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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4장. 빛을 돌게 하고 숨을 고른다.[回(회)光(광)調(조)息(식)]


呂(여)祖(조)깨서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배우고 익힘에 있어서 가장 으뜸이며 핵심이 되는 내용은, 다만 잡된 것이 섞이지 아니한 순수한 마음만으로 실천하여 나가는 것일 뿐이다. 여러 가지 효험이 일어나지만 그것은 얻으려고 하지 아니하여도 저절로 그렇게 일어나 는 것이다. 크게 몽뚱그러셔 볼 때 처음 배우고 익히는 경우에 잘못을 저지르기 쉬운 것은 어두움 속으로 깊이 빠져 버려서 정신이 없게 되는 것(昏(혼)沈(침))과, 이 생각 저 생각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마음이 어지럽게 흐트러지는 것(散(산)亂(란)) 두 가지라고 할 수가 있다. 이러한 잘못을 물리치고 나면 하늘의 비밀을 열어 볼 수 있는 어떠한 구멍(竅(규))이 생기게 되는데, 그렇게 되기 위하여서는 마음(心(심))을 숨(息(식))에 함께 붙어 있도록 하는 수밖에는 없다.

 

 숨(息(식))이라는 것은 스스로의 마음이며 스스로의 마음은 숨(息(식))이 되고 있는 것이다. 마음이 한번 움직이면 곧 氣(기)가 생기게 되는데, 그 이유인즉 氣(기)라는 것은 본래 마음이 변화하여 이루어진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들 사람의 생각은 그 움직임이 지극히 빨라서 눈 깜짝할 사이에 하나의 헛된 생각(妄(망)念(념))이 생겼다가 사라지는데, 그러는 과정에 한 번의 呼(호)吸(흡)이 그에 따라서 이루어지게 된다. 그러므로 속에서 일어나는 호흡(內(내)呼(호)吸(흡))과 밖에서 일어나는 호흡(外(외)呼(호)吸(흡))은 마치 사람의 목소리와 메아리가 서로 따르는 것과 같다. 결국 하루에 몇 만 번의 숨(息(식))을 쉬니, 그 자체로써 몇 만 번의 헛된 생각(妄(망)念(념))을 일으키는 것이다.

 

그와 같이 흘러서 내면세계의 밝음을 유지하는 정신(神(신)明(명))이 다 새어나가 버리면, 마치 나무가 죽어서 마르는 것과 같고 불 꺼진 재가 싸느랗게 식는 것과 같아진다. 그렇다고 생각(念(념))이 없어지기를 바라겠는가? 생각(念(념))을 없앨 수는 없다. 또한 숨(息(식))이 없어지기를 바라겠는가? 숨(息(식))도 없앨 수는 없는 것이다. 이도 저도 아니라면 어떻게 하란 말인가? 결국 그러한 病(병)을 일으키는 얼개 자체가 바로 藥(약)으로 될 수 있음을 알아서 그렇게 되도록 하여야 하는 것이다. 다름 아니라 마음과 숨이 서로 붙어서 의존하는 일(心(심)息(식)相(상)依(의))이 그것이다.

 

그러므로 빛을 돌리는 일(回(회)光(광))은 반드시 숨을 고르는 일(調(조)息(식))과 함께하지 아니하면 안 되는데, 그 방법은 처음부터 끝가지 귀의 빛(耳(이)光(광))이라는 방법을 이용하는 것이다. 빛을 이용하는 방법에는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눈의 빛(目(목)光(광))이라는 방법이고, 또 하나는 귀의 빛(耳(이)光(광))이라는 방법이다. 눈의 빛(目(목)光(광))이라는 것은 바깥에 접해 있는 해(日(일))와 달(月(월))이 그 빛을 서로 어우르는 것이고, 귀의 빛(耳(이)光(광))이라는 것은 속에 있는 해(日(일))와 달(月(월))이 그 精(정)을 서로 어우르는 것이다.

 

그런데 精(정)이라는 것을 다시 말하면 빛(光(광))이 엉겨서 한곳에 머물러 있는 장소이고 같은 뜻인데 이름만 다를 뿐이다. 그러므로 귀로는 잘 듣고(聰(총)) 눈으로는 잘 보는(明(명)) 것을 통틀어서 그 모두가 하나의 신령한 빛에 지나지 아니한다. 배우고 익힘에 들어 자세를 잡고 앉을 때에는 눈을 가늘게 내려 떠서 마치 발을 내린 것과 같은 상태로 되는데, 그런 뒤에는 눈길을 코끝에다 맞추어 놓고 그 상태를 그대로 지켜낼 수 있게 되면 모든 긴장과 의식을 풀어서 억지스러운 요소들을 모두 내려놓는다. 그러나 모든 것을 내려놓는 일을 끝까지 지켜낼 수 없을지도 모르기 때문에 마음을 모아서 끊어지지 않게 하면서 숨(息(식))의 소리를 듣게 되는 것이다.

