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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을금화종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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問 : 태어나기 이전의 배움은 마음이고, 태어난 뒤의 배움은 발자국이 있는 것인 줄 압니다. 윤회輪廻를 면하고자 한다면, 반드시 모습없는 것을 좇아서 배우고 익혀야 되지 않겠습니까?

 

答 : 모습없는 것을 좇아서 배우고 익히겠다고 하는데, 그렇다면 결국 어떻게 하여야 된다는 것이냐?

   변화와 움직임을 여읜 조용함[靜] 가운데에서 얻을 수 있다고 말할 것이나, 그렇다면 변화와 움직임[動]은 잃어버릴 것이다.

   변화와 움직임[動]을 잃게 되는 그 까닭을 알아내지 못하면, 변화와 움직임을 여읜다[靜] 할지라도 얻는 바가 없을 것이다.

   변화와 움직임을 여의고도[靜] 얻는 바가 없고, 움직이게 되면 잃어버리고 한다면, 어떻게 하더라도 진리에 이를 수 없을 것이다.

   그대가, 모습이 있는 것보다 위에 있는 것을 말하였는데 그것은 말이 끊어진 말이요, 마땅히 그러하여야 하는 것들이기는 하지만, 그것이 그렇게 되는 까닭을 알지 못한다면 현재 실제로는 발자국이 있는 경지에 머물러 있어서 그것을 벗어나지 못하면서 발자국 없는 것만을 찾는 어리석음에 빠지게 된다.

   발자국이 있는 경우이든 없는 경우이든 길을 잃고 헤매이게 되는 경우에는 천리 바깥까지 벗어날 것이다. 그러나 깨닫게 된다면 하루아침에 이루어질 것이다.

 

 

問 : 어떠한 경우를 두고 발자국이 있으면서 발자국이 없는 것만 찾는 것이라고 합니까?

 

答 : 참으로 부질없도다. 사나이가 예쁘고 아름다운 것을 배우고, 묘한 것 속에서 또다시 향기로운 것을 찾으니, 모조리 한쪽으로만 치우치게 될 뿐, 바르고 치우침이 없는 가운데에 또다시 바르고 치우침이 없음을 알지 못하는구나.

   아무런 실마리도 일어나지 아니하는 곳, 그곳이 참다운 진리요, 우리의 가르침[眞玄]인 것이다.

 

 

問 : 어떻게 하여야 마음이 변화와 움직임을 여의게 됩니까?

 

答 : 일이나 물건마다 하나하나 분석하여 파고들면 어렵고, 순간순간마다 보존하면 쉬워진다. 보존이라는 것은 그 마음을 보존하는 것인데, 마음이 보존되면 주재함이 있게 되고, 주재함이 있게 되면, 일과 물건을 다스릴 수 있게 되는 것이다. 한번 제대로 되느냐, 아니면 한번 잘못되느냐 하는 데 따라서 하늘이냐 사람이냐 하는 것이 갈라지고, 어진 이가 되느냐 어리석은 이가 되느냐가 결정된다.

   가볍게 볼 수 없는 것이다.

   다만 마음을 보존하는 것은 끊어지기도 쉽고 잇기도 쉬운데 보존하기를 오래도록 하면, 저절로 틈이 없어지고, 틈이 없어지면 이어지고, 이어지면 빛이 밝아지고, 빛이 밝아지면 기氣가 가득찬다. 기氣가 가득 차면 마음이 어두움에 빠지거나 흩어지는 일을 굳이 없애려고 하지 아니하여도 없어진다.

   아! 하늘 아래의 일로서 이 일보다 큰 것이 있는가!

   나머지 것들은 모두 끄트머리들이다.

   온갖 일로 바쁜 가운데에서도 보존함을 지키면, 모든 일 가운데 하나의 진리가 쭉 통하게 된다.

   이 짧은 구절의 말을 몸으로 배워 익히지 아니하고는 끝내 성인聖人의 나라에 들어가기 어렵다.

 

 

問 : 빛을 돌려 되비춘다는 것을 묻습니다.

 

答 : 비추지 아니하면 어떻게 보이겠는가?

   뗏목이 아니면 건널 수 없지만 건너는 것은 건너는 것이고 뗏목은 어디까지나 뗏목이다.

