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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지학 입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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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지학의 가르침에서 제시되어있는 놀라울 정도로 많은 새로운 진리에 대하여 공부하는 사람이 가져야할 마음가짐이란 어떠한 것인가?


그 하나는 지적이며 수용적인 마음가짐이다. ‘대략 그러한 것이구나’하는 식의 비판적인 것이거나 맹목적인 신앙이 아닌, 제시되어 있는 그 가르침 특유의 사실을 이해하여 자기 것으로 소화하려고 노력하는 마음가짐이 갖추어져 있어야 한다.


신지학은 맹목적인 신앙 태도를 경멸한다. 왜냐하면 그러한 행위가 수많은 악덕을 세상에 생산해냈기 때문이다.


오컬트의 길에서 진보를 기대하기 이전에 먼저 미신적인 태도를 버려야 한다. 그 다음에는 의혹적인 태도가 없어져야 한다. 의혹적인 태도를 없앨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맹목적인 신앙에 의해서가 아니라 지식을 획득하는 것이다.


기독교를 맹신하던 자가 똑같은 방식으로 신지학의 교사를 맹신하게 된다면 그것은 아무런 가치도 없다. 
성 바울과 요한 그리고 신지학의 블라바츠키와 베산트 여사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말한 것을 가지고 비교하는 것은 어떠한 의미도 없을 뿐 아니라, 어떠한 진보도 없다.’

 

서구의 기독교가 완전한 체계를 가지고 있지 못한 것은 불행스러운 일이다. 이것은 역사가 대변해 주고 있다. 서구인들에게 제시되어있는 기독교의 가르침은 원형에서 조각난 반쪽에 불과하다.


그노시스파의 현자들이 추방되기 전에 기독교는 다른 여러 종교의 철학 체계와 같이 하나의 철학체계를 가지고 있었다. 그들이 추방된 후 불완전한 신앙이 되고만 것이다. 도덕적 가르침은 아직 남아 있어 다른 종교의 도덕과 같음을 알 수 있다.


신지학에서는 어떠한 종교를 갖고 있는가는 문제로 삼지 않는다. 단지 무엇을 행하고 있는가를 큰 문제로 삼는다. 그 사람이 친절한가, 기품이 있는가, 공평하며 유순한가, 청렴한가, 성실한가 등을 중요시한다.


서구의 독자에게는 이러한 점에 있어 기독교의 가르침이 신지학의 가르침과 같은 것이라는 것을 상기한다면 흥미가 더 할 것이다.


마태복음 25장에 예수 자신에 의하여 주어진 뚜렷한 예가 있다. 그것은 소위 최후의 심판에 그들의 운명이 정하여 진다고 되어있는 기독교의 사상에 따르면 심판관은 예수 자신이며 따라서 심판과정에 실수는 있을 수 없는 일일 것이다.


그곳에 출두한 자의 운명이 걸려있는 질문은 어떤 것이 되겠는가? 현대 기독교의 교의에 따르면 첫 번째 질문은 ‘너는 나를 믿는가?’일 것이고, 두 번째 질문은 ‘너는 빠짐없이 교회에 나갔는가?’라는 질문이 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예수는 이 두 가지 질문의 어느 것도 하지 않으며 다음과 같이 말한다.

‘너희는 배고픈 이에게 먹을 것을, 목마른 자에게 물을 주었는가? 옷이 없는 사람에게 옷을 입혀주고 병든 사람, 옥에 갇힌 사람들을 돌보아 주었는가?’


이 말은 결국 당신은 동포들에게 평범한 친절을 늘 베풀고 있는가 하는 것이다. 심판관인 예수 자신의 설교에 의하면 어떠한 불신자라 할지라도 이러한 행위를 행한다면 영원한 지복(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는 말이 될 것이다.


이러한 도덕은 모든 종교의 가르침에 있는 것과 같다. 정말로 선량한 기독교 신자의 일상 생활은 선량한 불교신자나 힌두교신자의 생활과 같아야 한다는 것을 우리는 알 수 있다.


혹자는 그들의 종교에 의해 기도라고 하기도 하고 명상이라고 말하기도 하지만, 그것이 이루어지는 본질의 길에 있어서는 다른 점이 없다. 각각은 똑같은 도덕의 실천을 권하고 똑같은 악덕을 못하게 하고 있는 것이다.

