런던 지부에서 행할 강연을 준비하고 있을 당시 나는 리드비터와 함께 살면서 시험을 위한 수업에 참석하고 있었다. 리드비터 주교는 자기가 받은 편지 봉투를 절대로 버리지 않는 습관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봉투의 측면을 잘라서 펼친 후 봉투의 안쪽 면을 메모지로 사용하였는데, 이런 습관은 그가 죽을 때까지 계속되었다.
1894년 11월 21일, 메모를 바탕으로 강연을 한 리드비터는 런던 지부의 24호 회보에 싣기 위해 강연 내용을 글로 옮기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는 종이조각 위에 한 번에 조금씩 글을 쓰기 시작했는데, 그 종이조각이란 다름 아닌 개봉된 편지 봉투였다. 이 종이 쪽지를 보고 대판양지 크기의 낡은 다이어리 빈 곳에 옮겨 적는 것이 나의 일이었으며, 따라서 원고는 내 육필로 된 것이었다. 글을 쓰는 일은 3~4주가 걸렸는데, 리드비터가 생계를 위해 여러 가지 일에 종사하느라 시간이 잘 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런던 지부 회보의 교정쇄가 리드비터에게 도착했을 때 내 육필로 된 원고도 당연히 되돌아 왔다. 인쇄업자로부터 원고가 되돌아 올 때는 늘 있는 일이지만, 그 원고는 식자공과 교정원의 손자국이 찍혔는가 하면 취급과정에서 모두 더럽혀져서 희고 깨끗했던 본래의 모습을 찾아보기 어려웠다. 이것은 문제가 되지 않을 수도 있었다. 일단 인쇄에 들어가면 원고는 버려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번에는 여느 때와 달리 리드비터 주교를 당황하게 만드는 뜻밖의 일이 생겼다. 어느 날 아침 그는 쿠트후미 대사가 원고를 보내줄 것을 요구해 왔다고 내게 알려 주었는데, 그것은 쿠트후미 대사가 그 원고를 대백색형제단의 박물관에 보관하기를 원했기 때문이었다. 대사는 「아스트럴계(Astral Plane)」가 인류의 지성사에 있어서 이례적이며 기념비적인 작품이라고 설명하였다. 지금까지는 아틀란티스와 같은 위대한 문명에서조차도 오컬트 학파의 현자들은 현대의 과학적인 견지와 다른 각도에서 자연의 사실들에 접근했었다는 것이 대사의 설명이다.
과거의 오컬트 교사들은 자연의 “생명 측면”이라 할 수 있는 사실들의 내적인 의미를 더욱 추구하였고, 오늘날의 과학적 방법으로 특징지어지는 자연의 “형태 측면”은 상대적으로 소홀히 하였다. 자연의 신비에 대한 거대한 지식체계는 과거 여러 문명의 대사들에 의해 수집되었지만, 지금까지 그 지식은 정밀한 과학적 분석에 따른 것이 아니라 “생명 측면”에 대한 의식의 반응들로부터 종합되어진 것이다. 그런데 비교(秘敎) 역사상 처음으로 마치 아마존 정글에 들어간 식물학자가 목본과 초본, 관목들을 분류하고 그 생태계의 역사를 정리하듯이 그와 유사한 방법으로 아스트럴계 전체에 대한 상세한 조사가 이루어졌던 것이다.
이러한 이유로 「아스트럴계」라는 소책자는 분명한 하나의 신기원이라고 할 수 있었으며, 기록의 보관자로서 대사는 그 원고를 박물관에 두기를 원했다. 이 박물관에는 대사들과 그들의 제자들이 행했던 고차원적인 연구에 관련되어 역사적으로 중요한 다양한 물건들이 신중히 선정되어 보관되었는데, 그것들은 다양한 활동 영역에서 특별히 이룩한 인류의 진보에 대한 기록이라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박물관에는 다양한 시대의 지구 지형을 보여주기 위해 만들어진 지구본들이 소장되어 있다.
런던 지부의 또 다른 회보에 스코트 엘리어트의 “아틀란티스”란 글이 실렸을 때, 리드비터 주교가 그렸던 지도는 바로 이 지구본에서 유래한 것이다. 또 다른 귀중한 물건 중에는 동위원소의 일종인 고체 수은조각이 있다. 이미 사라지거나 현존하는 종교들에 관계된 다양한 고서(古書)들도 있으며, 이 지구라는 천체 위에서 벌어지는 “생명 파동(Life Wave)”의 작용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만한 다른 유용한 자료들도 포함되어 있다.