   뗏목을 본다고 하여서 보는 것이 뗏목일 수 없고, 건널 줄 안다고 하여서 아는 것이 건너는 것일 수는 없다.

   빛을 돌리는 것은 눈으로 돌리는 것이 아니고, 마음으로 돌리는 것이다. 그렇기는 하지만 마음은 곧 눈인지라, 오래도록 빛을 돌려서 신神이 한곳에 엉기면[凝神], 마음 자체를 볼 수 있고 눈도 밝아진다.

   겪어보지 아니한 사람은 이러한 경지를 말하기 어렵다.

   닫힌 것을 열지 아니하고, 오히려 집착하는 폐단은 자세하고 텅 비게 배우고 익혀서 그 효험을 몸으로 겪어보지 아니하기 때문에 생겨난다.

   그리고 마음을 살피고 구멍[竅]을 깨닫게 되면 그 속에 깔끔한 속 알맹이[精]를 생겨나게 할 수 있는데, 깔끔한 속 알맹이[精]는 조금이라도 엉기면 나타나게 된다.

   그렇게 되면 진리의 길로 들어가는 관문[玄關]과 구멍[竅]의 묘한 이치가 나타나게 되고, 몸으로 직접 배우고 익혀서 깨닫는 일이 그 효과를 보게 된다.

   그렇지 못하면 모든 것이 아득하고 먼 구름 잡는 이야기에 지나지 아니한다.

   눈동자를 모아서 배꼽 아래를 보는 것은 아직도 바깥을 닦는 일에 지나지 아니하고, 내면의 세계를 닦아서 마음의 눈이 생겨야 비로소 참다운 단전丹田이라고 할 수 있다.

   기氣가 왼편으로 올라가서 오른편으로 내려오는 일과 오른편으로 올라가서 왼편으로 내려오는 일도 있는데, 그 이치는 본래 같은 것이다.

   단학丹學의 경전에서는 저절로 그렇게 되는 것을 가르치고, 삿되거나 거짓된 이치는 말하지 아니한다.

   또한 눈동자에서 빛을 발하는 것은 차원이 낮은 빛이고, 원신元神과 원기元氣의 빛이 아니다.

   마음의 빛은 바깥에도 속하지 아니하고, 안에도 속하지 아니하니, 만약 인식의 대상에 끌려서 보고싶어 하게 되면, 마魔로 되는 것이다.

   그대들은 때묻고 물들은 지 오래 되었으므로 한순간에 깨끗하게 하기가 어렵지만, 알고 보면 이 일이야말로 죽느냐 사느냐의 큰 일이다.

   한번 빛을 돌리고, 정精과 신神을 거두어 다시 살려서, 스스로의 마음에다가 빛을 쏟아 붓게 되면, 그것이 바로 부처께서 전해주셨던 등불인 것이다.

   부처께서 전해 주셨던 등불이라는 것은 언제나 변함없이 꺼지지 아니하는 촛불을 켜서 비추는 것이다.

 

 

問 : 배우고 익히는 일은 성性으로부터 시작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答 : 성性을 배운다고 해서 명命을 배우는 일을 다해 마치지 아니한다는 것이 아니다. 먼저 성性을 찾아내서 그로부터 이끌어 가서 명命에 이르도록 하여서 명命에 막힘이 없어지면, 성性도 탁 터지게 되는 것이다.

   성性은 명命이 아니면 탁 터지지 아니하고, 명命은 성性이 아니면 다 이루어 마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역易』에서는, `이치를 끝까지 깨닫고 성性을 다해서 명命에 이른다`[窮理盡性, 以至於命]라고 하였다.

   바닥 끝까지 들어가서 깨닫지 아니하고서야, 어찌 신령한 물건이 그곳에 숨어 있어서, 사람을 살리기도 하고 죽이기도 한다는 것을 알 수 있겠는가?

   죽고 사는 것이 오직 이 하나에 달려 있을 뿐, 달리 알 수 없는 묘한 관문[玄關]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問 : 마음을 하나의 곳에 이르도록 한다는 뜻을 묻습니다.

 

答 : 마음을 하나의 곳에 이르도록 한다는 것은 참으로 옳은 말이다.

