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탠저 Ⅱ 분화의 개념

by devascenter posted Mar 19,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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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탠저 Ⅱ 

분화의 개념




1. . . . . 건설자들, “만반타라”의 새벽에 반짝이는 자식들은 어디에 있었던가(a)? . . . . 그들의 “아-히(Ah-hi)”적(초한, 디야니-붓다의) “파라니쉬판나(Paranishpanna)”의 미지의 암흑 속에, 세계의 근원인 무형체(아루파arūpa)에서 형체(루파rūpa)를 만드는 자들, 즉 “데바마르티(Devamārthi)1)”와 “스바바바트(Svabhavat)”는 비존재 상태의 지복(至福)속에서 휴식하고 있었다(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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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신들의 어머니” 즉 아디티(Aditi) 혹은 우주 공간. 조하르(Zohar)에서 그녀는 세피로트의 어머니 세피라(Sephira)와 원초적인 형태의 쉐키나(Shekinah)라고 불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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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건설자들”, “만반타라의 밤이 끝나는 새벽의 자식들”은 우주의 진정한 창조자들이다. 그리고 우리의 혹성계만을 취급하는 이 가르침에서는, 그들은 혹성계를 만들어 가는 건축가로서 일곱 천체의 감시자라고 말하기도 한다. 일곱 천체란 현교적으로 말한다면 7혹성이고, 비교적으로 말을 한다면 일곱 개의 지구, 즉 우리 지구체인이기도하다. 스탠저Ⅰ의 첫 번째 절에서 언급한 7개의 영원은 마하-칼파, 즉 브라흐마의 대시대에 해당하며 또 태양의 프랄라야(Pralaya)와 뒤이어 우리의 혹성계가 보다 더 높은 세계에서 부활하는 것에도 해당된다. 많은 종류의 프랄라야(눈에 보이는 것의 소멸)가 있다. 이에 대해서는 다른 곳에서 설명할 것이다.

(b) 파라니쉬판나는 최고의 선, 즉 절대자인 것이다. 따라서 파라니르바나와 똑같은 것임을 기억하라. 절대자의 완성의 성질은 구극(究極)의 상태에 있는 것이고, 그것은 그의 계에 있어서 유일한 절대진리 (파라마르타사트야Paramārthasatya)외에는 어떤 것들과도 관계해있지 않는 주관성의 상태 바로 그것이다. 절대 존재로 되어있는 비존재의 완전한 의미를 바르게 이해시키는 상태인 것이다. 조만간에 외형적으로 존재하는 모든 것은 실제에는 파라니쉬판나의 상태에 있게 될 것이다.

 

그러나 의식적으로 “있는 것”과 무의식적으로 “있는 것”사이에는 커다란 차이가 있다. 파라마르타, 즉 자기분석을 해내는 의식(스바삼베다나Svasaṃvedana)이 없는 파라니쉬판나의 상태는 지복의 상태가 아니고, (7개의 영원 동안) 단순한 소멸에 불과한 것이다. 이와 같이, 불타버릴 것처럼 뜨거운 태양광선 아래 놓여있는 쇠뭉치는 뜨거워지지만 그 열기를 느끼거나 인식하지 못한다. 하지만 사람은 그 열기를 느낄 수 있다. 사람이 개체로서의 존재를 끝맺고, 절대자 2)에게로 녹아 들어가서 일체가 되어 계속하여 파라마르타를 완전히 소유해 가는 것은, 바로 “투명하고 맑으며 자신의 개성에 의해 어두워지지 않은 마인드의 집합적 전체(살아있고 지각이 있는 전우주)에서 많은 윤회를 거쳐 쌓아온 공덕(功德)”에 따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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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그러므로, 비교철학(秘敎哲學)에서 비존재는 절대적 존재이다. 비교철학 강령에서는, 아디-부다(Adi-Budha, 원초의 지혜)일지라도, 현현하는 동안에는 어느 의미에서는 마야 즉 환영인 것이다. 왜냐하면, 브라마를 포함해서 모든 신들은 “브라흐마의 시대”가 끝나는 무렵에 죽어야 하기 때문이다. 파라브라훔(Parabrahm)이라는 추상개념만이 (그것을 엔소프(Ensoph)라고 말하거나 허버트 스펜서의 알 수 없는 존재라고 말하든지 간에) “유일 절대”적 실재인 것이다. 유일무이의 존재는 아드와이타(ADWAITA)(그 뜻은 “둘째는 전혀 없다”라는 의미이다)이며, 나머지 전부는 마야라고 아드와이타 철학을 가르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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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 . . . 침묵(정적)은 어디에 있었던가? 그것을 지각할 귀가 있었는가? 없었다! 침묵이나 소리도 없었다(a). 자기 자신을 알지(의식하지) 못하는, 끊임없이 이어지는 영원한 숨(운동) 밖에는 아무 것도 없었다(b).

