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呂祖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原始天尊이 살고 있다는 玉淸宮으로부터 여유 있고 한가롭게 배우고 익히는 법이 내려왔는데 다음과 같다. 저절로 그러한 대로 놔두고 인위적인 요소를 없애며 배우고 익혀서(無爲而爲) 신을 엉겨 모이게 하여(凝神), 氣穴로 들어가서 한여름(六月)에도 갑자기 흰 눈이 날리는 것을 보게 되고, 한밤중(三更)에도 둥근 해가 이글거림을 보게 되거든, 물속에서도 숨을 쉬면서 거센 호흡(巽風)과 눈빛의 힘을 빌리고, 하늘 위로 헤엄을 치듯 돌아갔다가 다시금 내려와서, 유순하고 모든 것을 싣고 있는 땅의 공덕으로 먹여 키우라(食坤德).

 

아직도 한마디 아주 우리의 가르침에 맞으면서도 훌륭한 곳(玄中玄)이라는 말이 있으니, 세속의 티끌과 번거로움이 없고 텅 빈 그곳(無何有鄕)이야말로, 영원한 진리와 통하는 나의 집(眞宅)이다. 위에 나오고 한 줄마다 일곱 글자씩 되어 있어서, 律詩의 형태를 취하고 있는 글의 뜻이 도교의 맛이 있으면서 진리를 완전히 다 드러낼 정도로 깊고 훌륭하다.

 

진리를 이루는 큰 방법의 요점은, 저절로 그러한 대로 놔두고 인위적인 요소를 없애며 배우고 익힌다.(無爲而爲)는 네 글자에서 벗어나지 아니한다. 저절로 그러한 대로 놔두고 인위적인 요소를 없애므로, 어떤 방법이나 장소나 모양, 모습에 의하여 가로막히지 아니한다. 저절로 그러한 대로 놔두고 인위적인 요소를 없애며 배우고 익히므로, 겉모습으로만 조용함에 들어서 어리석은 공(頑空)이나 생명 없는 허망(死虛)에 떨어지는 일이 생기지 아니한다.

 

그렇게 될 수 있도록 하는 작용은 하나의 中이라는 글자 밖에 있지 아니한데, 여닫이문의 지도리처럼 가장 중요한 핵심은 두 눈에 있다. 사람에게 있어서는 두 눈이라는 것이 마치 하늘에서의 북두칠성의 자루(斗柄)와 같은 것이다. 그것이 圓의중심이 되어서 돌아감으로써, 우주 자연의 운행 변화가 이루어지고, 陰과 陽을 바꾸어 가면서 굴러가게 하는데, 그렇게 되어가고 있는 가장 가운데의 중요한 곳에 자리 잡고 있는 가장 중요한 것은, 처음부터 끝까지 坎괘의 가운데 爻 즉 陰한 가운데에 쌓여있는 陽함을 뜻하는 물 가운데의 금(水中金) 이라는 하나로 되어 있다.

 

다시 말하면 물 즉 坎괘의 본래 자리인 丹田에 들어 있는 납(水鄕鉛)이라는 것에 지나지 아니하는 것이다. 앞에서 말한 빛을 돌리는 방법은 걸음마를 배우는 처음 단계에서의 기틀을 가리킨 것이다. 밖에서부터 배우고 익혀서 안쪽의 세계를 눌러 다스리는 것이니, 다시 말하면 신하(輔)의 도리로써 임금(主)을 얻는 것이었다. 그것은 배우고 익힘의 경지가 좀 낮은(中下) 사람들이 아래의 두 關門을 닦아서, 위에 있는 하나의 관문을 뚫는 일이었다.

 

이제 이곳에서는 가는 길이 차차로 뚜렷하여지고, 배우고 익히는 일의 요령(機括)이 점점 익숙해진 경우에 대하여 말하고자 하는 것이다. 하늘은 진리의 길을 가는 사람이라고 해서 특별히 사랑하지는 아니하니, 진리의 길을 가는 사람 앞에는 많은 시련이 놓여 있다. 이제 우리가 배우고 익히고자 하는 가르침의 위없이 귀중한 뜻(無上宗旨)을 곧이곧대로 말해 버리고자 하니, 배우는 사람들은 이것을 함부로 남들 앞에 드러내지 말며, 오직 몸소 실천하기에 힘 다하기를 거듭거듭 당부한다.