   그러나 마음이라는 것은 그것이 있어야 하도록 정해진 곳이 없을 뿐만 아니라 힘찬 물고기가 튀어오르듯 살아서 움직이면서 무엇이든지 찾아내기를 잘 하고, 모양, 모습이나 색깔의 굴레 속에 들어 있지 아니한 것이다.

   모양·모습이나 색깔이라는 것은 모두가 한 차원 아래의 것, 다시 말해서 후천後天의 것이다.

   대상을 안다는 것[知者]은 마음의 작용이고, 참다운 속 알맹이가 없으므로 텅 비고[空] 타던 불이 꺼진 듯 고요함[寂]은 마음의 본바탕이다.

   만약 태어난 뒤에 이루어진 세계 곧 후천後天에 매달려 있으면, 당연히 태어난 뒤에 이루어진 탁한 기[氣質]가 일을 맡아서 처리하게 되니, 아무리 다스리려고 하여도 결국 끝까지 이를 수가 없으며, 일을 다해 마치려고 하여도 결국 그렇게 할 수 없게 된다.

 

 

問 : 신神이 기氣의 가운데에 들어가는 일을 묻습니다.

 

答 : 어떻게 신神이 어디에로 들어갈 수 있느냐? 신神이란 기氣의 속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고, 들어가 있지 아니하는 곳이 없는 것이다.

   이른바 신神이 기氣의 가운데로 들어간다는 것은 태어난 뒤에 이루어진 후천後天의 신神이 그러한 것이고, 태어나기 이전부터 있던 선천先天의 신神이 그러한 것이 아니다.

   정해져 있는 길을 가기 위하여 그 관문을 들어가는 일을 배우고 익힘에 있어서는, 기氣의 가운데라는 것이 곧 마음의 가운데인 것이니, 자세히 살펴야 하는데 그렇게 자세히 살펴보면, 그곳이 곧 이해하기 어렵고 묘한 진리의 관문[玄關]이 열려 있는 곳임을 알게 된다.

   만약 힘을 들여서 억지를 부리면, 문이 아닌 곳을 파고들어 가게 되니, 이해하기 어렵고 묘한 진리의 관문[玄關]을 여는 곳이 아니다.

   온몸을 도는 기氣라는 것은 아주 위험하기도 하므로 잘 알아 두지 아니하면 안 된다.

   이해하기 어렵고 묘한 진리의 관문[玄關]이라는 것은 다름아니라 하늘의 한가운데이니, 구멍[竅] 가운데에서 가리켜 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만약 가리켜 낼 수 있는 어떤 장소가 있다면, 그것은 곧 만물의 운행 변화를 말하는 오행五行이라는 굴레의 속으로 들어가는 것인데, 이 일은 그러한 운행 변화를 벗어나 있는 일이다.

   우리의 가르침과 배움[玄學]은 만물의 운행 변화 속으로 떨어지지 아니한다.

   그러한 운행 변화가 있다면, 그는 스스로의 몸으로 힘써 실천하지 아니한 사람이다.

   말과 말을 가지고 그 숨은 비밀을 알려 줄 수 있는 것도 아니요, 글 구절을 가지고 그 속 사정을 보여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말없이 깨달을 뿐이요, 여러 말을 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다.

 

 

問 : 자세하게 몸소 겪어 나가는 모든 배움과 익힘에 있어서는, 반드시 별난 짓을 하지 말고 자기에게 필요한 것을 하도록 하여야 한다는 점을 묻습니다.

 

答 : 어떠한 배움과 익힘이든지, 엄격하지 아니하고서 빈틈없이 해낼 수 있는 것이 있겠으며, 엄숙하지 아니하고서 공경하는 마음이 있을 수 있겠는가?

   두텁고 공손하여서 스스로를 쓸어지지 아니하도록 하고, 나타나는 경우와 어두움에 묻히는 경우에도 한결같아서 그것을 하나로 합하며, 본바탕과 작용의 사이에 서로 다름이 없도록 한다면, 배우고 익히는 일이 따로 어디에 있겠는가?

   어찌 이른바 큰 진리는 말없이 부드럽게 존재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어떠한 때이든 사리事理에 맞고 일에 열중하지 아니하는 때가 없게 되며 어떠한 일이든 너그럽고 막힘없이 통하지 아니하는 일이 없게 된다.

 

 

問 : 숨을 고르는 일[調息]을 묻습니다.

