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면 이러한 명제를 하나하나 생각해보자. 이 주제를 명확하게 하기 위해서는 인간의 구성에 대하여 그것을 특별히 연구한 적이 없는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것보다 좀 더 깊이 이야기하지 않으면 안 된다.
당신은 막연하기는 하지만 인간에게는 혼(魂)이라 불리는 불사의 무엇인가가 있고, 그것은 육체가 죽어도 살아남는다는 것을 들어왔다.
나는 당신이 그러한 막연함을 떨쳐버리고, 설령 그것이 바른 것이라 할 지라도 그 사실들을 과소평가 해오고 있었다는 것을 이해하길 바란다.
‘나에게 혼이 있기를 바란다’라고 말하지 않고, ‘나는 혼이다'라고 말해야 한다. 그것이 진정한 진리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혼이고 몸체를 지니고 있다. 몸체는 인간이 아니며, 단지 인간의 옷에 불과하다.
당신이 죽음이라고 부르고 있는 것은 낡아버린 옷을 벗어버리는 것이다. 외투를 벗는 것이 당신의 마지막이 아닌 것과 마찬가지로 죽음이 인간의 최후를 뜻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당신은 친구를 잃어버린 것이 아니다. 당신이 그를 만났을 때 늘 보아오던 외투가 보이지 않게 된 것에 불과하다. 외투는 없어졌다. 그러나 그것을 입고 있던 사람은 없어지지 않았다. 당연히 당신이 사랑하던 대상은 그 사람이지 그의 옷은 아닐 것이다.
친구의 죽음 이후의 상태를 이해하기 이전에 먼저 당신 자신의 상태를 알고 있어야 한다. 당신은 본질에 있어서는 성스러운 존재이며, 신의 광염(光炎)으로부터 파생되어 나온 불사의 존재라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당신은 육체라고 부르는 이 옷을 입기 전에도 몇 생애를 살아왔고, 몸체가 흙으로 돌아간 뒤에도 몇 생애동안이나 살아간다는 것을 이해해야만 한다.
‘신은 영원을 닮은 자신의 모습으로 인간을 창조했다’고 한다. 이것은 추측도 아니며 경건한 신앙도 아니다. 그것은 증명할 수 있는 확실한 과학적인 사실이다. 이에 대한 것을 읽고자 노력한다면 이 주제에 대한 문헌에서 찾아볼 수 있다(이 소책자의 끝에 책의 목록들을 실어 놓았다).
혼의 측면에서 볼 때, 당신의 생애는 단지 하루일 뿐이며, 이것은 이미 죽어버린 당신의 사랑하는 사람도 마찬가지이다.
따라서 그는 죽은 것이 아니다. 단지 그의 몸체를 벗어버린 것에 불과하다. 그렇다고 해서 그를 단순한 육체가 없는 숨결(어쨌든 전보다는 그 사람 같지 않은)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성 바울은 오랜 전에 ‘자연적인 몸과 영적인 몸이 있다’라고 말했다. 사람들은 이 말을 오해하고 있다. 그들은 이러한 몸들을 연속적인 것이라고 생각하며, 지금 현재에도 양쪽의 몸 모두를 지니고 있는 것을 깨닫지 못하고 있다.
지금 이것을 읽고 있는 당신도 눈에 볼 수가 있는 ‘자연적인’, 즉 육의 몸과 성 바울이 ‘영적’이라고 말한 또 하나의 보이지 않는 내부의 몸, 둘을 가지고 있다. 육체를 벗어 던진 후에도 이 또 하나의 섬세한 매체인 영체를 계속 입고 있는 상태이다. 만약 육체를 외투로 상징한다면 이 ‘영체’는 외투 속에 있는 평상복으로 생각할 수 있다.
지금까지의 설명이 당신에게 명확하게 와 닿았다면, 다음 단계로 나가보자. 농밀한 물질로 되어 있는 외투(육체)를 벗어 던지는 것은 죽음이 닥쳐왔을 때만은 아니다. 매일밤 잠을 잘 때 당신은 잠시동안 육체에서 빠져 나와 영체로서 세계를 돌아다닌다.
그때만은 농밀한 세계에 관한 한 불가시(不可視)한 것이지만, 당신과 동시에 영체를 사용하고 있는 친구들에겐 당신이 확실히 보이고 있다. 왜냐하면 각각의 체(體)는 그것 자체의 수준에 있는 것들만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당신이 되돌아와서 다시 외투를 입었을 때, 다시 말해 당신이 농밀한 체로 돌아와서 물질계의 저급세계에서 눈을 뜰 때, 높은 계에서 본 것에 관해 어느 정도는 기억하고 있는 경우가 있다.
대부분 왜곡된 것이기는 하지만 당신은 그것을 뚜렷한 꿈이라 말한다. 그러므로 수면은 일시적인 죽음의 일종이라고 말할 수 있다. 단지 차이점은 다시는 입을 수 없는 외투에서 완전히 철수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따라서 당신이 잠을 자고 있을 때에는 당신이 사랑하던 사람이 거쳤던 똑같은 상태로 들어가게 된다. 그렇다면 그 상태는 과연 어떠한 것인가? 지금부터 그것을 설명해 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