어느 종교를 믿느냐를 중대한 문제로 삼는 터무니없는 생각은 이제 버려야 한다. 사람들이 믿고 있는 종교는 자신이 태어난 지역에 따라 종교의 선택이 달라진다.


가령, 어떤 이는 기독교 신자이기 때문에 자신의 종교 외에는 눈을 돌리려 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가 인도인의 집안에서 태어났다면 힌두교 신자가 되었을 것이고, 태국이나 스리랑카에서 태어났다면 불교신자가 되었을 것이다. 궁극적 성취를 달성하기 위해 어떤 특정 종교를 믿어야 한다는 편견은 이제 모두 버려야만 한다.


신지학의 학습을 진전시키기 위해서는 아주 새로운 태도를 취하여야할 필요가 있다. 마음의 문을 열고 종교를 마치 과학을 다루는 것과 같은 양식으로 취급하는 것을 배워야한다.


우리는 타당하지 않다고 생각되는 것은 받아드리지 않으며, 우리가 생각하고 있는 사실과 전혀 맞지 않는 원리에 대하여 논증을 얻으려고 하지 않는다.


심리학적인 문제나 이론은 수학적 추리에 따라 논증하거나 구상적 물리계에서 증명해 낸다는 것은 때때로 불가능하다.


어떠한 명제의 증명도 그 명제의 성질에 의한 것이라야 한다. 그러므로 몇 가지 심원한 신지학의 가르침에 대한 증명을 하려한다면 계명(啓明)된 혼의 경험에서 구해야만 한다.


어떤 한가지 문제를 확실히 알아 낼 수 있는가하는 것은 우선 타당한 하나의 가설을 정하여 놓고, 이것을 경험으로서 어느 정도까지 입증할 수 있는가하는 점을 검토해 보아야한다. 모든 문제는 양식 있는 행위를 취함으로서 해결할 수가 있는 것이다.


신지학의 가르침의 대부분은 스스로 확신할 수 있는 능력이 생길 때까지 하나의 가설로서 다루도록 한다. 이것은 쉽게 실제적인 확신을 얻을 수 있도록 하는 방법이다.


하나의 가설을 다른 모든 가설들과 맞추어보고, 그 가설이 어떻게 인생에서 관찰되고 있는 여러 가지 현상을 완전하게 설명할 것인지를 알게 된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과학적인 사실이라고 하는 것과 같이 신지학도 그러한 기반 위에 서 있는 것이다.


일상 생활 안에서 가지고 있는 어떤 신조가 정말 직접적인 자기 자신의 지식에 근거를 두고 있는지 주의 깊게 생각해보는 것은 학습자에게는 매우 중요한 훈련이다.


가령, 지구의 자전을 믿고 있다고 생각해보자. 매일의 경험에서 우리는 정반대의 일이 실증되고 있다. 서있는 지면은 움직이지 않는 것처럼 느껴진다.


하지만 지구가 자전한다는 증거는 존재한다. 실제 천문 연구소에 가서 직접 실험해 본다면 알게 될 것이다. 그러나 직접 경험해 보지 않았다면 알 수 없었을 것이다.


단지 그렇게 믿고 있을 따름이다. 이 믿는다는 것이 정확한 증거에 근거한 것이기는 하나 자신의 감각에 의한 증거는 아니기 때문이다.


증명의 작업이라는 것을 행하려면 적당한 가설이 필요하다. 여기에는 자신의 상상력도 관여한다. 어떠한 일에 대해 그것이 성취된 것을 상상할 수 있을 정도로 발달되어야 한다.


다시 말하면, 어떠한 것이 사실이라는 것을 증명하기 이전에 사고의 순화를 이루어 작업의 원리를 끌어낼 수 있어야 비로소 그것이 가능해진다는 것이다.


신지학은 공부하는 자에게 이성(理性)에 호소하는 몇 가지 가설을 요구하지만, 동시에 일정단계를 거치면 그것이 옳은 것이라는 실증이 가능하다는 것을 약속한다.


신지학은 이미 공부한 사람들이 그것을 실증해 냈으며 그러한 가설이 바른 것이라는 것을 알아낼 수 있는 능력을 발달시켰다. 이것은 누구나 그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알려주는 것이다. 하지만 이것이 쉽게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신지학에 관한 문헌은 상당히 많이 있다. 이것은 거의가 영감에 의한 것으로 성전(聖傳)과는 다르다. 이 주제에 관해 다양한 부분으로 나뉘어 저술된 것은 우리에게 탐구한 결과를 제시하여, 우리의 지식이 미치는 한 세밀한 영역까지 정확하도록 주의를 기울인 것이다.