 

答 : 코로 쉬는 숨은 바깥 세계의 숨이니, 눈에 보이는 몸에서 일어나는 일이다.

   마음과 숨이 서로 의지하게 되어야만[心息相依] 비로소 참다운 숨[眞息]이 되어서, 나가는 숨도 모든 연분을 따르지 않게 되고, 들어오는 숨도 물질이 쌓여서 이루어진 세계를 따르지 않게 된다.

   그 열리고 닫히는 기틀과 관문이 되는 구멍[竅]의 묘함은 한때의 우연으로 들여다볼 수 있는 것이 아니고, 반드시 오랜 세월 노력이 쌓이고 쌓여야 된다. 그렇게 하노라면 하루아침에 환하게 꿰뚫어 터지니, 하늘과 땅이 나의 바깥에만 있는 것이 아니요, 사람이 그 가운데 큰 존재로서 하늘과 땅이 함께 서있으며, 모든 운행 변화가 하나의 뿌리에서 피어나오는 것임을 알게 된다.

   눈에 보이는 몸에서 찾지 아니하여도 저절로 참다운 숨이 이루어지게 된다.

   참다운 숨은 숨을 쉬지 않지만 그럴수록 오히려 숨이 힘차고 솟아나는 듯이 이루어진다.

   몸의 어디를 살펴보면서 숨을 쉰다든가, 몸 속에서 나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면서 숨을 쉰다든가 하는 것들도 역시 눈에 보이는 몸에서 일어나는 일이니, 이러한 숨의 힘을 빌어서 마음을 거두어 잡는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명命으로 이어지는 맥脈이 안 된다.

   명命으로 이어지는 참다운 맥脈은 어디까지나 참다운 것 가운데에서 찾아야 하는것이다.

 

 

問 : 원신元神을 가리키는 기토己土는 죽고, 원정元精을 가리키는 무토戊土는 살아난다는 것을 묻습니다.

 

答 : 우리의 가르침을 배우고 익힘에 있어서는 원신元神을 가리키는 기토己土도 역시 죽지 아니한다. 원신元神이 죽으면 원정元精을 가리키는 무토戊土도 살아나지 못하며, 단전丹田의 원정元精이 살아나면 그것이 곧 상단전上丹田의 원신元神이 살아나는 것이다. 이러하지 아니하고 막힌 곳을 뚫고 숨은 것을 드러내 놓을 수 있는 길은 없다.

 

 

問 : 반드시 원신元神을 가리키는 기토己土를 불려서 실 한 오라기 걸려 있지 아니한 경지에 이르러야만, 그 다음에 원정元精을 가리키는 무토戊土가 단전丹田에서 발생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答 : 비록 그렇기는 하지만 원신元神을 가리키는 기토己土가 어느 정도 불려지게 되면, 단전丹田의 원정元精을 가리키는 무토戊土가 곧 발생한다.

   반드시 단전丹田의 원정元精을 가리키는 무토戊土가 살아나야만, 원신元神을 가리키는 기토己土 속에 들어 있는 음陰한 찌꺼기들을 없앨 수 있게 된다. 그렇지 못하면 단지 음陰한 영靈에 지나지 못하니, 제나름대로 무엇을 얻은 것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귀선鬼仙일 뿐이다.

   우리가 따르는 진리의 길은 그와 같지 아니하여, 하늘에 통하고 땅을 뚫고 나가서 그 묘한 작용이 넘쳐 흐르지 아니하는 곳이 없게 된다.

   그대들의 자질은 높은 편이 아니어서 한걸음 한걸음씩 나아가야 되고, 단계를 건너뛰어서 갈 수가 없지만, 성性의 하늘을 보게 되는 경우에는 그렇지 아니하다.

   성性의 하늘을 보지 못하면, 마치 검은 옻칠을 한 통 속에서 이리저리 발자취를 더듬는 것과 같으니, 어찌 마른 나무등걸 같이 앉아만 있는 겉모양뿐인 선禪에 의하여, 아무것도 얻어내는 것이 없는 경우에 높은 경지로 뛰어올라서 윗세계에 뚜렷이 알려질 수 있겠는가?