(a) 사물은 없어져도, 여전히 실재한다는 생각은 동양 심리학에서는 기본적 개념중 하나이다. 이러한 언어의 명백한 모순 속에, 대자연의 진실이 있다는 것이다. 그 사실을 나타내는 언어의 모순에 관해 의론하기보다는, 오히려 마음속에서 그 사실을 깨우치는 것이 더 중요하다. 이와 같은 모순으로 잘 알려져 있는 예는 화학적 결합이다. 수소와 산소가 결합하여 물이 되었을 때, 수소와 산소의 존재여부는 아직도 의론의 여지가 있는 문제이다. 어떤 사람들은 물이 분해되어버리면, 또다시 수소와 산소로 되어 원모습이 되돌아오기 때문에, 두 원소가 계속 물 속에 있는 것이 틀림없다고 주장하고, 다른 사람들은 수소나 산소가 실제로 전혀 다른 것으로 되어 버렸으니까, 일시적으로 이 둘은 없어진 것이 틀림없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어느 쪽도 이미 다른 것이 되어버렸지만, 그 자체로서 계속 존재하는 것의 진정한 상태에 대해서는 조금도 이해를 못하고 있다. 물로서의 존재는 산소나 수소에 있어 기체로서의 존재보다는 “더 진실한 존재”인 비존재의 상태라고 말할 수가 있다. 그래서, 이것은 “브라흐마의 밤”에 우주가 잠자리에 들고, 즉 존재하지 않게 되고 새로운 만반타라의 새벽에 우주가 다시 존재하게 될 때 다시 깨어나는 우주의 상태를 막연하게나마 상징한다.

(b) 유일의 실재의 “숨(Breath)”은 태고의 비교에서는 우주발생론의 영적인 면에만 적용되어 사용되었다. 그렇지 않을 경우, 물질계에서는 같은 의미인 운동(Motion)으로 대체되었다. 유일의 영원한 원소 즉, 여러 원소를 포함하고 있는 매체는 어떠한 차원도 없는 공간이다. 그리고 끝없는 계속과 원초의(따라서 불멸의) 물질과 운동(말하자면 “유일“의 원소의 숨인 절대적 “영속운동(永續運動)”)은 공간과 공존한다. 이미 말한바있듯이, 이 숨은 프랄라야(긴 휴식의 밤)의 영원(永遠) 동안에도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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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SD1권 2부 "혼돈, 신, 코스모스"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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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역시 “유일한 실재의 숨”은 유일의 원인 없는 원인, 즉 “전유성(全有性, All Be-ness)"(브라흐마, 즉 우주인 전존재<全存在, All-Being>와 완전히 대조를 이룬다)에는 해당하지 않는다. 브라흐마(또는 하리<Hari>) 즉, 바다에서 지구를 끌어올린 후에 “창조를 해냈다”는 네 가지의 얼굴을 가진 신은, 수단으로서의 원인일 뿐이고, 학자들이 표시했던 것 같은 최고의 원인은 아니다. 창조를 언급하는 푸라나(Purana)의 문절(文節)의 진정한 뜻을 완전히 이해한 동양학자는 지금까지 없는 것 같다.