무릇 빛을 돌린다.(回光)는 것은 우리가 따르는 가르침을 배우고 익히는 과정 전체를 통틀어서 일컫는 용어이다. 배우고 익힌 경지가 한 층씩 높이 올라가면 갈수록 빛(光華)의 밝기가 한 차례씩 커지고, 그 빛을 돌리는 방법도 한 차례씩 거듭 묘해져 나간다. 앞에서는 밖에서부터 배우고 익힘으로 말미암아 안쪽의 세계를 눌러 다스리는 것이었는데, 이제는 완전히 안으로 들어가서 가운데에 자리 잡고 살면서 밖의 세계를 거느리는 것이다.

 

앞의 것을 다시 말하면 신하(輔)가 임금(主)을 옆에서 모시는 것이었고, 이제의 것은 임금을 받들면서 나라의 뜻을 백성에게 미치게 하는 것이다. 그 배우고 익히는 모습이 크게 한번 뒤바뀌게 된다. 진리의 길을 가는 사람(法子)이 변화와 움직임을 여의고 조용함에 들려고(入靜)하면, 먼저 몸과 마음을 진리의 가르침에 맞게 잘 거두어 잡아서(調攝), 아무런 걸림도 없이 편안하고 평화로워야 한다.

 

모든 연분(緣)을 내려놓아 버려서 실 한 오라기도 걸려 있지 아니한데, 하늘의 중심(天心)이 가운데의 바른 자리에 자리 잡게 한 뒤에, 두 눈을 내려 떠서 발을 내린 듯이 한다. 마치 임금의 뜻을 받들어서 높은 신하들을 불러들이는 것과 같으니, 감히 어느 신하가 달려오지 아니할 수 있겠는가? 그런 다음에 두 눈의 초점을 이끌어서 안으로 단전(坎宮)을 비춘다. 빛(光華)이 이르는 곳에는 태어나기 이전부터 있었던 참다운 양(眞陽)이 나타나서 그에 응한다.

 

性을 상징하는 離라는 괘는 바깥은 陽하고 속은 陰한데, 본바탕은 乾괘이다. 본바탕인 乾괘와 속에 있는 효에 하나의 음(一陰)이 들어와서 주인이 된 괘인 것이니, 생겨나고 변화하는 사물에 따라서 마음도 생겨나서 흐름을 따라 흘러나와서 이리 굽어 흐르고 저리 굽어 흐르곤 한다. 이제 빛을 돌려서 안쪽을 비추며, 사물의 생겨나고 변화함을 따라서 마음을 생겨나게 하지 아니하게 되었으니, 陰한 氣는 곧 머무르고, 빛(光華)이 쏟아지며 비춘다. 다시 말하여 잡된 것이 섞이지 아니한 순수한 양(純陽)이 된 것이다. 같은 종류끼리는 반드시 가까워지게 되어 있으므로, 命을 상징하는 坎이라는 괘의 가운데에 있는陽이 위로 올라가게 된다.

 

이와 같이 위로 올라가게 되는 陽은 본바탕이 되는 坤괘의 속으로 乾괘에서 하나의 양(一陽)이 들어와서 이루어진 것이므로, 본래 坎괘의 陽이 아니라고 할 수 있으며,  어디까지나 乾괘의 陽이 건괘의 양에 응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離괘 가운데의 陰과 敢괘 가운데의 陽이라는 두 물질이 한번 만나게 되면, 곧 서로 묶어지고 맺어져서 흩어지지 않게 되고, 우주 자연의 근원을 이루고 있는 것과 같은 기운이 가득 차서 살아 움직이는데, 아주 빠르게 왔다갔다 오르락내리락 가라앉았다가 떠올랐다가 한다.