 

   태아와 같은 숨[胎息]이라는 것은 사람의 의식 세계를 벗어나 있는 어떤 알 수 없는 힘에 의하여 이루어지는 것이므로, 신령한 숨[神息]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한 숨이 아니면 태아가 있을 수 없고, 태아가 아니면 그러한 숨을 쉬지 아니한다.

   태아와 같은 숨을 배우고 익히는 일이 곧 진인眞人의 숨을 이루는 일인데, 그것은 발뒤꿈치로 깊이깊이 쉬는 숨이다.

   그 안에 들어간 경지를 말하게 되면, 안과 밖을 나눌 수 없다고 할 수 있지만, 한편으로는 안과 밖을 오히려 구분하여야 할 때도 있다.

   안과 밖으로 구분된다는 것은 세 개의 관문이 있다는 말이고, 안과 밖으로 구분됨이 없다는 것은 움직일 때나 움직임을 여의고 있을 때나 한결같아서 움직임動과 움직임을 여읨靜이 하나로 합하여져서 서로 섞여 가지고 한덩어리로 이루어져서 질적인 변화[化]를 한다는 말이다.

   질적인 변화[化]가 아니면 신령하다고 말할 수 없을 것이다.

   또한 진리를 지혜의 빛으로 비추어 보지 아니하고, 제 나름대로 어떤 깨달음의 경지에 이르렀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터진 구름 사이로 새어나오는 햇빛을 보는 것에 지나지 아니한다.

 

 

問 : 늘어나고 줄어듦이라든가, 들어오고 나감이라든가 하는 것[消息]이 기氣 아니겠습니까?

 

答 : 그렇다. 기氣는 반드시 진리에 맞게 줄어 들었다가 늘어났다가 하여야 하며, 들어왔다가 나갔다가 하여야 하는데, 우리의 가르침을 배우고 익히는 일에 있어서는, 양陽으로 되어 위로 올라가고, 음陰으로 되어 아래로 내려가는 일이 그것이다.

 

 

問 : 신神과 기氣가 부족한 것을 묻습니다.

 

答 : 신神과 기氣가 모자라면, 스스로의 근본이 자꾸만 소모되게 되니, 너무 오래 되기전에 잘 채워 주어야 한다. 그것을 채워 주면 불을 때는 것처럼 위로 올라가고, 용龍이니 범[虎]이니 이해하기 어렵고 묘한 진리의 관문[玄關]이니 하는 것들이 한꺼번에 단박 나타난다.

 

 

問 : 나의 몸 안에서 감坎괘와 이離괘에 해당하는 것들이 어우러지면, 그로 말미암아서 대약大藥이 나오니, 한점의 근본된 성[元性]이 곤坤괘에 해당하는 아랫배에 감추어져 있으면서 그 빛을 발하여 은은히 비쳐 나오는 줄로 압니다.

   티없이 깨끗하고 잡념을 끊어 버려서, 숨은 멈춘 듯하고 기氣는 편안하며, 오직 텅빈 가운데 밝음만이 있는 경지를 하늘과 땅의 마음[天地心]이라고 하는데, 그것이 모든 사물의 운행 변화를 맡아서 처리한다고 압니다.

   가르쳐 주시기 바랍니다.

 

答 : 기氣가 편안하고 숨이 멈춘 듯한 것이 바로 나의 성性과 명命의 기틀이 다시 살아나게 되는 이치이다. 이치가 그러하기 때문에 다시 걷잡을 수 없이 힘차게 살아서 뛰어오를 것이다. 그러한 상태를 사람들이 살아나는 자시[活子時]라고 한다.

 

 

問 : 하늘과 땅은 해와 달이 아니면 드러나지 아니하니, 해와 달이 공간에서 사라지면 하늘과 땅이 소용돌이치게 됩니다.

   신神과 기氣가 합치고, 기氣가 맺히며 신神이 엉기면, 그것이 곧 감坎과 이離가 어우러지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答 : 감坎과 이離는 느끼거나 의식할 수 없는 경지에서 어우러지게 되지만, 숨을 쉬는 것은 아직 줄어들지 아니한다.

   하늘의 길은 옮겨가지 아니하는 때가 없으나, 묘한 것은 정해진 시기없이 합쳐지는 것이다. 마음으로 그렇게 되도록 하는 것이 아니다. 살고 죽는 것이 하늘에 달려 있는데, 하늘이라는 곳에 이러쿵저러쿵 하는 마음이 있는가?

