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지학의 진리를 이해함으로서 얻게 되는 중요한 결과 중에서 가장 실질적인 것은 필연적으로 죽음을 대하는 태도가 완전히 달라진다는 것이다.
죽음에 관한 단순한 무지와 미신으로 인하여 인류 전체가 불필요하게 겪어온 비애와 공포 및 불행은 그 양을 측량할 수 없을 정도이다.
우리들 사이에 번져있는 죽음에 대한 그릇되고 우매한 신앙은 지난 날 헤아릴 수 없이 많은 해악을 끼쳤고 지금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므로 그러한 신앙을 불식하는 것은 인류에게 크나큰 이로움을 선사하는 것이다.
과거의 생애 동안 철학적인 문제를 추구해오고 현재 신지학의 가르침을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들이라면 지체 없이 그와 같은 이로움을 얻게 될 것이다.
이러한 가르침으로 인해 사람들은 죽음으로 인한 공포와 비애에서 벗어날 수 있다. 왜냐하면 가르침을 통해 진화의 계획에서 죽음이 차지하는 진정한 위치를 바로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죽음을 삶의 종말, 공포스럽고 어두운 미지의 세계로 향하는 입구로 생각한다. 하지만 죽음의 공포에 대해서 긍정적으로 생각하지 않는다면 죽음에 대해 잘못된 관념을 가지고 있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왜냐하면 전 세계의 모든 종교적인 가르침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개념은 서양전체에서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으며, 이러한 개념 때문에 소름끼치는 공포가 수없이 많이 나타나서 거의 풍속으로 자리를 잡을 정도가 되었고, 분별을 가질만한 사람들조차 비판 없이 답습해왔기 때문이다.
무시무시한 느낌을 주며 불길함을 나타내는 모든 장치들(장례식 참례자, 깃털, 검은 벨벳과 비단 양복, 검은 테를 친 부고 용지 등)은 단지 이러한 것을 차용하는 사람들의 무지 이외에 아무 것도 나타내지 못한다는 것을 인식해야 한다.
죽음을 이해하기 시작하며 그러한 허구를 유치하고 어리석은 놀이로 간주할 수 있는 사람들은 친구의 죽음을 슬퍼하며 명복을 비는 사람들의 비통함은 친구와의 이별을 슬퍼하기 때문이며, 그것은 단지 이기심에서 온 것임을 깨닫게 된다.
일시적인 이별의 쓰라림은 피할 수 없겠지만, 자신의 고통이 타계한 친구에게 방해가 된다는 것을 받아들인다면 그러한 이별의 고통을 피할 수 있게 된다.
그는 자신에게 혹은 사랑하는 사람에게 다가오는 죽음을 두려워하거나 슬퍼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안다. 죽음은 이전에 모든 사람에게 여러 번 찾아왔었기 때문에 전혀 새로울 것이 없다. 그렇기 때문에 죽음을 무시무시한 공포의 왕으로 표현하기보다는 우리들을 영광스럽고 고차원적인 삶으로 인도하는 황금의 열쇠를 품고있는 천사라고 생각하는 것이 더 올바르고 합리적인 것이다.
그는 죽음 이 후에도 삶이 계속되고 있으며, 육체의 상실은 한 가지 의복을 벗어 던지는 것에 불과하기 때문에 의복을 걸치고 있던 사람은 아무 것도 변한 것이 없다는 것을 명확하게 인식하고 있다.
그는 죽음이란 단순히 반 이상 물질계에 치우친 생활에서 전적으로 아스트럴적인 세계, 즉 훨씬 상위의 세계로 발전하는 것임을 이해한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에게 죽음이 찾아오면 즐거운 마음으로 받아들인다.
또한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죽음이 찾아오면 비록 일시적으로는 헤어짐에 대해 커다란 슬픔을 느낄 수밖에 없겠지만, 죽는 당사자에게 있어서는 오히려 커다란 이로움이라는 것을 이해하며, 그러한 이별조차 외견상의 것이지 진정한 이별이 아님을 안다.
그는 잠을 자면서 일시적으로 육체의 옷을 벗어 던지면 소위 죽었다고 하는 자들이 여전히 우리 곁에 존재하며 그들 곁으로 가서 예전처럼 의사소통을 할 수 있다는 것을 안다.