 

나 스스로의 단전(元宮) 가운데가 마치 우주의 태초처럼 크게 텅 빈 듯하고 그 크기를 헤아릴 수 없이 커진 듯 하여 어리둥절하게 되며, 온몸이 가볍고 묘하여져서 막 날아오르려고 한다. 이른바 온 누리의 산허리에 구름이 꽉 들어차 있는 모습(雲滿千山)이라는 것이다. 그러다가는 오고 가는 발자취가 없어지고, 뜨고 가라앉는 구별이 없어지며, 맥박이 멈추고 氣의 운행이 멈춘다. 이러한 상태를 두고, 참으로 서로 어울려 합쳐졌다고 한다. 이른바 온 누리의 물마다에 달이 담겨 있다(月涵萬水)라는 것이다. 그때에는 당연히 어둡고 어두운 상태인데, 그 어두운 가운데를 지키고 있노라면 문득 하늘의 중심(天心)에서 한 차례 움직임이 있게 된다. 이것이 곧 하나의 양이 다시 찾아오는 것(一陽來復)이며, 陽이 살아나기 시작하는 자시(活子時)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 가운데에서 생겨나고 없어지며, 늘고 줄며 변화하는 소식은 더욱 자세하게 설명할 필요가 있다. 보통사람은 한번 보거나 듣는 경우에는 귀나 눈이 사물을 따라가면서 움직이다가 사물이 없어지면 그친다. 이러한 움직임(動)이나 움직이지 아니함(靜)은 모두가 보통사람들의 경우인데, 이렇게 되면 그 사람 전체를 주재하는 대뇌의 능력을 의미하는 하늘의 임금(天君)은 사물을 지배하고 거느리는 본래의 역할을 해내지 못하고, 오히려 그것을 따라다니는 역할을 하게 되어서, 언제나 陰한 기운의 능력을 의미하는 鬼와 더불어 살 수밖에 없게 된다.

 

그러나 우리의 가르침을 배우고 익힌 이제는, 한번 움직이거나(一動) 움직이지 아니함(一靜)이 모두 鬼가 아니라 陽한 사람(人)이 나와 더불어 그러하게 되었으니, 나를 주재하는 하늘의 임금(天君)도 이제는 진리에 합쳐진 참다운 주재자(眞人)로 되었다. 그가 움직이면(動) 다른 것들이 그와 더불어 함께 움직이는데(動), 이와 같이 움직일 때에는 上丹田을 의미하는 하늘의 뿌리(天根)에 근거하고, 그가 변화와 움직임을 여의고(靜) 있으면 다른 것들도 그와 더불어 함께 변화와 움직임을 여의고(靜) 있는데, 이와 같이 변화와 움직임을 여의고 있을 때에는 丹田을 의미하는 달이 숨어 있는 굴(月堀)에 숨는다.

 

움직임(動)과 움직이지 아니함(靜)은 끝없이 꼬리를 물고 도는 것이니, 나도 역시 나를 주재하는 하늘의 임금(天君)과 더불어 움직임과 움직이지 아니함을 끝없이 꼬리를 물고 되풀이한다. 모든 것을 그치고 한가롭게 쉬는 것(休息)은 위와 아래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니, 나도 또한 나를 주재하는 하늘의 임금(天君)과 더불어 위와 아래의 丹田에 이르러서는 모든 것을 그치고 한가롭게 쉰다.(休息). 이른바 하늘의 뿌리(天根)와 달이 숨어 있는 굴(月堀)사이를 아무런 꾸밈없이 한가롭게 오고 간다는 것이다(天根月堀閑來往).

 

下丹田을 의미하는 天心이 가라앉아서 조용한 상태로 있는데도 불구하고, 나의 뜻이 움직여서 그 시기를 어기게 되는 경우를, 너무 어린 것을 캐려고 하는 잘못이 있다고 한다. 下丹田을 의미하는 天心이 이미 움직인 뒤에 나의 뜻이 움직여서 그것에 응하고자 하는 경우를, 너무 늙은 것을 캐려고 하는 잘못이 있다고 한다. 下丹田을 의미하는 天心이 한번 움직이려고 할 때에, 지체 없이 태어나기 이전부터 나를 주재하던 참되고 무의식적인 뜻(眞意)을 大惱의 乾이라는 궁궐로 올라가 있게 하고, 神의 빛으로 하여금 정수리를 보도록 하여서, 그 움직인 것을 이끌어 올린다. 이것이 바로 움직임이 있을 때에 정확하게 그 시기를 맞춘다는 것이다.