 

 

問 : 빛을 돌려 되비추는 것이 삶과 죽음을 갈라 놓는 바다를 건널 수 있는 뗏목이요, 옥액玉液을 마셔서 온몸에 퍼지게 하는 것은 몸속의 물[水]로서 불[火]을 제어하는 일을 묘하게 비유한 것입니다.

   사람의 마음이 깨닫는 것을 두고 말한 것 같으면, 그 본바탕은 하나이지만 그 작용은 둘이니, 잠들었다가 깨어나는 깨달음과 저절로 진리를 깨닫는 깨달음이 있습니다.

   잠들었다가 깨어나는 깨달음은 마치 번갯불이 번쩍하는 것과 같고, 눈과 귀가 보고 듣는 것과 같으나, 저절로 진리를 깨닫는 깨달음은 마치 소리가 저절로 귀에 들어오고, 물건이 저절로 눈에 와 닿는 것과 같이 아무 일도 하지 아니하지만 하지 아니함이 없고, 아무런 것도 없지만 없는 것이 없는데 생각이 한번 일어나면 신神이 저절로 밝게 빛납니다.

   『역易』계사전繫辭傳 상에 `…… 그 낌새를 아는 것, 그것은 신神이로다! ` 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것이 어찌하여서 그렇게 되는 것인지 알고자 하지 말고, 언제나 변함없이 일어나는 상황에 응하면서 언제나 변함없이 움직임과 변화를 여의고 있으면, 이것이 곧 이른바 위 없는 진인眞人의 가장 높은 자리[最上一乘]가 아니겠습니까?

 

答 : 이 비유는 어디까지나 마음으로 확인 증명 해야만 되는 것이다.

   진리를 배우는 사람이 얽히고 설켜서 몸에 휘감기는 가운데에서도 날과 씨가 되는 가닥을 용케 뽑아내는 묘한 방법을 얻고자 하여야 된다. 그렇지 아니하다면, 어찌 남다르다고 하겠는가? 평범한 사람들일 뿐이다.

   순탄한 경우[順境]에야 누군들 지낼 줄 모르겠는가마는, 그저 조금만 어려운 경우[逆境]를 보태어 놓아도 하늘을 원망하고 남을 탓하는 마음을 없애지 못하니, 평소에 어떤 일을 배우고 익혀 놓았는지 알 수 있지 않겠는가?

   하늘과 땅의 낳고 길러주는 보답을 받을 수 있기 위하여는, 어디까지나 스스로 헤아려 보아야 하지 않겠는가?

 

 

問 : 움직임과 변화를 여의고 조용함[靜]을 몸에 익히는 것을 묻습니다.

 

答 : 어디 한번 그대는 어떠한 때와 어떠한 곳에서 움직임과 변화를 여의고 조용함을 익히는가 물어보자.

   만약, 이 몸뚱이가 평안하기를 바라서 그렇게 한다면, 그것은 건강이나 기르는 조그만 기술이요, 하늘과 땅이 싫어하는 바이니, 이른바 게으른 놈팡이라는 것이다. 어찌 진리를 배운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넓고 크고 높고 밝은 것은 어느 때 어느 곳에서나 막힘없이 통하니, 그러함이 그 흐름이고, 그것이 만물을 만들고 키움인 것이다.

   진리는 삶[生]으로써 그 길을 삼고, 물리적이거나 화학적인 변화를 일으키니, 진리의 길을 닦는 사람들은 움직임과 변화 속에서 있으면서도 티끌을 떠나 있고 세상의 일을 벗어나 있고자 하여야 하는데, 오히려 그 빛을 조화시키고 그 티끌과 함께하는 방법을 전혀 모른다니 어찌된 말이냐?

   하늘은 하늘이고, 땅은 땅이며, 사람은 사람이되, 사람에게서 떠나 있지 아니하다. 어찌 사람과 멀리 있을 수 있겠는가? 하물며 진리야 사람에게서 멀리 있지 아니하여, 매일 매일의 쓰임에서 언제나 운행하는 것이 진리아님이 없음에 있어서랴!

   진리의 운행이 하늘과 땅에 있으면 하늘과 땅이 되고, 사람에게 있으면 사람이 되고, 신神이 보존되고 만물의 운행 변화하는 이치를 알게 된다.

