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여러 번의 다양하고 연속된 생을 통해 현재의 위치에 이르렀다는 사실을 이해한다면, 지난 날 진화해온 과정으로 인해 과연 어느 정도의 지식을 얻었는지 의문이 생긴다. 그러한 지난날은 대단히 흥미로운 주제이기 때문에 우리들은 관심을 가지지 않을 수 없다.
다행히 그러한 지식은 얻을 수 있다. 말로 전하여져 올뿐만 아니라 보다 확실한 방법으로 획득할 수 있다. 이곳에서 그러한 지식을 얻기 위해 초자연적인 신비력까지 동원해서 언급할 지면은 없다.
다만 이 세상의 모든 것은 지워지지 않은 기록을 남긴다는 것을 밝혀둔다(자연에는 기억이라고 말할 수 있는 일종의 장치가 있어서 세상이 생겨난 이래 발생한 모든 사건이나 장면을 완전하고 정확하게 알아낼 수가 있다).
이러한 주제에 대해서 생소한 사람들이나 증거를 보고자 하는 사람들은 부케넌(Buchanan) 박사의 「싸이코메트리(Psychometry)」나 덴톤(Denton) 교수의 「사물의 영혼(Soul of Things)」을 참조하기 바란다.
오컬티스트에게는 그러한 가능성이 매우 친숙할 것이며 과거의 기록을 읽는 방법에 대해서도 전혀 생소하지 않으리라 믿는다.
자연의 기억은 본질적으로 인간이 도저히 가까이 갈 수 없는 신의 기억이다. 그러나 이 기억은 의심의 여지없이 하위계로 반영된다. 그렇기 때문에 하위계에 관련된 경우라면 인간의 훈련된 지능에 의하여 상기될 수 있다.
가령, 거울 앞을 지나가는 모든 것들은 거울의 표면에 자신의 상을 드리운다. 우리들의 희미한 눈에는 거울 표면에 아무런 인상도 남기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모든 것이 지나가고 나면 아무런 흔적도 없이 원래 그대로인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모든 소리가 축음기의 민감한 실린더에 인상을 남기는 것과 마찬가지로 거울 표면에도 인상이 남을 수 있다는 것을 상상하기는 그리 어렵지 않다.
또한 축음기에서 원래의 음색을 다시 재생하듯이 거울 표면에서도 원래의 인상을 다시 살릴 수 있다는 것은 설득력 있는 설명이다.
고도의 정신능력은 그에 대한 가능성뿐만 아니라 그것이 실제라는 것을 보여준다. 그것도 거울 뿐 아니라 모든 물리적 물체가 시야에서 일어난 모든 인상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처럼 우리들의 세계와 인류의 초기 역사에 정확하게 도달할 수 있는 방법이 틀림없이 있었으며, 이러한 방법으로 모든 장면들을 마치 우리들이 보고 싶어하는 부분을 재현하듯이 자세하고 정확하게 볼 수 있다(「투시」참조).
이러한 방법으로 지난 과거를 탐구하면 장구하며 느리지만 결코 멈추지 않는 점진적인 진화의 과정을 볼 수 있다. 그것을 보면 인간의 개발은 두 가지의 위대한 법칙아래서 작용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첫째는 진화의 법칙으로 인간은 꾸준히 앞으로 그리고 위로 나아가고 있다는 것이며, 둘째는 신성한 정의의 법칙 혹은 인과의 법칙으로 사람이 행한 모든 행위의 결과는 피할 수 없이 그 자신에게 돌아온다는 법칙이다.
이 두 번째 법칙은 첫 번째의 법칙과 조화를 이루며 지성적으로 살아야 한다는 것을 점차적으로 깨닫게 한다.
이 길고 긴 진화의 과정은 지구상에서뿐만 아니라 관련된 다른 천체에서도 행해지고 있다. 그러나 이 문제는 이와 같은 초보적인 입문서에서 다루기에는 너무나 방대한 내용이다.
이에 관해서는 블라바츠키여사의 기념비적인 저서인 「비경(The Secret Doctrine)」에서 주요하게 다루고 있다. 그러나 「비경」을 읽기 전에, 베산트여사의 「고대의 지혜(Ancient Wisdom)」와 시네트의 「영혼의 성장(Growth of the Soul)」 중에서 이러한 문제를 다룬 장을 먼저 읽어보기를 권한다.