 

이렇게 하여서, 下丹田(天心)에서 움직이던 丹이 이미 乾이라는 궁궐로 올라가 있게 되면, 물속에 둥실 떠 있는 듯하고, 스스로 “이제는 되었다” 하고 만족해하며, 갑자기 모든 변화를 여의고 고요해 지려고 한다. 이때에는 재빨리 태어나기 이전부터 나를 주재하던 참되고 무의식적인 뜻(眞意)으로써 그 丹을 이끌고 내려와서 中丹田을 의미하는 黃庭에 들어가게 하여야 한다. 그리고는 눈빛으로 丹田을 의미하는 中黃에 있는 신의 방(神室)을 본다. 이미 모든 변화를 여의고 고요해지려고 하는 경지에 이른 사람이 이 경지에 이르면 한 생각도 생겨나지 아니한다. 그러니 내면의 세계를 보고 있던 사람이, 갑자기 자기가 보고 있다는 사실을 잊어버린다.

 

이러한 때가 되면 몸과 마음이 한마당 크게 놓여 버리고, 모든 연분이 자취도 없어지고 마는 경지로 되어서, 이제까지 나의 下丹田과 上丹田의 신의 방(神室)에 차려 놓고서 불을 때고 丹을 불리던 화로(爐)와 솥(鼎)조차도 어디에 있는지 모르게 된다. 나의 몸을 찾아보려고 하여도 그렇게 되지 아니한다. 이러한 경지를 두고 하늘이 땅속으로 들어간 경지(天入地中)요, 모든 훌륭하고 묘한 것들도 그 뿌리로 돌아간(衆妙歸根) 때라고 한다. 이것이 바로 神을 엉겨 모이게 하여, 下丹田을 의미하는 기의 구덩이(氣穴)에 들어가게 하여 봉하여 두는(凝神入氣穴) 일이다.

 

빛을 돌리는 가르침을 배우고 익히는 과정을 하나로 묶어보면 다음과 같다. 처음에는 흩어진 것들을 거두어들이려고 하는 과정으로서, 사람의 여섯 감각기관을 사용하는 일을 하지 아니한다. 이 과정을 두고 사람의 본래 타고난 근원(本源)을 어머니의 뱃속에서 태아를 기르듯 기르는 과정(涵養本源)이요, 등잔에 기름을 다시 채워서 꺼져 가는 불꽃을 다시 살려내듯이 命을 잇는 과정(涵油接命)이라고 한다.

 

그리하여 이미 거두어들여진 것들은 저절로 아무런 말썽도 일으키지 아니하고 한가롭게 모여 있으니, 깃털 하나 들어 올릴 힘조차도 쓰게 될 필요가 없게 된다. 이러한 과정을 두고 사람이 비롯된 근원을 이루는 기가 들어 있는 구멍을 의미하는 단전에 神이 편안히 있는 과정(安神祖竅)이요, 태어나기 이전부터 있었던 것들을 거두어들여서 모아 놓은 경지(翕聚先天)라고 한다. 그리하여 이미 그림자나 산울림 같은 것들이 모두 없어져 버리고 나면, 마음이 쓸쓸할 정도로 고요하면서 흩어짐 없이 한곳에 크게 머무르게 된다. 이러한 과정을 두고 마음이 丹田을 의미하는 기의 구덩이(氣穴)에서 겨울잠을 자듯이 웅크려 감추어져 있는 경지(蟄藏氣穴)요, 여러 가지 훌륭하고 묘한 것들이 모두 그것이 자라나온 본래의 뿌리로 들어간 경지(衆妙歸根)라고 한다.