   어찌 진리가 사람에게서 멀리 있다고 하겠는가?

 

 

問 : 사람에게는 영리하고 아둔한 구별이 있고, 가르침에는 그 입장의 차이가 있습니다.

   만일 타고난 자질이 밝고 튼튼하다면, 그 사람의 본래 바탕이 밖으로 드러나고, 마음의 빛이 밝아서 그 기틀을 살펴보기에 충분하며, 건강은 일의 끝을 보기에 충분하니, 가르침을 배우고 익힘이 저절로 쉽고 간결하게 이루어져서 부처의 길을 좇아가는 지름길을 방해하지 아니하도록 되어 있어 한번 좇아가서 곧바로 여래如來의 경지에 들어갈 수 있는 것입니다.

   만약 본래의 바탕이 어둡고 가려져 있다면, 그것은 텅 빈 경지에 이르는 배움과 익힘이 아직 부족한 것입니다.

   텅 빈 경지에 이른다는 것은 일의 옳음을 모으는 일[集義]입니다. 어떤 경우에 마땅함이 있을 때에, 그 마땅함에 맞고 합치되는 것을 일의 옳음이라고 말하는데, 그 마땅함에 맞고 합치된다는 것은 곧 사람의 마음에 아주 꼭 들어맞는 경우인 것입니다. 아주 꼭 들어맞는다는 것은 다름아니라 넘치지도 않고 모자라지도 아니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알고 있다면 어떠합니까?

 

答 : 사람의 마음이 어둡고 가려져 있으면, 뚫고 들어가서 비추는 수가 있다.

   단지 어렵게 아느냐 타고난 능력으로 아느냐 하는 구별과, 노력을 하여야 하느냐 노력을 하지 아니하여도 되느냐 하는 구별이 있을 따름이다.

   오직 비추어내기만 한다면 텅 빔에 이를 수 있는 것이요, 아주 꼭 들어맞는 곳이라는 것은 이미 어디에서도 찾을 곳이 없어지는 것이다.

 

사람의 인정이 차고 더운 것이나, 세상살이의 변하고 헛됨을 미리 예측하기는 참으로 어려워서 하나도 정해져 있는 것이 없다.

꽃이 필 때에는 사람들이 즐겁게 보지만, 꽃이 질 때에는 한 무더기 거름풀에 지나지 아니하여서, 쓸어 버려야 할 것으로 되니, 쓸어 버려서 깨끗하게 되면, 다시 눈에 보이지 아니하는 것은 이치[道]로 남고, 눈에 보이는 것은 이치를 담고 있는 그릇[器]으로 남는다.

 

나의 얻음이 하늘과 땅과 더불어 그 유구悠久함을 같이하는 것은, 하늘과 땅의 살리기를 좋아하는 마음[好生之心]을 본받았기 때문이다.

 

그대들이 만약 그와 같은 바람[願]을 일으켜서, 능력과 재주에 따라 스스로에게는 손해를 끼치지 아니하고, 남에게는 이익을 주며, 때와 일에 따라 힘껏 행하되, 오직 마땅함에 맞고 허물이 없도록 한다면, 화禍를 바꾸어 복福이 되게 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이 바로 길吉한 별이요, 우리의 가르침이 토해내 놓은 큰 제자이니, 다음에 죽어서 저세상의 보답을 받고, 사람들의 화복禍福을 좌지우지하는 권한을 얻을 것이요, 나보다 못할 것이 없을 것이다.

 

나의 말하는 바가 흘려 버리는 이야기가 아니니, 반드시 잘 알아듣도록 하라.

 

오늘날 진리를 배우는 사람들은 흔히들 움직임과 변화를 여의는 것만을 좋아하고 움직임과 변화는 싫어하는 잘못을 범하고 있으나, 그것은 스스로에게 얽혀 있는 원한이나 골치아픈 일을 억지로 벗어나려고 하여도 여전히 그 인연을 마쳐 버리지 못한다는 이치를 모르는 것이다.

 

제멋대로 사람과 만남을 끊고 세상을 피해 산림[山林] 속으로 깊이 들어가서, 호랑이나 승냥이나 늑대나 도깨비나 두억시니가 거친 벼락이나 매운 바람으로 하여금 사람의 마음을 놀라게 하고 신神을 떨게 한다.