그는 이 세계가 하나이며 신성한 법칙은 물질적인 눈으로 보이는 세계와 보이지 않는 세계 모두에 똑같이 적용되고 있다는 것을 명확하게 깨닫는다.
어떤 세계의 한 부분에서 다른 부분으로 넘어간다고 해서 불안해하거나 이상하게 여기지 않으며, 또한 베일 너머에서 발견될 어떤 것에 대해서 의심하지도 않는다.
신지학 탐구자들의 저작을 통하여 그는 보이지 않는 세계의 전체를 명료하고 충분히 도식화하여 이 물질계의 생활처럼 속속들이 알고 있으며, 자신의 진화에 적절한 시기가 도래하면 주저함 없이 언제라도 그곳으로 들어설 준비를 하고 있다.
고차원적인 생활에 대한 다양한 단계에 대해서 상세한 내용을 알고 싶다면 그러한 문제를 집중적으로 다룬 서적들을 참조하기 바란다.
여기서는 인간이 죽어 가는 상황이란 자신이 스스로를 위해서 만들어놓은 정확한 조건이라고 말하고 넘어가는 것으로 만족하고자 한다.
지상에서 생활하는 동안 살아있는 실체로서 각자가 길러온 생각과 욕망은 에너지가 소진될 때까지 에너지를 주입한 사람의 주위를 떠돌며 작용을 가한다.
그와 같은 생각과 욕망이 몹시 완고하고 사악한 성격의 것이었다면 그로 인해 발생한 상념들은 그야말로 소름끼치도록 무서울 것이다. 그러나 다행히 아스트럴 세계의 거주자 중에서 그러한 경우는 극소수에 해당한다.
최악의 경우 보통의 사람이 자신을 위해 만들어낸 세계는 죽고 나면 쓸모 없이 되어 완전히 힘을 상실해버리고 모든 이성(理性)적인 관심은 전적으로 사라진다. 이것은 이 지상에서의 방종한 생활과 하찮은 것에의 집착 그리고 남에 대한 험담으로 보낸 생에 대한 자연스러운 귀결이다.
이러한 권태로운 생활에는 특정한 조건에서의 고통이 추가될 수 있다. 만일, 어떤 사람이 지상에서 생활할 때, 격렬한 육체적 욕망에 지배당했다면(예를 들어 식욕이나 성욕, 또는 폭음을 일삼는 경우), 사후 연옥의 고통을 많이 축적한 것이 된다. 왜냐하면 물질 육체를 잃더라도 그러한 욕망과 열정까지 잃지는 않기 때문이다.
그러한 욕망과 열정은 살아 있을 때와 마찬가지로 생생하다. 아니, 오히려 행위로 이행되어야 하는 조잡한 물질의 무거운 분자가 없어지면 욕망과 열정은 더 활발하게 움직인다. 사실, 그가 잃어버린 것은 이러한 욕망과 열정을 만족시킬 수 있는 힘이다.
그리하여 그것은 충족되지 않으며 충족될 수 없는 고통으로 남게 된다. 시간이 흘러감에 따라 이러한 욕망은 에너지를 소비하고 스스로 소진해 버리기 때문에 영원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이런 고통을 겪게 되면 지옥에 있다고 느낄 것이다.
이것은 정말로 무서운 운명이다. 그러나 여기에 명심해두어야 할 것이 두 가지 있다.
첫째, 그러한 운명은 자신이 자초했을 뿐만 아니라 그 강도와 지속되는 기간도 자신이 정한 것이라는 점이다. 지상에서 생활을 하는 동안 그러한 욕망이 어떤 강도에 이르도록 두었고 이제는 자신이 키워놓은 욕망과 정면으로 마주쳤다. 욕망을 제어해야만 하는 상황에 놓인 것이다.
만약 육체를 가지고 있었을 때, 그러한 욕망을 억제하고자 하는 노력을 했더라면 극복하기는 그만큼 쉬웠을 것이다. 다시 말해, 자신이 대항해서 싸워야할 괴물(자신의 욕망)을 스스로 만들어놓은 셈이다. 그렇기 때문에 괴물이 아무리 강하더라도 그 힘은 자신이 부여한 것이다. 그러므로 운명은 외부에서 주어진 것이 아니라 스스로 만든 것이다.