 

이러한 빛을 돌리는 가르침을 배우고 익히는 과정은 하나의 마디 가운데에 세 가지 마디가 갖추어져 있다. 하나의 마디 가운데에 아홉 가지의 마디가 갖추어져 있는 이치도 있는데, 그러한 이치는 배우고 익힘을 계속하며 기다리노라면, 뒷날에 가서 저절로 그러한 이치로부터 우러나는 능력을 떨쳐 낼 때가 온다. 지금은 하나의 마디 가운데에 세 가지 마디가 갖추어져 있는 경우에 대하여 말한다. 그 사람의 본래 타고난 근원을 어머니의 뱃속에서 태아를 기르듯 기르는 과정(涵養)에 등라서 처음으로 변화와 움직임을 여의고 조용한(靜)때가 되면, 태어나기 이전부터 있었던 것들을 거두어들여서 모아 놓은 일(翕聚)도 역시 어머니의 뱃속에서 태아를 기르듯 기르는 일(涵養)로 되고, 마음이 丹田을 의미하는 기의 구덩이(氣穴)에서 겨울잠을 자듯이 웅크려 감추어져 있게 하는 일(蟄藏)도 역시 어머니의 뱃속에서 태아를 기르듯 기르는 일(涵養)로 되어 버리고, 뒤에 이르면 그러한 어머니의 뱃속에서 태아를 기르듯 기르는 일(涵養)이 모두 마음의 丹田을 의미하는 기의 구덩이(氣穴)에서 겨울잠을 자듯이 웅크려 감추어져 있게 하는 일(蟄藏)인 것이다.

 

그렇게 되는 가운데에  들어 있는 한 층의 과정은 그러한 이치로부터 미루어 알 수 있을 것이다. 있는 장소(處)를 바꾸지 아니하면서도 그 있는 장소가 여럿으로 나누어지니, 이러함을 두고 모습 없는 구멍(無形之竅)이라고 한다. 천개 만개 장소(處)가 결국 하나의 장소(一處)이다. 그 해당하는 시간(時)이 변경되지 아니한 채로 시간이 나눠지니, 그것들 두고 어떠한 시간적인 마디를 나눌 수 없는 시간(無候之時)이라고 한다. 태초에서 하늘과 땅이 갈라질 때로부터 시작하여 시간이 흐르면서 다시 돌고 돌게 되는 시간의 큰 마디 작은 마디들(元會運世)이 결국 하나의 순간인 것이다.

 

무릇 마음은 더 이상 조용할 수 없을 정도까지 변화와 움직임(動)을 여의고 조용해지지(靜極) 아니하면 움직일 수 없는 것인데, 움직이고 움직여서 함부로 움직이는 것은 본래의 바탕(本體)이 움직이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어떠한 일이나 물질을 느껴서 일어나는 움직임을 性에서 피어나온 욕심(欲) 이라고 한다. 만약 어떠한 일이나 물건(物)에도 느껴지지 아니하고 움직인다면, 곧 하늘의 움직임인 것이다. 그러하므로 어떠한 일이나 물질 때문에 움직이는 것은 性에서 피어나는 욕심(欲)이라는 것이며, 만약 어떠한 일이나 물건(物)에도 느껴지지 아니하고 저절로 움직이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하늘의 움직임 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마음이 하늘의 움직임에 의하지 아니하고 움직이는 경우에는 하늘(天)이라는 용어에 대립하여서 性이라는 용어를 쓰는데, 그 경우에 쓰이는 性이라는 용어를 설명하자면 결국 욕심(欲)이라는 용어에 떨어지게 된다. 욕심(欲)이라는 것은 어떠한 일이나 물건이 있는 곳(有物)에 있게 되는데, 이것은 그 있어야 할 자리를 떠나서 살피고 있는 생각(出位之思)이며 움직이고 또 움직인다. 하나의 생각도 일어나지 아니하면 곧 큰 길에서 벗어나지 아니하는 바른 생각(正念)이 생겨나니, 이것이 태어나기 이전부터 나를 주재하던 참되고 무의식 적인 뜻(眞意)이라는 것이다.