이 문절에서 브라흐마는 창조의 일을 하기 위해 후일에 생성되어지는 것들의 잠재력의 원인이다. “그리고 여러 잠재력이 진정한 원인이 되고 난 후에, 그로부터 그것들이 나온다.”4) 라고 번역자는 말하지만, “그리고, 그것에서 잠재력이 나온다. 그것들은 물질계에서 진정한 원인이 되어가면서 차츰 창조 될 것이다”라고 말하면 아마 좀더 정확할 것이다. 그 유일한 (원인 없는) 이상적 원인이외에, 세계의 원인이 되는 다른 것은 없다. “수행자들 중에서도 가장 존귀하신 분이시여! 그런 잠재력을 통하여, 즉 그 원인의 잠재력을 통하여, 모든 피 창조물은 생득의 혹은 고유한 성질을 얻었음이라.” 베단타학파와 니아야(Nyāya)학파에서 니미타(nimitta)가 물질적 원인인 우파다나(upādāna) (그리고 상키야<Sānkhya> 철학에서는 프라드하나<pradhāna>는 양자의 기능을 모두 의미한다)와 대조되는 동인(動因)이라면, 이러한 여러 가지의 체계를 조화시키는 비교철학에서 그리고 (아드바이타<Advaita> 베단타학파에 의하여 가장 가깝게 설명되고 있는 것으로서의) 베단타철학에서 우파다나만 사색할 수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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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비쉬누 푸라나」 1권 1장 5절 윌슨 영역 1권, 66p, 프이쉬토와도. 홀에 의한 각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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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쉬나바 학파(비시쉬타드바이틴스Viśishṭādvaitins) 사람들의 마음속에 실제(파라브라흐만과 이수바라Īśvara)와 대비되는 이상으로서 존재하는 것은 널리 알려진 추측 안에는 있을 수가 없다. 왜냐하면 인간의 이성, 아니 아데프트의 이성으로도 생각이 미칠 수 없으며, 이상이라는 그 말조차도 잘못된 용어이기 때문이다.


자기 자신을 알려면 인식될 수가 있는 의식과 지각력이 필요하다. (파라브라훔 외의 어떠한 것도 의식이나 지각력이 제한 받고있다.) 따라서 “스스로를 모르는 영원한 숨(Eternal Breath)”이라고 말을 하는 것이다. 무한은 유한을 알 수가 없다. 무궁한은 제한된 것과 조건이 붙여진 것들과 관계를 가지는 일은 없다.


오컬트의 가르침에서는 미지이며 불가지인 운동자, 즉 자존자는 절대적 신성의 본질이다. 그러므로 절대 의식이고, 절대 운동인 것이므로, 묘사할 수 없는 이것을 묘사하는 사람들의 제한된 감각에는, 그것은 무의식이며 부동(不動)인 것이다. 추상적 의식의 속성이 구체적 의식이라고 결코 말할 수 없다. 그것은 물의 속성이 습성(濕性)이라고 말할 수 없는 것과 같다. 습성은 물 자체의 속성이며, 다른 물체를 축축하게 하는 원인이다.

 

의식이란 제한과 조건을 내포하고 있다. 말하자면, 의식의 대상과 의식의 주체를 전제로 한다. 그러나 절대의식은, 인식하는 자, 인식되어지는 것들, 인식력을 포함하고 있으며, 셋이 전부 절대의식 속에서는 하나이다. 특정한 순간에 자신의 마음에 떠오르게 되는 부분 이상을 사람은 의식하지 못한다. 언어의 표현력이 아주 빈약하기 때문에 생각을 일으킬 수 없지만, 현재 적극적으로 생각해 보지 않은 지식과 기억을 해낼 수 없는 지식을 구별할 수 있는 용어가 우리에게는 없다. 그렇다면 잊어버린다는 것과 기억하지 않고 있다는 말은 같은 뜻으로 되고 만다. 이와 같은 간단한 구별을 표현하는 것이 어렵다면, 추상적 형이상학의 사실이나 차이점을 묘사하거나 구별하는 용어를 찾아내는 것이 더욱 더 어려운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또 우리들은 눈에 보이는 외형에 따라 명칭을 붙이고 있다는 것을 유의해야 한다. 우리의 유한한 이해력으로는, 절대자는 전혀 이해할 수 없는 것으로 생각되기 때문에 절대자를 암흑이라고 부르는 것과 같이, 절대의식도 틀림없이 그렇다고 생각해 버리기 때문에 절대의식을 무의식이라고도 말한다. 그러나, 우리가 그렇게 인식하는 것은 공정하지 못함을 우리들은 충분히 인정하고 있다. 예를 들면, 무의식적 절대의식과 단순한 무의식을 우리들의 마음속에서는 자신도 모르게 구별을 하고 있다. 다시 말해, 자신의 의식에 상응하고 있지만, 자신의 사고로서는 도달할 수 없는 고급계에서의 뭔가 명확하지 않은 특성을 무의식적 절대의식에 속해 있는 것으로 구별하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우리들이 무의식이라고 생각하는 것과 구별될 수 있는 그러한 의식은 아니다.