 

그렇지만 저술의 목적은 신성한 성전을 만들고자 한 것이 아니라 과학적 길잡이가 되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동양에 쓰여진 많은 서적들이 이러한 내용을 담고 있다.

 

물론 이러한 저술의 원본은 현대의 과학적 견지에서 다루어진 것은 아니다. 동양의 교사들에 의해 처음 주어진 이러한 지식을 실증하기 위한 계획은 화학이나 천문학과 같이 과학의 초기에 쓰인 것과 같다.


즉, 조사할 수 있는 여러 현상의 입증된 관찰과 거기서 얻어낸 것을 정리하여 지배적인 일반법칙의 추론을 시도하는 것이다.


여기에 있어서 신지학도는 신생과학의 초기의 연구자와 똑같은 입장에 있다. 우리들은 동양의 교사들로부터 받은 지식에 의하여 이 과학(신지학)의 뚜렷한 윤곽을 잡고 있다.


그러나 우리들 자신의 탐구는 끊임없이 지식을 더욱 보완하고 있으며 신지학 발전 초기의 불완전하거나 미숙한 일반화를 수정해 나가고 있다.


이러한 지식의 탐구를 시도하는 사람의 수가 불어나면서 그 양과 정확성도 증가하고 있으며, 우리에게 주어진 커다란 윤곽은 언제까지고 변치 않을 것이다.

 

신지학에 대해 우리가 가져야할 태도는 다음과 같다.

 

1) 교회의 권위에 맹목적으로 따르는 것처럼 신지학의 특정한 교사에 대해서도 맹목적인 신앙으로 바뀌어서는 안 된다.


2) 편견을 버리고 지성적으로 마음을 열어두어야 한다.


3) 주어진 진리를 가설로서 받아들이고 자신의 힘으로 그것을 증명하도록 노력해야한다.


4) 이러한 증명된 가르침은 ‘그’의 우주에 대한 로고스의 계획을 제시하는 것임으로, 그 계획의 법칙을 배워 그것에 반하지 않도록 하고 그것에 기초를 두어 노력해야한다


5) 진보나 향상을 바라는 것은 자기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얻어낸 지식을 인류의 복지를 위해서 쓰고 인류의 봉사자로서 활동하기 위해서다.


6) 인생에 대해 바라보는 지금까지의 시각은 완전히 변화해야한다. 이 세상을 슬프고 고통스럽게 생각하는 절망적인 태도를 물리치고 희망에 찬 태도를 취해야 한다. 신지학의 가르침은 모든 것이 결국 더 나아진다는 확신을 가르치기 때문이다.

 

신지학은 인간과 우주의 생성, 그리고 그의 과거와 미래에 대해 방대한 양의 새로운 진리를 제시해 준다. 우리는 이러한 방대한 진리를 무엇부터 어떻게 접해야 할까?


나는 이것을 세 가지 부분으로 나누어 보았다.

첫째는 도덕적 가르침과 그 근거,

둘째는 인간의 탄생과 여러 계에 대한 설명,

셋째는 혹성 연쇄와 인류초기 종족에 관한 방대한 지식이다.


첫 번째의 가르침은 인간의 일상생활에서 반드시 필요한 것이다. 그것은 조금만 배워도 바로 응용할 수가 있기 때문에 매우 귀중한 자산을 얻은 것과 같다. 이 지식은 물질계뿐만 아니라 이후의 삶에도 지대한 영향을 준다.


두 번째의 가르침은 인간과 인간이 살고있는 세계의 모습을 설명한다. 이것은 첫 번째의 가르침에서 권유하는 많은 소행을 어떻게 행할 것인지 가르쳐 주고 이 지식을 가지고 있지 못하는 여러 사람에게 줄 수 있는 많은 도움을 제시한다.


세 번째의 가르침은 대단히 흥미 있는 것이나 직접적으로는 실제적이지 못하다. 그러나 나름대로의 가치가 있다. 많은 경우에 있어 과거에 의하여 미래를 예시할 수 있고, 도움이 되는 여러 교훈이 과거 속에서 배울 수 있었다는 것을 이해한다면, 이 가르침이 얼마나 가치가 있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신지학의 도덕적 가르침은 모든 위대한 종교의 가르침과 같다. 여기에서 우리가 새로이 배워야 할 것은 없다. 하지만 대부분의 종교에서 제시하지 못하는 과학적 근거를 신지학은 제시하고 있다.