 

고요한 상태로 흩어짐 없이 한곳에 크게 머물러 있노라면 하늘의 기틀(天機)이 갑자기 움직인다. 아무런 생각이 없는데도 일어나는 움직임이 아니겠는가? 저절로 그러한 대로 놔두고 인위적인 요소를 없애며 배우고 익힌다.(無爲而爲)는 것이 바로 이 뜻이다. 이 章의 첫머리에 나오는 詩의 첫 두 구절은 황금 꽃(金華)의 모든 작용을 하나로 묶어서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 다음의 두 구절은 해(日)와 달(月)이 서로가 서로의 본바탕이 된다는 뜻이다. 한여름(六月)이란 곧 괘로는 離괘요 오행으로는 불(火)이다. 흰 눈이 날린다.(白雪飛) 는 것은 곧 離괘 가운데에 있는 陰爻에 해당하고 태어나기 이전 상태에서의 참된 음(眞陰)이 그 본래 있었던 상태인 坤괘로 되돌아가려고 하는 것이다. 한밤중(三更)이란 곧 괘로는 坎괘요 오행으로는 물(水)이다. 둥근 해(日輪)라는 것은 곧 坎괘 가운데에 있는 陽爻에 해당하는 하나의 양(一陽)이 이글거리며 그 본래 있었던 상태인 乾괘로 되돌아가려고 하는 것이다. 坎괘의 것을 가져다가 離괘에 채우는 일(取坎塡離)에 대한 가르침이 이 가운데에 들어 있다.

 

그 다음의 두 구절은 돌아가는 바퀴의 바퀴통과 같은 역할을 하고, 마음의 세계에서 북두칠성의 자루(斗柄)에 해당하는 것의 작용, 다시 말하면 빛(光)이 돌때에 올라가고 내려가게 되는 모든 기틀을 설명하고 있다. 물 가운데에서 숨을 쉬는 것이 아니겠는가? 거센 호흡을 가리켜서 巽괘로써 상징되는 바람(巽風)이라고 하는데, 그에는 눈길을 어떻게 가지느냐 하는 문제도 포함된다. 눈빛(目光)을 나의 몸의 坎괘에 해당하는 곳에 비추어 들어가서 太陽한 精을 끌어 모으는 일인 것이다. 하늘 위(天上)라는 것은 곧 나의 몸의 乾괘에 해당하는 곳이다. 하늘 위로 헤엄을 치듯 돌아갔다가 다시금 내려와서 유순하고 모든 것을 싣고 있는 땅의 공덕으로 먹여 키운다는 것은 곧 神이 氣의 가운데로 들어가는 것이고, 하늘이 땅속으로 들어가는 것이며 불을 기르는 것(養火)이다.

 

끝의 두 구절은 지극한 가르침(訣) 가운데 지극한 가르침이다. 지극한 가르침 가운데의 가르침이라는 것은 처음부터 끝까지 떨어져 있을 수 없는 것이다. 이른바 마음을 씻고(洗心) 생각을 털어 버린다.(滌慮)는 것으로서, 빛을 돌리는 가르침을 배우고 익히는 일 가운데에서 따뜻한 물로 머리 감고 몸 씻는 일(沐浴)에 해당한다. 聖人의 가르침을 배우는 일(聖學)은 먼저 그칠 곳을 아는 것(地支)으로 부터 비롯하여서 지극한 선(至善)에 그쳐 머무르는 것에서 끝나는데, 결국 끝없이 커서 무어라 말할 수 없는 우주 자연의 큰 근원(無極)에서 시작하여 다시 그 큰 근원(無極)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부처의 가르침에서는 “어떠한 곳에도 머무르지 않도록 하여서(無住), 그 마음 자체를 살리라(生其心)”는 것으로써 부처님과 여러 높은 스님들이 지은 불교경전(大藏敎) 가운데에서도 하나의 큰 가르침으로 삼고 있다. 우리가 따르는 가르침인 도교에서는 “텅 빈 상태에 이른다.(致虛)”는 말로써 性과 命을 닦는 모든 일을 모두 완성하고 있다. 이러한 세 갈래의 가르침(三敎)를 뭉뚱그리면 한마디 말에 지나지 아니하게 되는데 그것은 죽음을 벗어나서 삶을 보호하는 신령한 단(神丹)이라는 것이다.

