 단지 그러한 사람, 즉 그의 경향이나 격정이 천하고 물질적인 성질의 것들이었던 사람들뿐이다.

 

하지만 그들의 운명은 전적으로 그들 자신의 손아귀에 있다. 그들은 이러한 성향을 정복 해내기만 하면 된다. 그렇게 한다면, 그와 같은 갈증의 고통에서 바로 해방될 수 있다.

 

언제나 명심해야 할 것은 징벌 같은 것은 없다는 것이다. 단지 있다고 한다면 확실한 원인에서 나오는 당연한 결과일 뿐이다.

 

따라서 그저 그 원인을 벗겨내기만 하면 결과는 소멸하고 만다. 그것은 항상 즉시 이루어진다고 할 수는 없지만, 원인에서 이루어놓은 에너지가 사라져 흩어질 무렵이면 동시에 그렇게 된다.

 

이렇다 할 뚜렷한 악덕을 범한 적은 없으나, 소위 세속적인 삶을 보내온 많은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주로 사교계나 그 관습에 따르며 그저 즐겁게 살아보자는 생각을 가지고 살아온 사람들이다.

 

이러한 사람들은 영계에서 현실적인 고통은 없으나 때때로 지겨운 곳이라고 느낀다. 그들은 닮은 형의 사람들과 교제를 하지만, 이미 의상이나 이것저것 자랑을 겨누는 일이 없음으로 늘 조금은 단조롭게 느낀다.

 

한편, 그들이 가까이 해보고 싶어하는 훨씬 영리한 사람들은 언제나 다른 일을 하고 있음으로 가까이 하기가 힘들다.

 

그러나 이성적이고 지적인 혹은 예술적 관심이 있는 사람이면 누구나 육체에 갇혀 있을 때보다는 육체를 벗은 상태가 훨씬 더 행복하다고 느낀다.

 

이 세계에서 이성(理性)적인 관심을 개발하는 것은, 만약 그가 현명한 사람이라면 언제든지 가능한 일임을 상기해야 할 것이다. 예술적인 사람이나 이지적인 사람에게 이 새로운 생애는 너무나 행복한 곳이다.

 

이보다 더 행복해 할 사람들도 있다. 그들은 바로 같은 동포들에게 가장 큰 관심을 가졌던 이들이다. 그들은 이전에 동포들을 도와주고 원조하고 가르침으로써 가장 큰 기쁨을 얻었었다.

 

비록 그 세계에는 어떠한 가난이나 굶주림, 갈증이나 추위는 없지만, 위안을 필요로 하는 슬픔에 잠겨 있는 사람들이나 가르침을 필요로 하는 무지한 사람들이 있다.

 

마치, 서구 여러 나라에서 죽음 저편의 세계에 관한 지식을 찾아보기가 매우 힘든 것처럼, 그 세계에서도 새로운 생애에서의 가능성에 관하여 가르침을 필요로 하는 많은 사람들이 있다.

 

그래서 이 가르침을 알고 있는 사람은 희망과 환희의 소식을 거기서도 똑같이 나누어주기 위해 돌아다닐 수가 있다.

 

그러나 ‘거기’ 혹은 ‘여기’라는 말은 우리들이 모르기 때문에 사용하는 말에 불과하다. 왜냐하면 그 세계는 언제나 여기 우리들의 둘레에 가까이 있기 때문이다. 결코 멀리 떨어져서 손이 미치지 못할 것 같은 세계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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