이와 같은 저서에서는 인간의 과거뿐만 아니라 미래에 대한 유용한 지식도 함께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비록 인류를 기다리고 있는 미래의 영광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이지만, 적어도 그러한 영광으로 인도하는 초기의 첫 단계를 다소나마 이해할 수는 있을 것이다.
사람은 지금도 신성하며 자신 안에 있는 신성한 가능성들을 계속해서 펼치고 있다는 개념은 일부 선량한 사람들에게 충격을 줄 듯하다. 그들은 아마도 이와 같은 개념이 신성 모독적인 경향을 품고 있다고 생각할 것이다.
왜 이와 같이 생각하게 되었는지는 쉽게 이해가 가지 않는다. 왜냐하면 예수 자신도 경전에서 자신의 주위에 있는 유태인에게 이렇게 말하고 있지 않은가.
“내가 말하노니 너희가 신이다.”
그리고 인간의 신격화에 관한 교의는 기독교 초기의 신부들에 의해 상당히 널리 퍼지고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초기의 순수했던 교의는 망각되고 오도되어 오직 오컬티스트의 학도들에게만 그 온전한 의미가 전수되고 있는 듯하다.
만약 모든 것이 애초부터 신성의 불꽃이었다면 장구한 세월에 걸쳐 그처럼 많은 고통과 어려움을 겪어가면서 진화하여 결국 그대로의 신성을 이룩하는 것에 대해서 의구심을 갖게 될 것이다.
이러한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은 아직 신의 계획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이다. 신성에서 나왔을 때, 그대는 아직 인간이 아니었다(인간은 고사하고 심지어 불꽃도 아니었다. 왜냐하면 아직은 개별화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농축되었을 때는 수많은 불꽃으로 화할 수 있는 가능성을 가졌을 뿐, 그것은 신의 에센스로 이루어진 거대한 구름이었다.
신성에서 나왔다가 되돌아갈 때의 상태의 차이는 발광하는 거대한 성운 덩어리와 거기에 형성되어 나온 태양계의 차이와 같다고 볼 수 있다.
성운은 의심의 여지없이 아름답기는 하지만 막연하고 아무 소용이 없다. 그러나 성운에서 긴 세월동안 서서히 진화되어 형성된 항성인 태양은 천천히 회전하면서 많은 세계와 거기에 살고있는 존재에게 생명과 열과 빛을 아낌없이 쏟아주고 있다.
또 다른 비유도 해볼 수 있다. 인간의 육체는 무수히 많은 미립자들로 구성되어 있고 그 중의 일부는 계속해서 육체에서 방출되고 있다.
가령, 이와 같은 미립자들 각각이 일종의 진화를 거친 후 인간이 된다고 가상했을 경우, 그 미립자가 진화를 시작했을 때, 어떤 의미에 있어서는 인간의 시작이었다고 말할 수 없는 것처럼 진화의 종말에 이르러 아무 것도 얻은 것이 없다고도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비록 신성의 힘에서 나온 것이라 할지라도 처음에는 단순히 에센스의 분출일 뿐이었다. 하지만 스스로의 힘으로 로고스 안으로 진화할 수 있는 수천, 수만의 위대한 아데프트가 된다.
인간의 미래는 무한한 영광과 장엄함 속에 있다고 하는 이와 같은 설명은 충분한 정당성을 가지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
우리가 명심해야할 중요한 사항은 이 장엄한 미래가 예외 없이 모든 사람들을 기다리고 있다는 점이다. 우리가 선인이라고 부르는 사람(신성의 의지에 따라 움직이고 진화의 행진을 돕고자 움직이는 사람)은 위로 향하는 이 길에서 빠른 진보를 보인다.
반면 모든 사람들의 이익을 위해서 힘을 쓰는 것은 고사하고 위대한 전체의 흐름을 거역하고 이기적인 목적을 추구하는 사람은 매우 느리고 간헐적인 진보만을 나타낼 뿐이다.
하지만 신의 의지는 어떠한 인간의 의지보다도 무한히 강하며 위대한 계획은 완벽하게 작용하고 있다. 처음에 이러한 교훈을 배우지 못한 사람이라면 이를 익힐 때까지 몇 번이고 반복해서 이를 습득해야 한다.
신의 인내는 무한하다. 그러므로 모든 인간은 조만간 자신에게 주어진 목표에 도달하게 된다. 신의 법칙과 의지를 알고 있는 사람은 두려워하거나 불안해할 필요가 없다. 오직 완벽한 평화만이 있을 뿐이다.