3. 때는 아직 맥동치지 않았다. 광선은 아직 씨눈(原子)속으로 섬광과 같은 번쩍임이 없었다(a). “마트리파드마(Mātripadma, 어머니 연꽃, 형체를 만드는 원초재료)”는 아직 부풀어 올라오지 않았다(b).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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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부풀어오른다는 것은 시적인 표현은 못되나, 대단히 실제적인 표현이다.(스탠저Ⅲ의 각주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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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영원한 어둠(闇)”에서 광선이 방사될 때 눈부신 빛, 즉 생명이 되어, 씨눈(Germ) 속으로 번쩍인다. 씨눈(배종)이란, 세계창성란 안에 있는 점(point)이다. 이 세계창성란(세상의 알)은 추상적인 의미의 질료로 표현되다. 그러나 점은, 공간 안의 어느 특정한 점에 해당하는 것으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 모든 원자(原子)의 중심에는 씨눈(germ)이 하나 존재하고 있으며, 이 씨눈들의 총합이 집합적인 배종(Germ)을 구성한다. 또는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다. 원자는 우리의 육안에 보이지 않으므로, 원자의 집합체(만약, 이 용어를 무한하고 무궁한 어떤 것에 붙일 수 있다면)는 영원불멸한 물질의 원체를 형성한다.

(b)자연계에 있는 이중적 창조력(물질계에서는 물질과 힘)을 상징하는 형상의 하나는 파드마(Padma) 즉, 인도에서의 연꽃이다. 연꽃은 열(불)과 물(수증기 또는 에테르)로 만들어진다. 모든 철학과 종교 체계에서, 불은 신의 영6)의 상징으로 적극적, 남성적, 생식적 원리를 나타내며, 에테르 즉, 물질의 혼, 불의 빛은, 이 우주의 모든 것들이 발산되어 나오는 근원인 수동적 여성원리를 상징한다. 따라서 에테르 또는 물은 어머니이고 불은 아버지이다.

 

죤스(W. Jones)경(과 그 이전의 고대식물학)은 연꽃의 씨앗은 발아하기 전에도 완전한 형태를 갖춘 잎(葉)을 담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언젠가는 완전한 식물로서 성장하게 될 조그만 모습을 품고 있음을 표시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자연은 자신의 창조물을 미리 형성한 견본을 보여주고 있다. . . . 고유한 꽃을 피우는 모든 현화식물(顯花植物)은 이미 다 만들어져있는 조그만 맹아(萌芽)의 식물을 감추고 있다.7)  “어머니는 아직 봉우리가 부풀어오르지 않았다”라고 하는 문장은 이것으로 설명된다. 이처럼 고대 상징에서는 형체보다도 내적 개념, 즉 근본적 개념이 중요시되었다.


게다가, 연꽃(파드마)은 코스모스 자체와 인간을 상징하는 대단히 오래되고, 옛부터 즐겨 쓰는 상징이기도하다. 그렇게된 주된 이유는, 첫째 앞에서 말했지만 연꽃의 씨앗은 미래의 연꽃의 완전한 축소판을 자신의 내부에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만물의 영적 원형들이 지상에 물질화 되기 이전에 영적인 세계에서 존재하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두 번째 이유는 수련은 물에서 성장하여 물위로 올라오는데, 뿌리는 일루수(Ilus) 즉 진흙 안에 두고, 높이 솟아 공중에서 꽃을 피운다는 사실 때문이다. 이렇게 해서 수련은 인간의 생명과 우주의 생명을 상징하고 있다. 씨크릿 독트린에서는 우주와 인간의 생명은 같은 것이고, 모두가 같은 방향으로 진화해 가고 있다고 가르친다. 진흙 속에 뻗어 내린 수련의 뿌리는 물질생활을 나타내고, 물을 통해 위로 솟은 줄기는 아스트럴계에서의 존재를 상징해주고 있다. 그리고, 물위에 떠서 하늘을 향하여 핀 꽃은 영적 존재를 상징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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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크리스트에서조차도 (SD-1권 2장 3부 “원초의 질료와 신비한 생각” 참조.)