 

신령한 단(神丹)이란 어떠한 것인가? 어떠한 곳 어떠한 경우에서든 언제나 마음의 움직임이 없는 것(無心)일 뿐이다. 우리가 따르는 가르침인 도교에서 가장 알기 어렵고 감추어져 있는 것은 머리 감고 몸 씻음(沐浴)이라는 것인데, 이 하나의 일을 온전하게 배우고 익히기 위하여서는 “마음을 아무것도 빌붙을 바 없도록 비우라(心空)”는 말만 가지고도 그 일을 다 이루어 마칠 수가 있다. 이제 한 마디의 말로써 가르쳐 주어서 막힌 벽을 깨뜨려 버렸으니, 이 일에 대한 확실한 가르침을 얻으려고 이 스승 저 스승을 찾아 몇 십 년을 헤매어야 할지 모르는 어려움을 줄일 수 있게 되었을 것이다.

 

그대들이 하나의 마디 가운데에 세 가지 마디가 갖추어져 있다는 말의 뜻을 잘 알지 못한 듯 하여, 佛家에서 말하고 있는 空觀. 假觀. 中觀이라는 세 가지 진리를 보는 입장에 비유하여 설명한다. 세 가지 진리를 보는 입장으로는 먼저 空觀이 있는데, 그것은 모든 사물을 모두 영원히 변하지 아니하는 본질을 가지고 있지 못하므로 빈 것(空)이라고 보는 입장이다.

 

다음으로는 假觀이 있는데 그것은 비록 그와 같이 빈 것(空)임을 알았다 하더라도, 모든 사물을 허물어 버리지 아니하고 그 빈 가운데 에다가 모든 것을 세워두는 입장이다. 또한 그와 같이 모든 사물을 허물어 버리지 아니하고 세워 두면서도 그 모든 사물에 빌붙지 아니하는 입장이 있으니 이것을 中觀이라고 한다. 모든 것이 비어 있다고 보는 空觀을 닦을 때에도 모든 사물은 허물어 버릴 수 없음을 알면서, 또한 그에 빌붙지도 아니하여야 하는데, 이러한 상태는 세 가지 입장을 아울러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결국에 가서는 그 보는 입장이 비었음을 깊이 깨달아 얻게 된다.

 

그러므로 空觀을 닦으면 空은 그대로 비어 있고, 假도 또한 비어 있고 中도 또한 비어 있게 된다. 모든 사물이 영원히 변하지 아니하는 본질이 없어 비어 있지만 허물어지지 아니한다는 假觀을 닦으면, 작용과 이용하는 방면에서 깊이 깨달아 얻는 바가 대부분을 차지하게 되니, 假는 그대로 허물어지지 아니하는 채로 있고, 空도 역시 허물어지지 아니하는 채로 있고, 中도 또한 허물어지지 아니 하는 채로 남아 있다. 中의 길을 갈 때에도 역시 모든 것이 영원히 변하지 아니하는 본질을 갖지 못하여서 비어 있다는 이치(空)을 그려보게 되지만, 사람들이 부르기를 空이라 하지 아니하고 中이라고 부르는 것이며, 비어 있으면서도 허물어 지지 아니한다고 보는 입장(假觀)을 가질 때에도, 역시 그것을 假라고 하지 아니하고 中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비었으되 허물어지지 아니한다고 보지만, 그에 빌붙어 있지 아니하는 中을 지키는 입장일 때에는 더 말할 필요 없이 中이라고 부른다.

 

내가 비록 때로는 離괘 하나만을 말하고 때로는 坎괘도 아울러서 말하였지만, 끝에 가서는 말 한마디도 움직여 옮겨 놓은 것이 없다. 이 가르침을 처음 말할 때에 “배우고 익히는 일에 있어서, 여닫이문의 지도리처럼 중요한 곳(樞機)은 두 눈(目)에 모두 들어 있다”라고 드러내놓고 말하였다. 이른바 문지도리(樞機)라는 것은 어떤 작용(用)이다. 그것(樞機)을 이용하여서 우주 자연의 운행 변화가 수레바퀴 구르듯 굴러 나간다는 것이지, 그 우주 자연의 운행 변화가 그것(樞機)에 머물러 있다는 말이 아니다.