도덕적 가르침의 근거에 대한 고찰은 신지학의 교의에서 커다란 부분을 차지한다. 왜냐하면 모든 훌륭한 행위의 궁극적인 근거는 신의 계획, 즉 로고스의 의지와 조화시키는데 있기 때문이다.


어떤 행위가 그것과 조화하는 것이냐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가능한 신의 계획에 대해 더 이해하려는 노력이 있어야 한다.


이 가르침에는 신의 본성과 활동 그리고 신의 인간에 대한 고찰이 들어있다. 태양계의 로고스에 대한 최초의 입자와 여러 계 그리고 자연에 관하여, 인간의 형성과정과 진화, 그리고 진화 수단과 진화를 촉진시키는 방법 등에 관한 내용이 이 가르침에 들어 있다.

 

두 번째의 가르침은 인간의 여러 가지 매체나 자연의 여러 계에 대한 관계를 자세히 다룬다. 우리는 매체를 보다 잘 운용하기 위해서 우리 자신을 이해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 고찰은 우리에게 매우 실제적인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모르고 있는 사실이지만 인간은 여러 계에 걸쳐서 살고 있다. 우리는 에고로부터의 메시지를 육체의 뇌에 전하고, 또 역으로 뇌에서 여러 외적 자극으로부터 얻은 것을 에고로 돌려보낸다. 이 에고와 육체 사이에 있는 중간 매체가 아스트럴체와 멘탈체이다.


이러한 인간의 여러 가지 매체를 이해하지 못한다면 그것을 가치 있고 효과적으로 사용하고 응용할 수 없을 뿐 아니라, 그것에서 오는 모든 덕을 얻어 낼 수가 없다.


이러한 인간의 매체를 언제나 사용하고 있다는 사실 외에도 우리는 생애의 3분의 1을 잠을 자는 것을 통해 아스트럴체 안에서 보내고 있다.


육체가 죽으면 우리는 보다 더 정묘한 체를 통한 긴 생애로 들어간다. 그때에 그러한 체에 대해 알고 있는 만큼 그곳에서의 생활에 더욱 잘 적응할 수 있을 것이다.


고급의 매체도 육체와 같은 힘과 재능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사실을 이해한다면 우리는 그러한 힘을 모두 자신의 향상을 위해서 또 여러 사람을 도와주는데 쓸 수 있다. 그러므로 이것에 대한 공부는 매우 실제적인 것이다.

세 번째 가르침은 인간의 과거의 진화에 관한 것이다. 우리 지구가 속해 있는 혹성의 연쇄나 태양계 안에서의 다른 연쇄와의 관계 그리고 이러한 연쇄에서 흐르고 있는 연속적인 생명흐름에 관하여 말하고 있다.


또한 근본인종과 그의 아인종으로 세분되는 것을 감독하는 위대한 신의 역할에 대해서도 말하고 있다. 여기에 더하여 사람들 사이의 삶이 왜 여러 갈래의 차이가 생겨나는 것인지에 대해서도 설명한다.

 

모든 종교는 신도들에게 어떻게 이 세계와 인간이 생겨났는지를 가르치는 것을 대단히 중요하게 생각한다. 유태교 성전의 창세기 1장에는 놀라운 것들이 쓰여있고 이것은 불행하게도 그대로 크리스트 교회에 의해 채용되었다.


다른 종교들도 나름대로의 여러 가지 이야기가 있다. 야만인의 종교조차 그러하다. 종교의 창시자들은 그러한 지식이 인간에게 아주 중요한 것임을 인식했던 것이 틀림없다. 블라바츠키 여사도 「비경(The Secret Doctrine)」에서 인간과 태양계의 기원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들이 살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다음에는 우리들의 가능성을 깨달아야 한다. 그렇다면 과거의 역사를 배우는 것이 얼마나 유익한가를 알 수 있을 것이다.


첫 번째의 가르침을 철저하게 따른다면 두 번째, 세 번째 가르침에 대하여 확신을 얻을 수 있다.(만약 누구든지 ‘그’의 의지를 수행한다면 가르침을 깨달을 수가 있다)


이러한 신지학의 가르침이 바른 것으로서 스스로가 납득할 수 있는 최선의 길은 먼저 그것들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그것들을 진리로 삼아 살아가는 것이다. 그렇게 행한다면 증명은 머지않아 얻어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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