 

더구나 피와 살로 된 몸뚱이는 옷을 입고 먹을 것을 먹어야 하거늘, 그것을 공급할 수 없어서 이곳저곳으로 사람들에게 빌며 돌아다니게 되니, 추위와 더위와 장마비가 몸을 파고들어서, 신진대사의 조절과 건강의 보호를 할 수 없게 되고, 마침내 괴로움과 병이 생긴다.

때가 이르러도 깨닫지 못하고 옆길로 달려 들어 가서는 오히려 진리를 배우는 것이 아무런 이익도 없다고 후회하니, 남들을 해치기에 아주 알맞다.

 

또 하나의 부류는, 산림山林을 그리워하여, 지금 그러한 일을 하는 것이 마땅한지 그렇지 아니한지 생각해 보지도 않고, 그저 티끌을 떠나겠다고만 하여서, 세속의 흐름과 다르고자 하는데, 이것은 찾아온 기회를 망치고 이룰 수 있는 일을 잃어버리는 것이다. 그래서 일이든 몸이든 모자라는 곳이 많게 되고, 정신이 날로 무너져 내리며, 진리도 물론 알아낼 수 없게 되지만, 스스로 길을 잘못 들었음을 알지 못하고 옆문으로 달려가서는, 오히려 `본래 선善은 창성하지 못하는 것이며, 진리는 배울 수가 없는 것이다`라고 말하곤 한다.

 

거기에다가 삿된 스승과 이상한 지파를 만들어서, 우뚝하게 솟아 있는 진리의 용마루[道宗]를 어지럽게 만들고, 명예나 낚으려고 한다.

 

털끝만한 차이가 결국 천리의 차이를 가져와서, 우리의 가르침을 해치게 된다.

 

오호라! 두세 제자가 뜻을 높게 일으켜서, 우리의 가르침의 묘함을 몸으로 익혀 보고, 그 아득한 이치를 뚫고 나가서, 세상살이 가운데에서 힘들여 그것을 닦으니, 오히려 산림山林에서 닦는 것보다 훌륭하다.

 

우리의 가르침은 아랫대의 제자들에게 전해져 내려갈 것이지만, 언제나 세상살이 가운데에서 그것을 닦아 지닐 것이고, 깊은 산의 음험한 굴에 들어앉아서 세상을 피하고 사람과의 만남을 끊고는 스스로 훌륭하다고 하는 사람이 되는 것을 허용하지 아니한다.

 

사람이 생겨나는 것을 보면, 태초의 우주같이 섞여서 잠겨 있는 가운데에서 후천의 기氣를 품게 되어, 그 바탕이 생겨나게 되고, 그 지각知覺이 있게 됨에 이른다. 그럴때에는 음陰과 양陽이 이미 나누어져 있고, 좋아하는 마음이나 욕심이 대단히 뚜렷하게 물들어 있는데, 길吉하고 흉凶하고 후회[悔]되고 아까워함[吝]이 드넓게 자리잡아도 스스로는 모른다.

 

음陰과 양陽이 크게 아주 나누어져 버리면, 원기元氣를 다시 일으킬 수 없고, 그대로 이어나가 죽음으로 이를 뿐이다.

 

그러한 후천의 기氣의 바탕이 되는 선천의 기氣는 바로 하늘과 땅의 기氣로서, 그대들이 독차지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 가운데에 진리의 통함이 보존되어 있으니, 선善한 사람은 그것을 선하게 하고, 악惡한 사람은 그것을 악하게 한다.

 

악한 삶의 세계에 떨어지거나, 이단의 무리에 떨어지거나, 그 넋[魄]이 음陰의 세계로 돌아가거나, 얼[魂]이 흩어지거나, 그 느낌이 얇거나, 남의 알게 됨을 만나고자 하거나 하는 그 모든 것을, 하나의 그릇에 담아서 볼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렇게 되는 큰 실마리를 볼 것 같으면, 벼[禾]에서 기장[黍]이 생기지 아니하며, 봉황이 까마귀를 기르지 아니하는 것과 같이 각각 우리의 가르침과 같지 아니한 곳이 있기 마련이다. 사람들의 좇아가고 있는 방향이 어떠한지 보면 알 수가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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