7)그로스(Gross) 저 「이교」1856년 159p와 각주.SD-1권 2부 8장 “보편적 상징으로서의 연꽃”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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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마트리파드마(원초의 형체)의 하트(heart)는 하나의 광선 속으로 들어가 셋이 넷으로 되는 것처럼, 마야의 무릎에 떨어져 나가기 위해서는 아직 때가 일러서 열려지지 않고 있었다(a).

(a) 원초의 질료는 우주창조 전의 잠재상태에서 아직 분화된 객관적 실체로 되지 않았으며, (아직 인간이) 볼 수가 없는 과학에서 말하는 원시물질(Protyle)로도 되지 못했다. 그러나, 때가 이르러 신성한 생각(로고스 또는 아니마 문디, 즉 알라야의 남성적 측면)이 포하트에 의해 원초적 질료에 인상이 새겨지게 되면, 그의 하트(heart)는 열린다. 그렇게 되면 원초적 질료는 분화하여 셋(父. 母. 子)은 넷으로 변화된다. 여기에 삼위일체와 처녀회태(懷胎)라는 이중적인 신비가 있다. 오컬티즘의 제 1교의(敎義)이자 기본적인 교의는 세 가지 측면에서의 우주적 통일(동질성)이다. 이로 인해 신성에 대한 개념이 가능하게 된다. 하나의 절대적 동일체로서의 신성은 유한한 지성으로서는 영원히 이해할 수는 없다.

만약, 그대가 식물의 뿌리 안에서 작용하고 있는 신성한 힘을 믿거나, 흙 속에 있는 뿌리를 상상하고자 하면, 줄기나 밑둥과 잎이나 꽃에 관하여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러한 것을 제쳐두고서는, 뿌리 안에서 작용하는 그 힘을 상상 할 수 없을 것이다. 생명은 생명나무에 의해서만이 알 수 있다.”8) 

가령, 절대 일체성을 포함한 구체적인 것들이 우리 눈앞에 있지 않는다면, 절대적 일체성의 개념은 우리들의 개념작용 안에서 완전히 사라지고 말 것이다. 또 신성은 절대적이므로 편재해 있기 때문에, 하나의 원자라도 자체 속에 신성을 포함하고 있지 않는 원자는 없다. 뿌리, 밑둥, 줄기의 셋은 서로 다르나 하나의 나무를 이룬다. 카발라 학자는 말한다. “신은 하나인 것이다. 신은 무한이기 때문이다. 신은 삼중적이다. 왜냐하면 늘 현현해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현현은 삼중적인 면이 있다. 왜냐하면,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했던 것처럼 자연의 모든 것은 구체적인 것이 되기 위해, 세개의 원리 즉 결여된 상태와 형체 그리고 질료가 필요하기 때문이다.9)


 그 위대한 철학자가 사용한 결여(缺如)라는 말은 오컬티스트에게는, 아니마 문디의 가장 낮은 계이자 세계인 아스트럴광 안에 새겨진 원형을 의미한다. 이 세 원리의 합일은 제 4원리, 즉 우리의 의식으로 이를 수가 없는 존재의 정점으로부터 방사되어 현현된 모든 존재계들에 편만하게 존재하는 하나의 에센스가 된 생명에 의존한다. 그리고 이 사중체(아버지, 어머니, 자식은 동일체이며, 그리고 사중체는 살아있는 현현물이다)는 처녀회태라는 아주 고대의 개념을 형성하였는데, 상식의 범주를 완전히 벗어나는 이 형이상학적 개념은 크리스트 교회에 의해 세속화되어 그들의 도그마로 결국 굳어져버리고 말았다.