둘째, 그렇기 때문에 고통을 겪는 것은 그 고통에서 벗어나는 유일한 방법이다. 만일 이와 같은 고통을 피하거나 혹은 이러한 하급 욕망을 서서히 제거하지 않고 아스트럴 세계에 들어간다면 결과는 어떻게 될까?
의심의 여지없이 이러한 욕망에 지배당한 채 또 다른 육체로 들어가 생을 시작하게 되어 주정뱅이나 호색가 또는 수전노로 태어날 것이다.
오랜 시간이 지난 후 그러한 욕망은 조절해야하는 것이라는 것을 그 사람에게 가르칠 수가 있게 되었을 때는 이미 조절이 불가능할 정도로 강해져 그 사람의 몸과 영혼 모든 것을 완전히 장악한 후가 될 것이다. 또 다른 삶은 이미 내던져진 상태고 다른 기회는 잃어버린 후가 된다. 그렇게 되면 출구도 없는 악순환으로 들어서게 되고 진화는 상당히 지연된다.
신의 계획에는 모자람이 없다. 아스트럴 삶을 살면서 열정을 다 소진시키고 나면 다시 물질적 존재 상태로 돌아간다. 물론, 열정에 의해 탐닉될 수 있는 여지는 늘 도사리고 있다. 이 새로운 삶을 위해 자기 스스로 이전의 아스트럴 삶에서 그와 같은 열정을 이미 표현했었기 때문에 그것을 다시 답습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자아, 즉 진정한 인간은 가혹한 교훈을 얻었다. 그러므로 자신의 낮은 측면이 현현되어 열정에 사로잡힌 나머지 또 다시 추락하고 마는 예전의 실수를 반복하지 않도록 온갖 노력을 기울인다.
물론 내부에 씨앗을 품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올바르고 현명한 부모를 얻어 선한 측면을 개발하고 악한 측면을 억제해서 씨앗이 발화하지 않도록 퇴화시킨다면, 다음의 생에서는 악의 기미가 보이지 않게 될 것이다. 이렇게 서서히 인간은 악을 제어하고 정복하며 그 자리에 선을 대신한다.
반면, 지성을 겸비하고 남에게 이로움을 주며 이러한 비물질적인 존재 상태를 이해하여 자신을 그와 같은 상태에 적응시키기 위해서 곤란을 감수한 사람들은 새로운 지식을 습득하고 유용한 사명을 수행하기 위한 넓고 광활한 기회로 향하는 문을 발견할 것이다.
그러한 사람들은 우리가 입고 있는 조잡한 체를 벗어 던진 삶이야말로 생동감에 넘치고 활발하다는 것을 알게 되며, 그러한 삶의 즐거움은 세속적인 지상의 즐거움에 비한다면 햇빛의 밝기에 대응하는 달빛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명확한 지식과 고요한 확신을 통해 얻은 끝없는 삶의 힘은 주변에 있는 모든 것들을 밝게 비춘다. 비록 주위에 있는 수백 명의 사람들은 눈치채지 못하지만, 그러한 사람은 평화와 기쁨의 중심이 되며 불과 몇 년의 아스트럴 존재로서도 물질계의 생활을 통해서 이룩한 것보다 훨씬 더 많은 선을 구현할 수 있다.
이들은 자신 앞에 또 다른 세계가 놓여 있다는 것과 이처럼 아름다운 상위의 삶이 보다 광활한 세계에서 계속된다는 것을 인식한다.
욕망과 낮은 차원의 상념들로 인해 아스트럴 삶이 좌우되는 것처럼, 고상한 상념과 고귀한 열망은 천상의 세계를 제공한다.
천국은 꿈이 아니라 살아있는 영광의 실체이다. 또한 별들 너머 먼 곳에 있는 진주의 문과 황금 길로 치장된 어떤 도시가 아니라 남을 배려하는 사람들이 장차 거주하게 되는 곳으로, 이 지상에서 일상적인 생활을 영위할 때 누구나 거쳐갔던 특정한 의식 상태를 말한다.