내가 기억하는 한 리드비터 주교가 “당황했던” 거의 유일한 경우는 바로 대사가 그의 소책자 원고를 송부하라고 요구했을 때였다. 원고가 인쇄업자의 손을 거친 후 지저분하게 더럽혀진 상태였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사의 요구는 실행되어야 했다. 그런데 이번에는 어떻게 그 원고를 티벳까지 보낼 것인지 문제가 되었다. 하지만 이 문제는 별 고민거리가 되지 못했는데, 그것은 리드비터 주교가 다른 사람들에게 보여 준 적이 없는 어떤 신비한 오컬트 능력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다. 운 좋게도 나는 그 능력을 지켜볼 수 있었다.
원고는 비물질화되어 티벳으로 보내진 후 그 곳에서 다시 물질화될 예정이었다.
나는 마침 폭이 3인치되는 노란색 비단 끈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원고를 넷으로 접은 후에 비단 끈을 두르고 바느질을 하여 띠처럼 만들었다. 나는 “초자연 현상”에 대한 증거를 얻을 수 있는 훌륭한 기회가 주어진 데 대해 흥분하고 있었다. 만약 원고를 상자 안에 넣어 잠그고 그 열쇠를 항상 내가 갖고 있다면, 그래서 상자 안의 원고가 사라진 것으로 판명난다면, 나는 초자연 현상에 대한 근사한 이야깃거리를 하나 얻게 되는 셈이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그리고 이상스럽게도, 그때 리드비터나 내게는 제대로 잠글만한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쇠가죽으로 만든 낡은 트렁크가 있긴 했지만 자물쇠가 망가져 있었고, 가방이 몇 개 있긴 했지만 잠금장치에 모두 결함이 있었다. 쓸만한 자물쇠는 정말 아무것도 없었다. 거북이 등껍질 문양을 새긴 작은 나무 상자 하나가 있었는데, 그것은 리드비터 주교 어머니의 재봉함이었다. 하지만 그것도 오래 전에 열쇠를 잃어버렸다.
할 수 없이 원고를 그 상자 안에 넣고 그 위에 책 한 무더기를 쌓아 올렸다. 달리 더 좋은 방법이 없었다. 다음날 아침 눈을 뜨자마자 책더미를 치우고 재봉함 속을 들여다보았는데, 원고는 이미 사라진 뒤였다. 초자연 현상을 입증할 기회를 놓쳐버린데 대한 섭섭함은 그 원고를 내가 직접 아스트럴체 상태로 대사에게 전해준 것이라는 설명을 듣고도 위로가 되지 못했다.
여기서 회의론자들이 이의를 제기할 수 없을 만큼 초물리적인 능력이 실제로 작용하는 완벽한 예를 찾아내는 일이 불가능한 이유에 대해서 내가 다른 곳에 썼던 글을 인용해보는 것도 재미있을 것 같다.
우리가 오컬트 사실들과 관련하여 어떤 장애도 없이 증거사례를 입수하게 될 때마다 항상 무슨 일이 일어나서 결정적인 입증을 막곤 했다. 심령주의가 태동하던 초창기에, 영적인 존재들이 많은 놀랄만한 물건들을 먼 거리를 이동시켜 초능력을 사용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 일은 잘 알려져 있는 사실이다. 그러나 각각의 사례에는 꼭 결정적인 고리가 하나씩 빠져 있다. 항상 의심을 살만한 허점이 하나씩은 있었던 것이다. 이와 유사한 일이 대사들에게도 적용되는데, 심라(Simla)에서 블라바츠키 여사의 일과 관련하여 대사들이 행한 초자연현상 중에서, 그 날의 런던 타임스를 심라로 물질 이동시키는 일은 언젠가 제안하였듯이 그들에게는 가장 손쉬운 일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초자연 현상이 수반되는 모든 경우에, 중요한 증거가 되는 사실들을 빠뜨리고 지나가거나 또는 어떤 다른 이유로 인해서 누락시키게 된다.
대사들에게 이 문제에 대해 질문했을 때, 그들은 그 어떤 현상도 빈틈없이 완벽한 증거를 갖고서 드러나는 것을 의도적으로 막아왔다고 알려주었다. 인류가 현 단계에 머물러 있는 동안에는, 즉 강력한 정신을 가졌지만 많은 사람들이 그에 어울리는 도덕적 자질이 결여되어 있는 한, 이들 부도덕한 지성인들에게 오컬트 능력이 존재한다는 완전한 신뢰를 주지 않는 것이 그들의 계획이다. 이 주제에 대해서 회의적인 시각이 존재하는 한 인류는 부도덕한 사람들이 저지르는 착취로부터 보호를 받을 수 있다. 인류가 천연자원을 지배하기 시작하면서, 이기적인 마음을 가진 사람들에게 경제적으로, 또는 산업적으로 어떻게 착취를 당해왔는지 우리는 이미 알고 있지 않은가. 만약 이런 사람들이 오컬트 능력을 이기적인 목적에 사용한다면, 얼마나 큰 재난이 발생할 것인지는 약간의 상상력을 가진 사람이라면 누구나 어렵지 않게 예측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