 

카발라를 통해 수(數)를 활용하는 해석법을 연구해보기만 하면, 그 도그마의 근원을 쉽게 발견해낼 수가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순전히 천문학적이고, 수학적이며, 특히 형이상적인 것이다. 자연계의 남성적 요소(이것은 남신들과 로고스들―비라즈<Virāj>나 브라흐마 그리고 호루스<Horus>, 오시리스<Osiris>로 의인화되었다)는 때묻지 않은 원천(인격화된 “어머니”로서 표현된다)에게서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그 원천을 통해서 태어난다. 왜냐하면 어머니를 가진 그 남성은 “아버지”를 가질 수는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추상적인 신은 남성이나 여성의 구분이 없고, 현현한 상태의 한 존재(a Being)도 아니며, 추상적 존재(Be-ness) 즉 생명 그 자체다.


「측정의 기원」이란 책을 쓴 사람의 수학적인 언어로 이것을 표현해보자. “인간의 척도”와 그의 수치적인(카발라적) 값에 대해서 언급하면서, 그는 「창세기」4장 1절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썼다.

그것은 “인간 심지어 여호와(Man even Jehovah)” 척도라 불리며, 다음과 같이해서 얻어진다. 즉, 113 × 5=565. 그리고 수치 565는 56.5 × 10= 565로 표현되다. 여기서 인간의 수(數) 113은 56.5 × 10의 인수로 되는데, 56.5×10을 카발라적으로 읽으면 요드, 헤, 바우, 헤(Yōd, He, Vau, He) 즉, 여호와(Jehovah)인 것이다. ....... 565를 56.5×10으로 풀어 펼치는 것은, 여성(Eva)원리부터의 남성(Yod)원리가 발산되어 나오는 것을 표시하기 위해서이다. 말하자면, 때가 묻어있지 않은 하나의 근원에서부터 하나의 남성원소(男性元素)의 탄생을 표시하고 있다. 언어를 바꾸어 말하면 처녀회태인 것이다.10) 

성자들에 의하면, 신성한 세계에서 일어났던 신비는 지상에서 그대로 반복된다. 무원죄(無原罪)의 천상의 동정녀(미분화된 우주원질 즉 무한 상태의 질료)의 자식은, 지상의 이브(Eve) 즉 우리의 어머니 대지의 자식으로서 지상에 다시 태어난다. 그리고 전체적으로 볼 때 과거, 현재, 미래의 전 인류가 된다. 왜냐하면 여호와 즉 Yōd-he-vau-he는 양성(兩性)적이기 때문이다. 위에서 볼 때 그 자식은 우주 전체이며, 아래에서 볼 때 전 인류가 된다. 삼개조(三個組) 즉 삼각형이 지상에서는 텍트라틱스(Tetraktis), 피타고라스의 신성한 수, 완벽한 사각형과 6면체가 된다.


매크로프로소푸스(Macroprosopus, 큰 얼굴)는 이제 마이크로프로소푸스(Microprosopus, 작은 얼굴)가 된다. 또한, 카발라 학도들이 언급하는 것처럼, “날들 중 고대자(the Ancient of Days, 태고적부터 계신 이)”는 아담 카드몬으로 하강하여, 아담 카드몬을 자신이 현현 매체로 하여 테트라그라마톤(Tetragrammaton)으로 변화한다. 매크로프로소푸스는 지금, “마야의 무릎” 즉 대환영 안에 있으며, 자신과 실재 사이에는 아스트럴광이 있다. 파라마르타사트야(Paramārthasatya)를 통한 지식으로써 벗어나지 않으면, 아스트럴광은 인간의 제한된 감각을 크게 속이는 자로 알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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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요기의 금언

 

9)비시쉬타드와이타(Visishitadwaita)의 베단타 학도는 유일한 독립된 실재인 파라브라맘(Parabrahmam)은 그의 삼위일체와는 분리되어 있지 않지만, 그는 셋으로, “파라브라맘과 치트(Chit)와 아치트(Achit)”인데, 치트와 아치트는 서로 떨어져 존재할 수 없는 종속적 실체라고 말한다. 더 확실히 말하면, 파라브라맘은 변화하지 않고, 영원하며, 지각할 수 없는 실재이며, 치트(아트마)와 아치트(아나트마)는 그의 특성인 것과 같다. 형과 색이 물건의 특성이듯이, 이 둘은 파라브라맘의 옷이나 몸, 그것보다는 오히려 속성(Sarira)이다. 그러나 오컬티스트와 아드와이티 베단타 학도는 여러 가지 점에 있어 이 주장에 반대할 것이다.