그렇기 때문에 천국이란, 말로 표현될 수는 없지만 영원토록 존재하는 어떤 장소가 아니라 수 백년 동안 지속되어온 축복의 상태라는 관점(비록 여기에 천국을 설명하는 가장 지고하고 영적인 모든 개념의 기초가 포함되어 있으며, 이 안에서 다양한 종교를 배출하기는 했지만)으로 밖에 고려될 수 없을 것이다.
그것은 우리에게 있어서는 이루 다 헤아릴 수 없이 중요한 자연의 영역으로 지금 영위하고 있는 생동감 넘치는 광대하고 훌륭한 삶의 세계이며 동시에 육체로 화신하는 중간 중간에 영위하는 기간이기도 하다.
이러한 것이 베일에 드리워져 가장 지고한 천상의 모든 영광을 완전하게 깨달을 수 없는 것은 단지 우리의 개발이 완전하지 않은 까닭이며 우리 자신의 제한으로 인한 것이다.
그것은 바로 여기에 있으며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만 있다면 그로부터 오는 영향은 우리에게 흘러들어 온다. 세상 사람들은 이것을 불가능한 일로 받아들일지 모르지만 오컬티스트에게 있어서는 가장 평범한 사실이다.
아직도 이러한 기본적인 진실을 파악하지 못한 사람들을 위하여 우리는 다음과 같은 불교 고승의 가르침을 제시할 뿐이다.
“불평하지 말라. 울지도 말고 기도하지도 말라. 단지 눈을 뜨고 보라. 시야를 가리고 있던 눈가리개를 떼어내기만 하면 빛은 온통 그대 주변을 감싸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이 세상은 너무나 아름답고 너무나 놀라우며 그 어떠한 사람이 꿈꾸고 기도하던 것 이상이다. 언제까지나, 언제까지나 그러할 것이다.”
「사람들의 영혼(The Soul of a People, p.163.)」
저차원적인 생각과 욕망의 매체인 아스트럴체가 서서히 마모되어 뒤에 남겨지게 되면, 사람들은 멘탈체라고 부르는 더 미세한 매체로 이루어진 보다 고차원적인 매체를 발견하게 된다. 이 매체를 통해 우리들은 이와 대응되는 질료(멘탈계의 질료)로 이루어진 외부 세계를 인지하고 그 곳의 진동을 받아들일 수 있다.
연옥의 시간은 지나고 나면 낮은 측면의 본성은 사라지고 지상 생활동안 힘쓰고 노력해서 얻은 고상한 상념과 열망만이 남는다. 그리고 이것은 무리가 되어 주변을 감싸며 외부의 껍질을 형성한다.
이 껍질이 매체가 되어 사람들은 보다 섬세한 질료로 이루어진 특정한 종류의 진동을 감지할 수 있게 된다. 이처럼 자신의 주변에 있는 고상한 생각들은 천국의 부를 축적한 것이다.
이 멘탈계는 신성한 마음의 반영이며 물질 육체의 생이나 아스트럴 생에서 품은 생각과 영감의 힘에 비례하여 천국의 기쁨을 무한하게 이끌어낼 수 있는 창고이다.
모든 종교가 천국의 지복에 대해서 말하고 있지만, 어떻게 해서 모든 사람이 천국의 지복을 누릴 수 있는지에 대해서 합리적으로 설명을 해주고 있는 곳은 거의 없다(이는 천국에 대한 개념의 주요한 사항이다).
모든 사람들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이 빛나는 신의 상념에서 스스로의 천국을 골라내는 것이다. 사람들은 지상에서 보낸 생을 근간으로 하여 천상의 생활의 길이와 양상을 결정한다. 그러므로 모든 사람은 자기의 특성에 정확하게 부합하는 성격과 양의 기쁨을 받을 수밖에 없다.
천국이란 그곳에서 가졌던 바로 그 의식으로 인해 최고의 영적 지복을 누릴 수 있는 세계이다. 또한 이 세계는 열망에 대응하는 세계로서 오로지 열망의 역량에 의해서만 제약받는다.
아스트럴 생에 대해서 보다 상세한 내용을 알고자한다면 「아스트럴계(The Astral Plane)」를, 천상의 생에 대해서는 「데바챤계(The Devachanic Plane)」를 참조하라.
「죽음과 그 이후(Death and After)」와 「죽음의 다른 측면(The Other Side of Death)」에는 두 가지 모두에 대한 내용이 실려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