 

숨의 들고 나는 소리가 귀에 들려서는 아니 되는 것이 배우고 익히는 요령이니 여기에서 숨(息(식))의 소리를 듣는다는 것은 그 소리 없는 소리를 듣는 것을 가리킨다. 한 번 소리가 나게 되면 그 숨은 거칠고 들떠 있는 것이라서 가늘어질 수가 없다. 그러니 마음을 잘 참아내면서 숨을 가볍고 가벼우며 알듯 모를 듯 하게 하여,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억지스러움을 다 내려놓고 더욱더욱 숨이 없는 듯 한 상태로 되며, 숨이 없는 듯 한 상태도 시간이 지남에 따라 더욱 깊어지고 더욱더욱 변화와 움직임을 여의고 조용한 상태로 되어야 한다.

 

그와 같이 오래도록 지켜 나가노라면 그 숨이 없는 듯한 상태조차도 갑자기 뚝 끊어진다. 이것이 곧 태어나기 이전 상태에서의 참된 숨(眞(진)息(식))이라는 것이 눈앞에 이루어진 것이다. 마음과 몸이 그것을 알아차릴 수가 있다. 무릇 마음이 가늘게 되면 숨도 가늘어지니 마음이 하나로 되면 氣(기)을 움직이고, 숨이 가늘게 되면 마음도 가늘어지니 氣(기)가 하나로 되면 마음을 움직이게 된다. 마음을 흐트러짐 없이 한곳에 머물게(定(정)心(심)) 하려면 반드시 그보다 먼저 기를 길러야(養(양)氣(기)) 한다고 하는데, 그것도 역시 마음을 가지고는 처음으로 손을 대서 작할(入(입)手(수))곳이 없으므로 氣(기)로 말미암아서 그 실마리를 삼는 것이다.

 

이른바 잡된 것 없이 순수한 기(純(순)氣(기))를 지켜낸다는 것이다. 그대들은 “움직인다.(動(동))”는 용어의 뜻을 밝게 알지 못하고 있는데 움직인다.(動(동))는 것은 끈으로 묶어 당겨서 움직이게 한다는 말이니 결국 끌어당긴다.(掣(체))는 용어의 別(별)名(명)에 해당한다. 바쁘게 달림으로써 그것을 움직이게(動(동))할 수 있다면, 잡된 것이 섞이지 아니하여 순수하고 변화와 움직임을 여읨(靜(정))으로써 그것을 편안하게(寧(녕)) 할 수 없을 이유가 없다.

 

이것이 바로 큰 聖(성)人(인)들께서 마음과 氣(기)의 어울림을 살펴 가지고 그때그때 알맞게 사람을 가르치는 방법을 잘 세워서 뒷사람들에게 은혜를 베푼 곳이 된다. 丹(단)에 관한 책에서 “닭은 알을 품고서 마음으로 변함없이 알 속에서 나오는 소리를 들을 수 있다”고 말하고 있는데, 이것은 참으로 중요한 방법을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 닭이 알을 깔 수 있는 까닭은 따뜻한 기운(暖(난)氣(기)) 때문이다. 따뜻한 기운은 다만 알껍데기만을 따뜻하게 함에 그치고 그 알 속으로 들어가지는 못하는데, 닭이 마음으로 그 기운을 이끌어서 그 속으로 들어가게 하는 것이다. 그렇게 하면서 속에서 나오는 소리를 듣는데 그렇게 하기 위하여 한 결 같이 마음을 그곳에 쏟아 붓는다.

 

마음이 그 속으로 들어가면 氣(기)도 들어가게 되고 따뜻한 기운을 얻어서 알이 깨어져 나오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암탉이 가끔씩 둥지 밖으로 나가는 경우가 있더라도 변함없이 알 속에서 나오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어서 그 神(신)을 쏟아 붓는 바에는 조금도 틈이 생기지 아니하게 한다. 神(신)을 쏟아 붓는 바에 조금도 틈이 없게 하니 따뜻한 기운도 역시 밤이나 낮이나 틈이 없게 된다. 神(신)이 살아 있는 것이다. 神(신)이 살아나기 위해서는 먼저 그 마음이 죽어 버려야 한다. 사람이 마음을 죽여 버릴 수 있으면 그 자리에서 그 사람 전체를 主(주)宰(재)하는 가장 으뜸 된 신(元(원)神(신))이 살아난다. 그런데 마음을 죽여 버린다는 것은 나무가 말라 죽듯 하는 것이 아니고 그 마음을 오로지 하나로 모아서(專(전)一(일)) 나누어지지 아니하게 하는 것을 말한다.