 

10)스기나저 「측정의 기원」 159p 195p 277p 에서의 대요(편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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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일곱 (자식)들은 그 빛의 망(網)에서 아직 태어나지 않았다. 암흑만이 아버지-어머니 즉 스바바바트(Svabhabat)였다. 그리고 스바바바트는 암흑 속에 있었다(a).

(a)씨크릿독트린의 우주발생론에서의 스탠저에는 주로, 우리의 태양계에 관한 일과 특히 우리의 혹성체인의 일을 설명하고 있다. 그러므로, “일곱 자식들”은 혹성 체인의 창조자인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뒤에 가서 좀 더 자세히 설명될 것이다.11) 

스바바바트, 우주를 가득 채우고 있는 “가소성 원질(Plastic Essence)”은 만물의 근원이다. 스바바바트는 말하자면, 힌두 철학에서 물라프라크리티라고 말하는 그 추상개념을 불교에서 구체적으로 본 측면이다. 그것은 혼의 체이고, 체와 혼과의 관계는 에테르와 아카샤(Ākāśha)의 관계에 상응한다. 왜냐하면 아카샤는 에테르에 생명을 불어 넣어주는 원질이기 때문이다. 중국의 신비가들은 스바바바트를 존재와 동의어로 보았다.


중국인들이 ‘Yih-shu-lu-kia-louen'이라고 부르는 용수(龍樹)의 에카슬로카-샤스트라(Ekaśloka-Śhāstra)에서는, 원어 유(Yeu, 有)는 “존재(Being)” 혹은 “수바바(Subhāva)” 즉 “스스로에게 실질을 부여하는 실질”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그는 “행함 없이 행위함”, “그 자체의 성질이 없는 성질”을 의미하는 것으로 설명한다. 스바에서 스바바바트가 왔는데, 스바는 두 개의 단어로 구성되어있다. “수(Su)는 “아름다운,” “훌륭한,” “좋다”이고, 바바(Bhāva)는 “존재” 또는 “존재의 상태”라는 의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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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SD1권 2부 12장 “창조신들의 계보”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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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이 둘은 씨눈이며, 씨눈은 하나이다. 우주는 아직 신성한 생각과 신성한 가슴속에 숨겨져 있었다.

“신성한 생각”은 하나의 신성한 사고자라는 개념을 포함하고 있지는 않다. 유한한 생각에 의해 표현되는 인간적이고 한정된 개념인, 과거, 현재, 미래의 우주뿐만 아니라 과거와 미래가 하나의 영원한 현재 속에서 응결되는 전체 즉 (번역할 수 없는 용어인) 사트(Sat), 절대적 실재로서의 우주는 이차적 혹은 현현한 어떤 원인에 반영된 신성한 생각 바로 그 자체이다. 파라셀수스의 미스테리움 마그넘(Mysterium Magnum)으로서 브라흐마(中性)는 인간의 마음에는 완전히 신비인 것이다. 남성-여성인 양성의 브라흐마는, 그의 한 측면이자 의인화된 반영으로서는 맹목적 신앙의 인식대상으로 지각될 수 있지만, 인간의 지성이 충분히 발달하게 될 때 지성은 이를 거부한다.12)
  
그래서, 창세 드라마의 서막동안, 또는 우주진화의 시초에, 우주 즉, 자식은 아직 “신성한 생각” 속에 숨어 있다. 왜냐하면 신성한 생각은 아직 “신성한 가슴속으로” 들어가지 않았기 때문이다. 바로 이 개념이 본래 의미하는 것이며, 동정녀들에게서 태어난 “신의 자식들”에 관한 모든 우화의 근원이라는 것을 잘 유념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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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SD 1권 2부 3장 “원초의 질료와 신성한 생각”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