 

여섯 가지의 감각 기관(六根)이나 얼굴의 일곱 구멍이 모두 빛(光明)이 갈무리 되어 있는 곳인데, 어찌 두 눈만 가지고 말하고, 다른 것은 모두 언급하지 아니하는가? 坎괘의 가운데에 있는 陽을 이용하면서, 離괘에 해당하는 곳의 빛(離光)을 이용하여, 그것을 비추고 끌어 모으면 다름 아니라 밝음이요, 해와 달의 합쳐짐(明)이 된다. 이름을 元育이라 하고 北宗의 법 파인 朱雲陽스승께서는 일찍이 “눈먼 사람은 진리의 길을 닦기에 마땅하지 아니하지만, 귀먹은 사람은 괜찮다”라고 말 하였는데, 나의 말과 조금도 다를 바가 없다.

 

특별히 그 主되는 것과 보조(輔)되는 것의 중요하고 중요하지 아니함 을 밝혔을 뿐이다. 해(日)와 달(月)은 근원에 있어서 하나의 물건으로 보아야 한다. 해(日) 가운데에 품어져 있고 어두운 부분이 참다운 달의 속 알맹이(精)이다. 달굴(月窟)이라는 것은 달에 있지 아니하고 해에 있다. 그렇기 때문에 달의 굴(月之窟)이라고 하는 것이며, 그렇지 않다면 그저 달(月)이라고만 하여도 충분할 것이다. 달 가운데에 있는 흰 부분이 참다운 해의 빛이다. 햇빛(日光)은 오히려 달 가운데에 있다. 그렇기 때문에 하늘의 뿌리(天之根)라고 하는 것이며, 그렇지 않다면 그저 하늘(天)이라고만 하여도 충분할 것이다. 하나의 해와 하나의 달로 나누어 버리면, 각각 반개씩에 그치게 되고, 합 하여야만 한 개의 온전한 덩어리로 이루어진다. 마치 홀아비와 홀어미가 각각 홀로 살면 가정을 이루지 못하지만, 지아비와 지어미가 되고 나면 하나의 가정이 완전해지는 것과 같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물건에 있어서는 꼭 사람의 경우와 같다고 말하기 어려우니, 지아비와 지어미가 나누어져 버려도 완전히 잃어버리는 것이 아니라, 두 개의 사람으로 남아 있게 되지만 해와 달이 나누어져 버리면 온전한 덩어리를 이루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이치를 안다면 눈과 귀의 관계도 그와 비슷하다는 것을 알 것이다. 내가 눈이 먼 사람을 말할 때에는 귀도 이미 없는 경우이며, 귀가 먼 사람을 말할 때에는 눈도 이미 없는 경우이다. 이와 같은 이치로 사물을 보게 되면 어떠한 하나의 물건을 말하거나, 어떠한 두 개의 물건을 말하거나, 여섯 가지 감각 기관을 말하거나 간에 같은 이치를 적용할 수 있게 된다.

 

여섯 가지 감각 기관(六根)을 말할 때에는 그 여섯 가지 감각 기관이 전체로서 하나의 감각 기관(一根)이 되는 것이며, 얼굴에 있는 일곱 구멍(七竅)을 말할 때에는 그 일곱 구멍이 전체로서 하나의 구멍(一竅)이 되는 것이다.

 

나의 말은 그 말이 무엇에 대한 것이든 다만 그 서로 통하는 곳만을 뚫어서 드러내놓는 입장에서 그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둘(兩)이라는 것을 보지 아니하는데, 그대들은 오로지 그 서로 가로막혀 있는 곳에만 달라붙어 있기 때문에 곳과 경우에 따라서 보는 눈빛(眼睛)을 다르게 바꾸어 버리곤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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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태을금화종지 한글번역본 출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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