 

부처께서는 “마음을 한곳에 놓아두고 무엇이든 일삼지 말고, 무엇을 어떻게 해보려고 하지 말라(置(치)心(심)一(일)虛(허). 無(무)事(사)不(불)辨(변))”고 말하였다. 마음은 달아나기를 잘하므로 氣(기)로서 그것을 잡된 것이 섞이지 않고 순수하게 되도록 하며 氣(기)는 거칠어지기를 잘하므로 마음으로써 그것을 가늘어 지게 한다. 이와 같이 하면 어찌 흩어짐이 없이 한곳에 머무르지(定(정)) 아니하는 일이 있겠는가? 크게 묶어서 말하면 어두움 속으로 깊이 빠져 버려서 정신이 없게 되는 것(昏(혼)沈(침))과 이 생각 저 생각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마음이 어지럽게 흐트러지는 것(散(산)亂(란))이라는 두 가지 잘못이 있는데, 그 두 가지 잘못은 오직 변화와 움직임을 여의고 조용히 하는 일(靜(정)功(공))에 의하여서만 고쳐진다.

 

하루하루 끊어짐 없이 그 조용히 하는 일을 배우고 닦아 나가노라면 저절로 크게 쉴 곳이 있게 된다. 만약 변화와 움직임을 여의고 조용히 앉아 있는 배우지 않는 경우라면 비록 이 생각 저 생각으로 걷잡을 수 없이 마음이 흐트러지더라도 스스로 알아차리지 못하게 된다. 일단 마음이 흩어져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나면, 그 알아 차렸다는 자체가 그와 같이 마음이 흐트러짐을 막는 기틀이 되는 것이다. 어두움 속으로 깊이 빠져 있어도 스스로도 그러함을 알아차리지 못하는 것과, 어두움 속으로 빠져 있기는 하지만 스스로 그러함을 알아차리고 있는 것과는 그 차이가 너무나 커서 서로 천리만리 떨어져 있다고 할 수 있다. 알아차리지 못하고 어두움 속에 깊이 빠져 있는 것이 진짜 빠져 있는 것이고, 그러함을 알아차리고 있는 것은 어두움 속에 완전히 빠져 버렸다고 말할 수는 없는 것이다. 맑고 밝음이 그 안에 들어있기 때문이다.

 

이 생각 저 생각 걷잡을 수 없이 마음이 흐트러지는 것은 神(신)이 이리 저리 달려가기 때문이고 어두움 속으로 깊이 빠져 있는 것은 神(신)이 아직 맑아지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 생각 저 생각으로 흩어지는 잘못은 좀 쉽게 고칠 수 있지만 어두움 속으로 빠져 들어가는 잘못은 치료하기가 어렵다. 병에 비유해 보면 아프거나 가려운 것은 약으로 치료할 수가 있으나, 정신을 잃어버리는 것은 몸의 어느 부분 또는 팔다리의 감각이 없어지는 마비 증세와 같은 것이어서 어떻게 해 볼 수가 없는 것과 같다.

 

흩어지는 것은 거두어들일 수가 있고, 이 생각 저 생각으로 걷잡을 수 없이 어지러운 것도 가지런하게 할 수가 있다. 그러나 만약 어두움 속으로 깊이 빠져서 정신을 잃어버리면 멍청하고 또 멍청하여 깜깜하다. 이 생각 저 생각으로 걷잡을 수 없이 흩어지더라도 그 흩어지고 어지러운 장소는 아직 있기 마련인데, 어두움 속으로 깊이 빠져 버리면 오로지 넋(魄(백))만이 모든 것을 좌우하게 된다. 이 생각 저 생각으로 흩어지는 경우에는 아직도 얼(魂(혼))이 남아 있는데, 어두움 속으로 깊이 빠져 버리면 완전히 陰(음)만이 주장하는 상태가 되는 것이다.

 

앉아서 변화와 움직임을 여의어서 조용함을 배우며 익히려고 하는 경우에 잠이 오려고 하는 것이 바로 어두움 속으로 빠져 들어가는 것이다. 어두움 속으로 빠지지 않도록 잠을 끊어 버리는 방법은 오직 호흡을 고르는 일(調(조)息(식))에 달려 있다. 여기에서 말하는 호흡(息(식))은 입과 코로 나가고 들어오는 호흡을 말한다. 비록 태어나기 이전부터 쉬고 있던 상태와 같은 참다운 숨(眞(진)息(식))은 아니지만, 그 참다운 숨이라는 것도 역시 이 입과 코로 쉬는 호흡에 붙어 있는 것이다.

 

마음과 氣(기)을 닦는 일을 배우고 익히는 경우에는 언제나 반드시 마음의 변화와 움직임을 여의고 조용히 하여야 하며, 氣(기)을 잡된 것이 섞이지 아니하고 순수하도록 하여야 한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면 마음의 변화와 움직임을 여의고 조용할(靜(정))수 있는가? 그렇게 할 수 있는 작용이 호흡 속에 들어있다. 호흡이 나가고 들어오는 것을 오직 마음으로만 스스로 알고 있어야 되지 귀에 그 소리가 들려서는 아니 된다. 귀에 그 소리가 들리지 아니하면 가늘어지고(細(세)) 가늘어지면 맑아지는데(淸(청)), 거꾸로 소리가 들리면 氣(기)가 거칠어지고(粗(조)) 거칠어지면 흐려지고(濁(탁)) 흐려지면, 곧 저절로 어두움 속으로 빠져 들어가서(昏(혼)沈(침)) 잠이 오게 마련이다.

 

비록 그와 같이 마음의 작용이 호흡 속에 들어 있기는 하지만, 그 작용을 올바른 쪽으로 이루어지게 하기 위하여서는 아주 훌륭하게 그 작용을 이용할 줄 알아야 한다. 모든 진리가 그러하듯이 이 마음의 작용이라는 것도 결국 작용하지 아니하는 작용이다. 오직 알듯 모를 듯하게(微(미)微(미)) 빛으로 비추고(照(조)) 마음으로 들어야만(聽(청)) 할 뿐이다.

 

 “알듯 모를 듯 하게 빛으로 비추고(照(조)) 마음으로 듣는다.聽(청))”는 이 구절에는 숨겨진 뜻이 들어 있다. 어떻게 하는 것을 두고 빛으로 비춘다.(照(조))고 말하는가? 눈의 빛(眼(안)光(광))이 스스로를 비추는 것이니 눈은 오직 안으로만 보고(內(내)視(시)) 바깥을 보지(外(외)視(시)) 아니한다. 바깥을 보지 아니하면서도 말똥말똥하게 깨어 있는 것이 곧 안으로만 보는 것(內(내)視(시))]이 되고, 실제로 몸속을 보고 있는 것이 아니다.

 

어떻게 하면 마음으로 들을 수 있겠는가? 귀의 빛(耳(이)光(광))으로 스스로를 듣는 것이니 귀는 오직 안으로만 듣고(內(내)聽(청)) 바깥을 듣지(外(외)聽(청)) 아니한다. 바깥을 듣지 아니하는데도 말똥말똥하게 깨어 있으면 곧 안으로만 듣는 것(內(내)聽(청))이 되고, 실제로 몸속에서 나는 어떤 소리를 듣고 있는 것이 아니다 듣는다.(聽(청))는 것은 그 소리 없는 소리를 듣는 것이고 본다.(視(시))는 것은 그 모양 없는 모양을 보는 것이다. 눈으로는 바깥을 보지 아니하고 귀로는 바깥을 듣지 아니하면, 氣(기)가 닫혀 막혀서 안으로 달려 들어가려고 한다.

 

오직 안으로만 보고(內(내)視(시)) 안으로만 들어야(內(내)聽(청)) 氣(기)가 바깥으로 달려가지도 아니하고 안으로 달려가지도 아니하게 되어서, 어느 쪽으로도 치우치지 아니하고 마땅함(中(중))을 얻어서 어두움에 빠져 들어가지 아니하게 된다. 이러한 상태를 두고 “해와 달이 정을 어우르고 빛을 어우름(日(일)月(월)文(문)精(정)交(교)光(광))”이라고 하는 것이다.

 

어두움에 빠져 들어서 잠이 오려고 하거든, 즉시 일어나서 천천히 걷다가 정신이 맑아진 뒤에 다시 앉아서 배우고 익힘에 들라. 맑은 새벽의 한가한 틈이 있을 때에 향 한 자루가 타도록 앉아서 배우고 익히는 것이 참 좋다. 오후가 되면 세상살이의 일들이 아주 어지러워져서 쉽게 어두움으로 빠져 들게 된다. 그러나 오후에는 배우고 익히는 일을 하지 말라는 뜻은 아니며 또한 그 앉아있는 시간도 꼭 향 한 자루가 다 타도록 계속할 필요는 없다. 오직 모든 연분(緣(연))을 내려놓아 버리고 변화와 움직임을 여의고 조용히 잠시 앉아 있곤 하여야 할 뿐이다. 그렇게 오랜 나날이 지나노라면 무엇인가 머리에 들어오는 것이 있게 되고 어두움 속으로 빠져 들지 않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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